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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야기'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교육자다. 이를 통해 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삶과 사회의 다양한 모습들을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무섭게 그려내며 은연 중에 이들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유희와 교육의 절묘한 조합이었다. 그렇기에 시대가 바뀌며 수많은 것들이 사그라질 때도 이야기의 존재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한 구전을 뛰어넘어 다양한 매채들을 거치며 그 영향력을 더욱 탄탄히 해왔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의 사회적 힘은 더욱 커지고 있음에도 정작 그 무게는 가벼워진 것 같아 안타까움이 든다. 옛날 사람들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가볍게 말해 주고자 했던 무거운 주제들은 이미 저 구석으로 밀려난지 오래다. 그렇게 되니 자연히 그것을 찾는 이들도 적어지게 됐다.

허나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시류를 거슬러 다시금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 깊숙한 내면의 중요한 이야기들을 하고자 하는 작품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찾는 대중 역시 이에 맞춰 자연스럽게 증가하고 있다. 최근 한 포털에 연재를 시작한 만화가 있다. 연재를 시작한지 몇 주 만에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웹툰 <죽음에 관하여>가 바로 그것. 이 웹툰 역시 그런 작품들 중 하나다. 인류의 삶과 절대 분리될 수 없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영원히 풀 수 없는 난제인 '죽음'. 이 만화는 일반 대중들이 결코 가까워 하기를 즐기지 않는 그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넘어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아니, 과연 뭔가가 있기는 한 것일까?
▲ 아무데도, 아무것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넘어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아니, 과연 뭔가가 있기는 한 것일까?
ⓒ 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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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죽음'이 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부터다. 지금으로부터 약 3주 전,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앞의 건물에서,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던 고3 학생이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발생했다.

그 때문에 학교는 물론 동네 분위기 전체가 상당히 뒤숭숭해졌고, '성적 비관'이라는 이유로 삶의 길에서 벗어났던 그가 생을 포기하던 그 시간에 학교에서 '야자'를 하고 있던 나는 더욱 기묘한 기분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새삼스레 어릴 적 마음 한 구석으로 밀어뒀던, 아무리 풀려해도 풀리지 않던 실타래가 다시금 꼬인 채 눈앞에 나타난 기분이었다. 죽음이란 게 도대체 뭔지,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허탈하면서도 찝찝한, 한편으로는 짜증스러운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무거운 소식을 안고 귀가한 바로 그 날.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을 돌아다니던 도중 이 만화를 우연찮게도 발견하게 됐다.

단순히 보면 특별할 것 없는 만화다.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된 단편에, 그다지 어렵거나 난해치 않은 그림체. 하지만 작품이 '말하는' 것에서 나는, 많은 이들은 이 작품에 빨려들어가 죽음을 새롭게 마주하게 됐다.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수험생들이, 대학생들이, 취업준비생들이, 그리고 직장인들이 잊고 있던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금 우리 앞에 세우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은 독자들에게 있어 분명 새로운 인식의 틀이었다, 죽음에 대한. 오늘날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는 어떠한가? 비통함·후회·슬픔·한탄... 죽음은 그러한 것들을 일순간에 불러일으키는 비극의 정점이었다. 대부분의 인류에게 이는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역사상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수없이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결국 실패로 끝난 그들은 죽음의 비극성을 더욱더 고조시키는 데 일조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들이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이 확실해진 뒤에, 인간은 종교를 새로운 도피처를 삼아 사후세계라는 개념에 새로운 희망을 쏟기 시작했다. 그 종교가 대대적인 '이성'의 폭격을 받은 오늘날에는, '과학'이 장수와 반(半)영생을 위한 새로운 꿈의 매개로서 추앙받고 있다. 그 대상은 바뀌었을 지언정 죽음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언제나 '부정'과 '도피'였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곳, 혹은 모든 것을 잃은 자들이 택하는 곳.

도대체 우리는 어째서 죽음을 그렇게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으로, 최대한 마주하지 않았으면 하는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걸어가는 삶의 길의 문제다. 길의 초중반부,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길은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나 기회에 충실하기 보다는 많은 경우 그저 그 길을 의미 없이 걸어간다. 때로는 허무하게, 때로는 유희와 함께...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자신은 길의 중앙부를 달리고 있고 그 때 부터는 갑자기 삶이 바빠지고 힘들어진다. 생존의 문제가 절실히 다가오는 순간이기에.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힘들게 그 순간을 넘기고 보면 어느새 길의 후반부에 다달아 있다. 그리고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이 길이 끊기는 순간 역시 멀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제야 인간은 후회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나온 삶에 대해, 그리고 끝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해...
사후세계에서의 심판은, 단죄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지키며 살아가는 도덕, 규칙, 계율... 다 헛짓거리가 아닌가?
▲ 잊을 수 없는 고통 사후세계에서의 심판은, 단죄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지키며 살아가는 도덕, 규칙, 계율... 다 헛짓거리가 아닌가?
ⓒ 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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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들이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긍정할 줄 안다면 그들은 결코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며 눈물 흘리지 않을 것이다. 주저앉고 싶어도 움직이는 발을 보며 한숨 짓지 않을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시간을, 주어진 순간들을 즐기며 자연의 흐름에 자신들을 맡길 테다. 그런 삶에서의 긍정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의 문제는 결국 잣니이 걸어온 길에 달려있다. 많은 이들처럼 그저 남은 시간이 많다는 것만 믿고 어영부영 긴 시간을 걸어왔는가, 그렇지 않다면 매 순간순간에 충실하고 자신만의 길을 만들기 위해 열정적으로 살아왔는가...

여기에 더불어 과연 자신이 길을 걷는 동안 다른 동행자들에 대해 '반칙'을 하지는 않았는가 역시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삶의 마지막을 걷고 있을 때, 자신이 눈물 흘리게 한 이들의 모습은 과연 어찌 다가올 것인지.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종교를 믿는 이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심판', 그 자체인 셈이다. 자신이 헛되이 보낸, 혹은 잘못된 방식으로 보낸 시간에 대한 끝없는 후회와 앞으로 나타날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일반적인 인간은 그것을 완전히 피해갈 수 없다. 다만 어떻게 삶의 길을 걸어왔느냐에 따라 이를 대하는 자세는 천차만별일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두려움과 헛되이 보낸 세월에 대한 실망 때문이 아닐지...
▲ 진정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두려움과 헛되이 보낸 세월에 대한 실망 때문이 아닐지...
ⓒ 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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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을 논할 때 그저 '죽음' 만을 바라보고 이를 논하는 많은 이들의 말은 텅 빈 사과일 뿐이다. 진정한 죽음에 대한 논의는 사람이 위에 서 있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걸어온 그 길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해 질 것이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 역시, 개개인의 주체들이 걸어온 순간들이 어쨌느냐에 따라, 이에 대한 그들의 마음가짐들이 어떠냐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할 것이다.

결국, 이는 뻔하지만 많은 이들이 있고 있던 삶에 대한 긍정과 올바른 삶에 대한 논의로 귀결된다. <법구경>에 적혀있듯이 '세 살먹은 아기도 알지만 일흔 살 먹은 노인도 행하기 어려운' 것들에 다름 아니다.

<죽음에 관하여>라는 작품을 통해 스스로 삶에 대한 긍정이나 올바른 길의 가치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이 '이야기들'이 나에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렇게 가슴이 머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경우가 많다.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충실히, 긍정적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이렇게 삶에 대한 가치들을 꺠우치게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야기가 가지는 놀라운 역설의 효과가 아닐지. 현실에 지친 채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람들, 죽음이라는 담론을 두려워하며 현실에서 도피하고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 그 모든이들이 순간을 행복하게, 충실히 보낼 수 있게 되기를. 그것이 죽음에 관해 말하는 이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일 게다.

매 순간을 행복하게... 충실히...
▲ 행복이란 매 순간을 행복하게... 충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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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죽음에대하여, #웹툰, #자살, #청소년,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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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시민기자. 서울대 로스쿨 졸업. 다양한 이야기들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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