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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에서 내려다 본 동해 방향의 풍경. 본래 석굴암은 직선으로 대왕암과 감은사가 보이는 지점에 세워졌다고 한다.
 석굴암에서 내려다 본 동해 방향의 풍경. 본래 석굴암은 직선으로 대왕암과 감은사가 보이는 지점에 세워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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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관광객들은 감은사터, 기림사, 골굴암을 둘러본 뒤 경주로 들어오면서 추령을 넘는다. 물론 요즘은 말 그대로 고갯길인 추령재 대신 터널을 지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터널을 통과하는 여행이야말로 최악의 역사여행이다. 동서고금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아직은 '국사'에 터널이 등장하지 않는다.

추령으로 가는 길을 벗어나 화랑고등학교 직전에 좌회전을 한다. 토함산의 동쪽 비탈로 난 이 길은 석굴암까지 이어진다. 게다가 이 길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짜릿한 종교적 체험을 느끼게 해주는 답사로다. 이 길로 석굴암에 오르면, 나를 줄곧 지켜보고 계시는 석굴암 부처님의 시선이 온몸으로 느껴지기 때문.

석굴암 부처는, 용이 된 문무왕이 동해에서 대종천 물길을 타고 감은사로 오가는 광경을 직선으로 바라보는 위치에 앉아 계신다고 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석굴암 자리라는 고증이다.

석굴암 부처님이 동해를 응시하는 시선을 거꾸로 타고 산길을 오른다. 길은 구불구불, 토함산 자연휴양림으로 들어가는 이정표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삼거리가 나타난다. 왼쪽으로 가면 불국사에 닿는다.

석굴암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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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 난 오르막 도로를 선택한다. 끝까지 가면 토함산 정상에 닿는 길이다. 입장료를 내고 석굴암을 향해 걸어간다. 하지만 오늘 이 길을 걷는다 해도, 석굴암에 올 때마다 한탄하는 내용이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저 '촬영 금지' 글자가 커다랗게 붙어 있는 입구에 서서 유리창 너머 저 멀리 앉아 계시는 본존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전부다.

석굴암의 본존 부처님은 총 높이 326㎝, 대좌 높이 160㎝, 기단 상대석 폭 272㎝의 거대한 불상이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유리창 밖에서는 그 크기조차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볼 수 없는' 석굴암을 '보려고' 날마다 사람들은 구름처럼 모여든다.

볼 수 없는 석굴암, 구름 같은 인파

석굴암 본존불과 여러모로 닮았다는 장항리 절터 출토 부처. 경주박물관 뜰에 있다.
 석굴암 본존불과 여러모로 닮았다는 장항리 절터 출토 부처. 경주박물관 뜰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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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 때의 대상(大相) 김대성이 불국사를 짓기 시작한 때는 751년(경덕왕 10)이다. 그 후 대성은 773년(혜공왕 9)에 죽었다. 절이 아직 완공되지 못하였으므로 국가에서 공사를 계속하며 774년에 마침내 완성시켰다.

문화재청은 경주시 진현동 891번지에 있는 국보 24호 석굴암이 '경덕왕 10년(751)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고 설명한다.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서 문화재청의 석굴암 해설까지 아니 읽을 수는 없다. '그림 속의 떡' 같지만 그래도 아쉬움을 달래며 해설을 읽는다. 석굴암이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된 근거를 알게 해주는 해설이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 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 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석굴암의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석굴암 불상은 제대로 관람할 수 없지만 그 대신 볼 만한 석불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실망감은 반으로 줄어든다. 석굴암 불상과 꼭 닮은 석불이다. 경주박물관 뜰에 있다. 장항리 절터에서 발굴된 이 불상을 보면, '가까이 갈 수 없는' 석굴암 불상에 대한 아쉬움은 크게 줄어든다. 혹시 경주박물관을 이미 방문했는데도 장항리 석불을 못 보았다면? 다시 재방문을 하는 수밖에.

멀리 석가탑, 가까이 다보탑이 보이는 풍경. 두 탑 사이의 법당이 대웅전. 사진 아래쪽에 관광객이 빼곡하다.
 멀리 석가탑, 가까이 다보탑이 보이는 풍경. 두 탑 사이의 법당이 대웅전. 사진 아래쪽에 관광객이 빼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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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찾아가도 인산인해 이루는 불국사

불국사로 내려온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사찰이 아닐까 싶은 불국사. 언제 찾아가도 말 그대로 인산인해. 말끔한 사진 한 장 찍기가 그토록 어려운 곳. 많은 국보와 국가 지정 보물들을 자랑하는 곳.

국보 20호 다보탑, 국보 21호 석가탑, 국보 22호 연화‐칠보교, 국보 23호 청운‐백운교, 국보 26호 비로전 금동 비로자나불상, 국보 27호 극락전 금동 아미타여래 좌상… 그리고 보물들.

'부처님[佛]의 나라[國]'를 꿈꾸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를 절의 이름으로 채택한 불국사(佛國寺). 이곳에 오면 언제나 진흥왕이 생각난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은 독실하게 불도를 신봉하였다, 말년에는 삭발을 한 뒤 가사를 입고 법운이라는 법명을 스스로 지어 붙인 채 살다가 생애를 마쳤다, 왕비도 지아비를 본받아 역시 중이 되어 영흥사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신라의 광개토대왕'이라는 평가를 얻을 만큼 정복군주였던 진흥왕이 승려로 살면서 생을 마칠 만큼 불교를 숭상했던 나라, 신라는 그런 나라였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보이는 풍경.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보게 되는 불국사 사진이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보이는 풍경.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보게 되는 불국사 사진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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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의 맏아들은 동륜(銅輪)이었다. 동륜은 572년(진흥왕 33)에 죽었다. 둘째아들은 사륜(舍輪). 그런데 진흥왕에 이어 576년에 진지왕이 되는 사륜은 철륜(鐵輪)의 우리식 발음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철'의 우리 발음이 '쇠'라는 점을 감안할 때, 당시 사람들이 '쇠륜' 또는 '사륜'으로 불렀던 진지왕의 이름은 두 글자 모두를 한자로 옮기면 '철륜'이 되기 때문이다.  

<천년의 왕국 신라>에 기술되어 있는 김기흥의 위와 같은 유추는 신라인들이 불교를 극도로 숭상했다는 데 착안한 결과이다. 이는 곧, 진흥왕이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에서 왕자들의 이름을 따왔다고 보는 해석이다.

정면에서 바라본 청운교, 백운교와 자하문
 정면에서 바라본 청운교, 백운교와 자하문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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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륜성왕은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이상적인 성(聖)왕으로, 불법(佛法)의 바퀴(輪)를 굴려(轉) 천하를 통일한다. 삼국통일의 야망을 품었던 진흥왕은 아버지 법흥왕을 금륜, 자신을 은륜, 장남을 동륜, 차남을 철륜으로 믿으면서, 자신의 시대 또는 아들의 시대에 천하를 하나로 묶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말년에 승려가 된 진흥왕과 왕비

그뿐이 아니다. 진지왕에 이어 왕좌에 오른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白淨)이었다. 진평왕의 동생들은 백반(伯飯), 국반(國飯)이었다. 또 진평왕의 왕후는 마야(摩耶)부인이었다. 백정은 석가모니의 아버지이고, 백반과 국반은 석가모니의 작은아버지들이다. 그런가 하면 마야부인은 석가모니의 어머니다. 법흥왕, 진흥왕, 진평왕으로 이어지는 신라 왕실은 스스로를 석가모니의 가문과 같은 최고의 가계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들만이 왕이 될 수 있는 성골, 전륜'성'왕의 바로 그 성골(聖骨) 말이다.

하지만 신라 왕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석가모니에게는 아들 형제만 있었는데, 진평왕에게는 덕만과 승만, 그렇게 딸들만 태어났다. 이를 어쩔 것인가. 진평왕의 이름이 석가의 아버지 이름 '백정'이고 어머니의 이름이 석가모니의 어머니 이름 '마야'이면, 태어나는 첫째 아기는 '석가'여야 하는데 딸이 출생했으니!

그래도 딸들은 왕위에 올랐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다. 하지만 654년에 진덕여왕이 죽으면서 성골은 끝이 났다. 마침내 김춘추가 등극을 하니 비로소 진골의 시대가 열렸다.

왼쪽부터, 국보 20호인 다보탑, 국보 26호인 비로전 금동비로자나불 좌상, 21호인 석가탑.
 왼쪽부터, 국보 20호인 다보탑, 국보 26호인 비로전 금동비로자나불 좌상, 21호인 석가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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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에서 경주로
졸고 '경주여행' 연재는 17회부터 지금(20회)까지 동해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답사여행의 여정을 해설했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 사이에 <신라를 빛낸 인물관>이 있다. 이 건물은 <동리 목월 문학관>과 같은 마당을 쓰고 있다. 입장료는 한 번만 받는다. 문화유산은 아니지만 박물관을 방문하는 기분으로 들러볼 만하다.
 불국사와 석굴암 사이에 <신라를 빛낸 인물관>이 있다. 이 건물은 <동리 목월 문학관>과 같은 마당을 쓰고 있다. 입장료는 한 번만 받는다. 문화유산은 아니지만 박물관을 방문하는 기분으로 들러볼 만하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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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제상이 왜로 떠난 울산 정자 유포석보, (2) 탈해왕이 출현한 월성원자력 정문 앞 소공원의 유적지, (3) 문무왕 산골처인 대왕암과 (4) 이견대, (5) 감은사터에 남은 신라 최초의 쌍탑, (6) 숱한 문화재를 보유한 기림사, (7) 원효와 설총 부자가 기거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골굴사의 희귀한 석굴 마애불, (8) 쌍탑이 나란히 붙어 있고 법당이 한쪽에 비켜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항사터의 국보 석탑, 그리고 (9) 석굴암과 (10) 불국사를 길의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포항에서 경주로 들어오면서 살펴보는 답사여행 여정에 대한 해설입니다. 양동마을, 그리고 소금강산 일원의 문화유산과 유적이 주된 답사지가 될 것입니다.



태그:#불국사,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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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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