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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예성강 포구에 드나들던 당나라 상인 하두강(賀頭綱)은 바둑 고수였다. 그가 하루는 예쁜 부인을 발견했다. 검은 계획을 세운 하두강은 남편에게 접근하여 '내기 바둑을 두자'고 꼬드겼다.

지금은 이세돌, 이창호 등등 기라성 같은 기사(棋士)들이 중국 고수들을 많이 누르고 있지만, 본래 바둑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온 '머리 싸움'이다. 당연히, 바둑이 한반도로 들어온 초창기만 해도 우리의 바둑 수준은 중국과 겨룰 경지가 되지 못했다.

<삼국사기>에도 이와 관련되는 기록이 나온다. 738년(효성왕 2) 당 현종은 '신라인들이 바둑을 잘 둔다[國人善碁]'는 말을 듣고 성덕왕 문상차 서라벌로 가는 사신 일행에 양계응(楊季膺)을 부사로 붙여 보낸다. 양계응에게는 신라 바둑의 수준을 가늠해 보라는 부차적 임무가 주였다. 신라 고수들이 그와 겨뤘지만 모두들 한 수 아래였다[國高突皆出其下].

경남 김해의 초선대에는 금관가야 거등왕이 신선들과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수로왕은 199년에 타계한다. 거등왕은 그 뒤를 이은 2대 임금이다. 삼국사기는 바둑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때가 거등왕 재위 기간 혹은 그 이전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경남 김해의 초선대에는 금관가야 거등왕이 신선들과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수로왕은 199년에 타계한다. 거등왕은 그 뒤를 이은 2대 임금이다. 삼국사기는 바둑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때가 거등왕 재위 기간 혹은 그 이전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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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두강은 남편에게 져준다. 진 대가로 그는 많은 재물을 내준다. 그러고는 남편에게 '아름다운 부인'을 걸고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자신만만해진 남편은 그 내기에 응해 맞붙는다[突]. 하지만 이길 리가 없다[其下].

하두강은 고려 미인을 배에 싣고 서해로 들어가 당나라로 출발했다. 배가 떠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어리석은 남편은 스스로의 아둔함을 뉘우쳤다. 눈물을 흘리고 땅을 치며 탄식하다가 이윽고 노래를 지어 불렀다. 노래라면 우리나라 사람들 아닌가. 지금도 노래방이 전국에 10만 곳 이상 있다.

남편이 부른 노래는 <예성강> 전편.  그러나 현존 고려가요 <가시리>의 원형이 아닐까 추정되기도 하는 <예성강> 전편은 곡조도 가사도 전하지 않는다. <오관산><사리화><제위보> 같은 노래들은 이제현이 옮긴 한역시(漢譯詩)라도 전하지만, <예성강>은 그것도 없다.

하늘의 도움으로 무사히 돌아온 부인

연평도에서 지척으로 보이는 북한 황해도 땅이 수평선 위에 떠 있다. 새 한 마리도 북한 땅을 바라보고 있다. 아득한 고려 시대에는 무심한 새는, 연평도와 예성강 사이의 서해 바다를 지나가는 당나라 상선 위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예성강> 노래의 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것이다.
 연평도에서 지척으로 보이는 북한 황해도 땅이 수평선 위에 떠 있다. 새 한 마리도 북한 땅을 바라보고 있다. 아득한 고려 시대에는 무심한 새는, 연평도와 예성강 사이의 서해 바다를 지나가는 당나라 상선 위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예성강> 노래의 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것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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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로 가는 배에 태워진 부인은 옷매무새를 단단히 여미고 중국 상인을 경계했다. 그렇게 노심초사한 끝에, 여러 차례 자신을 범하려 드는 하두강의 마수를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바다 복판에서 빙빙 돌기만 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죽고 사는 것을 언제든지 가늠할 수 없는 이들이 바로 뱃사람들이다. 사고는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미미한 경상은 애초부터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람과 파도, 안개 등의 방향과 정도에 극도로 예민하다. 그런 그들이, 망망대해 복판에서 배가 멈춰선 마당에 우왕좌왕하지 않을 리가 없다.

점을 쳤다. 당시 사람들에게 점은 곧 '과학'이었다. 절부(節婦)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배가 파선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모두들 하두강에게 고려 부인을 예성강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요청했다. '과학의 힘'으로 부인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온 부인도 노래를 불렀다. <예성강> 속편. 물론 속편 또한 곡조도 가사도 전하지 않는다. 다만 짐작해보면 그녀는 노래를 통해 남편을 원망하여 이별을 통지했거나, 아니면 문제가 해소된 데 대한 안도와 기쁨을 읊조렸을 것이다.

어느 쪽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나는 생각해본다. 부인에게는 본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예쁜 것이 죄'였을 뿐이다. 그리고 '여자로 태어난 것이 죄'였다.

그렇다고 서해 복판까지 끌려가는 고초를 겪어야 할 이유는 없다. 만약 그녀가 바다에서 노래를 불렀다면 전자였을 터이다. 하지만 노래는 예성강으로 돌아온 뒤에 불렀다. 이미 남편은, 노래까지 지어서 부른 것으로 볼 때, 진심으로 뉘우친 상태였다. 그러므로 <예성강> 속편은 아마도 후자의 내용이었으리라. 안도와 평화, 용서와 화해의 기운으로 가득찬 노래.

백령도의 탱크 포신 아래로 북한 땅이 보인다. 심청이 뛰어들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는 이곳 백령도 바다를 <예성강>의 부인도 당나라 상선에 실려 건너가고 있었다.
 백령도의 탱크 포신 아래로 북한 땅이 보인다. 심청이 뛰어들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는 이곳 백령도 바다를 <예성강>의 부인도 당나라 상선에 실려 건너가고 있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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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자의 심정을 노래한 고려가요로는 <제위보>가 있다. 물론 <제위보>도 곡조와 가사가 전해지지 않고 배경설화만 남아 있는 노래다. 제목 '제위보'는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나라에서 돈이나 곡식을 꾸어주는 고려 때 관청 제위보(濟危寶)의 이름이다.

<예성강>의 여인과 달리 <제위보>의 여인은 죄를 지은 끝에 제위보에서 강제 노역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녀를 희롱하여 낯선 남자가 손목을 붙잡았다. <쌍화점>의 여인이라면 외간 남자와 교분이 나는 정도야 일상이겠지만,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영화 <쌍화점>의 포스터
 영화 <쌍화점>의 포스터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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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터 냇가엔 휘 늘어진 수양버들 浣紗溪上傍垂楊
백마 같은 임과 손잡고 속삭였네 執手論心白馬郞
석 달 장맛비가 줄줄 처마에서 떨어진들 縱有連簷三月雨
손끝에 머문 임의 향기는 씻지 못하리 指頭何忍洗餘香

<예성강>의 남편과 아내, <황조가>의 유리왕, <단심가>의 정몽주 등 신분 고하와 주제 경향을 불문하고 옛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엄청난 사건과 맞닥뜨렸을 때 직접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런데 이제현의 한역시는 배경설화를 정반대의 '막장 드라마 주제곡'으로 만들어버렸다. 여인은 성희롱에 저항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한역시는 엉뚱하게도 그녀를 외도를 못 잊는 <쌍화점>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제현은 왜 정숙한 아내를 왜곡했을까

이제현은 어째서 배경설화의 사실을 외면한 채 <제위보>를 이처럼 어처구니없게 왜곡하였을까. 이렇다면 차라리 한문으로 옮겨 적지 않은 게 나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예성강>의 여인처럼 이야기 속에 고이 남은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을 텐데.

어쩌면 이제현의 한역시는 당대 고려 남자들이 만들어낸 <제위보> 이본(異本)인지도 모른다. 남자 중심적 사고방식으로 여인의 사건을 왜곡, 노래의 내용을 마구 바꾸어서 불렀을 것으로 추정해보는 것이다. 사내들은 화류촌(花柳村)에서 킥킥대며 바꾼 노래를 불러댔고, 만약 이제현이 그것을 한역했다면? 결국 그렇게 역사는 권력과 세도의 우위에 점한 자들이 자신들의 입장과 처지에 맞게 기록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뿐이 아니다. <제위보>를 왜곡한 남자 중심의 저급한 사고에는 또 한 가지 사회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남녀 차별만이 아니다. 한역시에는 '남편'이 없다. 하류 계층 아내의 마음을 잃은 그 남편 역시 하류 계층 남자다. 따라서 이제현의 한역시는 남녀 차별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끼리의 차별도 보여주고 있다. 역사는 상류층 남자끼리의 희희낙락에서 왜곡된다는 이치를 <제위보> 이본은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착취에 시달리는 피지배 계층의 고통을 잘 보여주는 사진. 위의 사진은 부산근대역사관에 게시된 전시물의 일부분으로, 일제에 강제 징용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비참한 모습이다. 전제 왕권의 시대, 독재 정치의 시대를 사는 한 노동자 농민의 삶은 위의 사진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
 착취에 시달리는 피지배 계층의 고통을 잘 보여주는 사진. 위의 사진은 부산근대역사관에 게시된 전시물의 일부분으로, 일제에 강제 징용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비참한 모습이다. 전제 왕권의 시대, 독재 정치의 시대를 사는 한 노동자 농민의 삶은 위의 사진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
ⓒ 부산근대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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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지지 않는 고려가요 <사리화>도 저항성을 보여준다. 관리들과 토호 유지들이 끝없이 재물을 착취하는 것을 풍자하고 있다.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새들이 다 쪼아버리면 일년 농사가 도루묵이듯, 권세 있는 자들의 횡포는 멈출 줄을 모르고 가난한 백성들을 핍박한다.

형편없는 추수
 형편없는 추수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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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참새들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나 黃雀何方來去飛
일년 농사 어찌될지 걱정이로고 一年農事不曾知
홀아비 홀로 땅 갈고 가꾸었건만 翁獨自耕芸了
밭의 곡식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구나 耗盡田中禾忝爲

이제현이, 혹은 당초에 이 노래를 지은 농민들이 <사리화>라는 제목을 붙인 까닭은 무엇일까? <沙里花>는 싸리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본문은 싸리꽃과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이는데….

아니면, 모래[沙]가 많은 마을[里]의 땅에 핀 꽃처럼 농민들의 농사가 그렇게 시들어간다는 고도의 비유일까. 처음 노래를 지어 부른 농민들의 마을 이름이 모랫말[沙里]이었고…. 그런 유추 역시 쉽게 가늠을 할 수 없는 일이다.

소나무
 소나무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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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가난, 질병, 독재 등에 짓눌리면 사람은 사람답게 살 수 없게 된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게 살게 되는 '비인간화' 현상을 '인간 소외'라 한다. 그러므로 <사리화>와 같은 폭정의 지속은 민중의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신라 말기의 민란, 고려 무신정권 때의 농민 반란, 조선조의 동학혁명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현대판 민요' 양산은 박정희와 전두환 덕분(?)

현대에 들어서도 박정희 정권의 '한국적 민주주의'와 전두환 정권의 '정의 사회'는 독재에 저항하는 무고한 '백성'들을 무수히 고문하고 죽였다. 하지만 백성들의 현대판 '민요'에 못 견딘 독재자는 비극적으로 죽거나 감옥에 갇히고, 또 깊은 산속으로 현대판 '유배'를 떠났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리라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의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리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소나무
 소나무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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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의 7집 음반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에 수록된 노래 '상록수'다. 1978년 작곡가 김민기는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이 곡이 수록된 음반을 만들었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반체제 인사로 낙인이 찍힌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천명했다가는 판매 금지 조치를 당할 것을 염려해서였다.

그래도 음반은 시중에 유통되지 못했다. 독재정권의 검열이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과 같은 노래에 '백성'들이 의식화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노래는 햇살처럼 뜨겁게 퍼져나가지는 못하고 다만 안개처럼 뽀얗게 번져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주로 애창되었다.

'국민 애창곡'된 양희은의 <상록수>

그러다가 1998년 이후 <상록수>는 모든 백성들이 즐겨부르는, 즉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음반이 나온 지 21년 후, 국가 경제 위기 상황 속에서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데에 이만큼 멋진 노래는 없다고 판단한 김대중 정부가 '국정 홍보 음악'으로 채택하여 날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뜨린 덕분. 노래방에서도 인기 1위 노래가 되었다. 양희은은 정부가 주는 훈장까지 받았다.

현대사회는 '선거 혁명'의 시대다. 백성들의 현명한 투표는 정치, 경제, 문화… 등등 사람살이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 소외를 일으키는 정치 권력을 뒤엎을 수 있는 혁명적 권한이기 때문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이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소나무
 소나무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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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예성강곡, #상록수, #사리화, #제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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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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