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하순, 정부가 일본과의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GSOMIA), 이른바 '한일군사협정' 체결안을 국무회의에서 비밀리에 통과시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다. 특히 독도, 위안부 문제 등으로 한일 양국이 갈등을 빚고 있는 와중에 발생한 것이어서 야당 등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크게 반발했다.
파문이 확산되자 청와대에서 이 업무를 담당했던 김태효 대외전략기획관이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고, 외교부의 실무 국장도 문책성 인사를 당했다. 야당은 김황식 총리 해임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한 차례 회오리가 몰아친 후 '한일군사협정 파문'은 그렇게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 전의 일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혔다. 특히 최근의 독도 영유권 분쟁과 위안부 소녀상 '말뚝 테러' 등으로 갈등이 고조되면서 양국 간에 '군사협력'은 적어도 한동안은 불가능할 걸로 예상됐다.
다시 등장한 '일의대수'... 그 의미는?그런데 이런 예상을 보기 좋게 깨뜨린 사건이 최근 발생했다. 지난 6일 일본 해상자위대 간부 수십명이 방한해 한일 간 군사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양국 모두 독도 문제와는 별개로 군사교류는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9일 자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본 해상자위대간부학교 대원 약 40명이 6일부터 방위(군사) 교류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이들은 7일 대전 국립현충원을 찾아 천안함 희생자 묘역을 참배했다. 일행 가운데 다카하시 교육부장은 "한일의 안전보장은 대단히 중요하다"며 "개별적으로 어려움이 있어도 해야 할 교류는 진행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충원 방문과 관련해서는 "같이 나라를 지키는 자들끼리 자연스런 마음의 발로"라고 말했다. 일본은 중국군 감시를 위해 서해에 일본군함을 파견하기 위해 한국과의 군사교류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한편, 이들은 다음날(8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을 방문해 한국전쟁 참전자인 백선엽 장군을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백 장군은 한국전쟁 때 일본인이 기뢰 제거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백 장군은 강연 말미에 일본어로 "한국과 일본은 일의대수(一衣帶水)이다. 함께 동양평화를 위해 공헌하자"며 대원들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일본어에 능한 백 장군이 일본어로 강의를 한 것은 양해한다고 쳐도 '일의대수(一衣帶水)' 운운한 대목은 간과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이 한 마디로 백선엽의 '친일성'이 재확인된 셈이다.
'일의대수(一衣帶水)'란 중국 고사에서 비롯됐다. 이 말의 뜻은 '옷을 묶는 띠처럼 폭이 좁은 강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거리가 아주 가깝다'는 의미로 흔히 사용된다. 이 말은 수나라의 문제(文帝)가 진(陳) 나라를 치기 위해 양자강을 건너면서 "도탄에 빠진 진나라 백성들을 구하는데 일의대수(一衣帶水)가 있다고 해서 어찌 이를 마다하겠는가?"라고 한 데서 비롯됐다. 문제(文帝)는 양자강을 한낱 띠처럼 좁은 냇물에 비유한 것이다. 마치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한국과 일본이 그런 형국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포에서 일본 나리타까지 비행기로 불과 두 시간 정도 걸린다. 그러니 한일 양국을 두고 '일의대수(一衣帶水)'라고 할 만도 하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에게 좋지 않은 '추억'이 있다. 일제 침략자들이 조선통치 논리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일본은 왜 '일의대수'를 강조했을까일제 말기 총독부는 '내선일체'를 강요하면서 조선과 일본은 '동조동근(同祖同根)', 즉 뿌리가 같은 조상이라고 주장했다. 지리적으로도 가까운데다 조상까지 한 뿌리니 하나(一體)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총독부가 이런 논리를 개발하면 선전은 춘원 이광수 같은 친일파들이 앞장서서 도맡아 했다.
지리적 여건으로 한국과 일본은 운명적으로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관계에 있는 건 사실이다. 마치 한 동네 이웃집처럼 가깝다. 그러나 고대 이래 일본은 말로만 한국을 '인국(隣國)'으로 여겼을 뿐 늘 침략의 대상으로 대해 왔을 뿐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그랬고 일제강점 35년이 그랬다. 그리고 이같은 '말장난'은 해방 후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나 현재까지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따라서 한국에서 이 용어를 입에 담는 사람들은 소위 '친일파'로 불릴 만하다. 그런 사례 몇 가지를 보자.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첫 방문국으로 일본을 정했다. 그해 11월 11일 이케다 총리의 초청 형식으로 방일한 박정희는 나리타공항 도착성명 제1성으로 "우리 양국은 지리적으로도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 사회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극히 상통(相通)된 점이 많다"고 말문을 열었다.
막 권력을 잡은 박정희로서는 일본의 도움이 절실했는데 그때 박정희가 찾아낸 말이 일의대수(一衣帶水)였다. 이케다 총리와 회담을 마친 후 만찬사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이를 강조했다.
"한일 양국은 다같이 자유를 수호하고 평화를 희구하는 공통된 이념과 목표를 내세운 국가로서 비단 지리적으로 일의대수(一衣帶水)인 가장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을뿐만 아니라, 극동에 있어 자유진영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우리들은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박정희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 측 후원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양명학자 야스오카(安岡正篤)을 든다. 그는 히로히토가 '종전칙어'를 발표하기 전에 가필을 하는가 하면 후임 아키히토 일황의 연호 헤이세이(平成)를 지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천황주의자이자 일본주의자로 "역대 일본 총리의 지혜 주머니(知慧袋)" "쇼와의 교조(敎祖)"로 불렸다. 1964년 박태준이 박정희의 특사로 야스오카를 찾아갔을 때 그는 박태준에게 "한일 양국은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관계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서로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일까?
이후 한일 정치권에서 '일의대수(一衣帶水)'는 마치 약방의 감초처럼 애용됐다. 1973년 6월 도쿄에서 제2차 한일의원 간친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한국의 김종필 총리와 일본 다나카 총리 등 양국 총리가 모두 참석했다. 먼저 김 총리가 연설한 후 다나카 총리의 답사 연설이 이어졌다.
다나카는 연설에서 "한국과 일본은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관계에 있으며, 일본은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한국의 번영을 위해 적극적인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마치 녹음기라도 틀 듯 다나카도 '일의대수(一衣帶水)'를 강조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977년 2월 한일의원연맹은 그해 총회를 도쿄에서 개최했다. 총회라고 해야 양국 국회의원들이 만나 양국의 친선도모를 논의하는 것 말고는 별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해에는 총회 이벤트를 하나 준비했다. 총회를 마치고 양국 의원들이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한일친선국회의원 미술작품전시회'를 열기로 한 것이다.
당시 김종필 총리는 50호짜리 유화(봉산탈춤) 1점과 서예 1점을 출품했는데 서예작품 내용이 '一衣帶水'였다. 그래서 다시 '일의대수(一衣帶水)'가 화제가 됐는데 일본 측 인사들은 "한일 두 나라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관계"라는 말을 또다시 늘어놓았다.
백선엽의 발언, 우연이 아니다비단 일본 총리들만이 아니었다. 12.12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은 1984년 9월 6일 국빈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이날 저녁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만찬을 열어 전 대통령 일행을 환대했다.
만찬 주최자인 히로히토는 '만찬사'에서 "회고해 보면 귀국(貴國)과 우리나라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인국(隣國)으로, 그간에는 옛날부터 여러 분야에 있어서 밀접한 교류가 행해져 왔다"며 히로히토 역시 '일의대수(一衣帶水)'를 거론했다. 이어 히로히토는 만찬사에서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서 양국 간에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라며 사과 아닌 사과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본이 '일의대수(一衣帶水)'를 한국에 대해서만 사용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에 대해서도 이 말을 사용하며 친근을 표했다. 다나카 일본 총리는 1972년 9월 25일부터 30일까지 당시 주은래 중화인민공화국 총리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양국 총리는 회담 후 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은 일의대수(一衣帶水)로 떨어진 인국(隣國)이며 양국은 전통적이고 우호적인 오랜 역사를 지녀왔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일본은 이 말을 그야말로 전방위 외교 언사로 사용해온 셈이다.
결국 지난 8일 백선엽 장군이 일본 해상자위대원들에게 한 "한국과 일본은 '일의대수(一衣帶水)'이다"라고 한 말은 우연이 아니다. 백 장군은 평양사범학교 졸업 후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 군인이 되었다. 졸업 후 임관해서는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다가 만주국 육군 중위로 해방을 맞았다.
이런 전력으로 그는 '친일파'로 불리는데, 그의 '친일'의 '골수'가 이 한마디로 마침내 진면목을 드러냈다고 하겠다. 그에게 '친일'은 단순히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화(現在化)된 화석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