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삶이 고달프고 지칠 때, 나는 걷는다. 걸으면서 내 안의 나와 이야기를 한다. 세상이 서럽게 그리울 때도 걷는다. 차를 타면 주변 모습은 속도만큼 빠르게 흘러가지만, 걸으면서 보이는 세상은 곧 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세상이 된다.

낙동강 발원지인 태백시의 황지연못부터 경북 봉화군 승부역까지 40Km 코스는 손 덜 된 낙동강 원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걸으면서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한다.
▲ 내 인생의 동점승부 코스 낙동강 발원지인 태백시의 황지연못부터 경북 봉화군 승부역까지 40Km 코스는 손 덜 된 낙동강 원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걸으면서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한다.
ⓒ 이성수

관련사진보기


지난 3일, 작년과 올여름에 이어 강원도 태백시 낙동강 발원지 황지연못부터 경북 봉화군 석포면 승부리까지 약 40Km 구간을 걸었다. 이 길은 태백선 기차가 낙동강 옆 31번 국도와 910번 지방도를 따라가는 곳으로, 중간 지점에 지금은 폐쇄된 동점역이 있다. 마지막에는 하루 왕복 3번 기차가 다니는 승부역이 있다.

동점역(銅店驛)의 이름을 보면 과거의 모습이 묻어난다. 동점역 부근에는 퉁점 마을과 말바드리 마을 등 재미난 이름의 마을이 있다. 예전 금과 은을 캐는 곳을 금점(金店), 은점(銀店)이라 했는데, 퉁점은 구리의 우리말로 동점(銅店)을 말한다. 말바드리 마을은 구리 원석 실은 말(馬)을 받은 곳이란 의미다. 이 일대가 동광석으로 이름깨나 알려졌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말바드리 마을, 구리 원석 실은 말(馬)을 받은 곳이란 의미

동점역 부근이 과거 동광석으로 유명했음을 말해 주는 마을 이름이다.
▲ 동점역 부근 퉁점 마을, 말바드리 마을 안내판 동점역 부근이 과거 동광석으로 유명했음을 말해 주는 마을 이름이다.
ⓒ 이성수

관련사진보기


승부역(承富驛) 부근의 승부 마을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재물이 오르는 곳'이다. 지금은 퇴색했지만, 과거에는 이곳이 화려했던 곳이라 추측케 한다. 실제 승부역에는 '승부역은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오, 수송의 동맥이다'라는 바윗 글이 있다. 깊은 산으로 둘러싸여 보이는 하늘은 세평에 불과하지만, 영동지역의 물품을 실어 나르는 철도가 있어 예전의 화려함을 말해 준다.

낙동강 동점승부코스에는 손이 덜 탄 낙동강의 모습이 남아 있고, 물이 산을 뚫고 지나가는 구문소(求門沼)라는 절경이 있어 걷기에 심심하지 않다. 여름에는 물기를 잔뜩 머금은 태백과 봉화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시리도록 찬물이 내려온다. 가을에는 갈색으로 변하는 리기다 소나무와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토종 소나무가 있어 가을 색의 향연을 만들어준다.

'낙동강 동점승부코스'... 그 곳에서 인생을 읽는다

승부역 부근의 과거 영화를 말해주는 글귀다.
▲ 승부역 바윗글 승부역 부근의 과거 영화를 말해주는 글귀다.
ⓒ 이성수

관련사진보기


내가 이 코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삶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행가 가사처럼 누군가에게 '인생은 미완성'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옷 한 벌 건졌기 때문에 '수지맞는 장사'다. 내게 인생은 '동점승부'다. 하나를 더하고, 하나를 빼면 '0'이 되는 것처럼.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어 균형을 맞춘다. 살아 있는 것이 아름다운 것은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죄가 있으면 벌이 있기 마련이다. 단지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언젠가는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세상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구간을 '낙동강 동점승부코스'라 부른다.

'동점승부코스'에서 나는 인생을 읽는다. 태백시의 31번 국도는 왕복 4차선이지만, 동점역 부근부터는 왕복 2차선으로 줄어든다. 승부역 부근에서는 아예 외길이다. 잘 나갈 때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외길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동점역과 승부역 사이에는 석포역이 있는데, 아연을 생산하는 영풍석포제련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지날 때면 초입부터 악취가 나는데, 연한 두통을 일을 킬 정도다. 작년에 석포역 부근으로 귀촌했다는 한 아주머니는 냄새 때문에 하루 종일 향을 피우고 있을 정도다. 이곳이 동정승부 구간의 가장 큰 난코스다.

석포제련소를 멀리하면 한 시간에 차량 한 대 정도 지날 정도로 한적하다. 낙동강 물살도 더 크고 넓어져, 여기저기서 시원한 노래가 퍼진다.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퇴색한 철도는 주변과 동화되어 풍경이 된다. 삶이란 것이 동점승부 코스와 같지 않을까 싶다.

낙동강을 따라 달리는 기차는 토종 소나무와 리기나 소나무의 색깔을 배경으로 하나가 된다.
▲ 소나무와 기차 낙동강을 따라 달리는 기차는 토종 소나무와 리기나 소나무의 색깔을 배경으로 하나가 된다.
ⓒ 이성수

관련사진보기


나는 걷는 것을 좋아했다. 걷고 있으면, 어제 일부터 유년의 기억까지 새롭게 떠오른다. 제 작년에는 이 땅에서 마흔 해를 버텨 온 기념으로 한강, 금강, 영산강, 낙동강을 따라 '걸어서 마흔 여행'을 했다. 환경운동연합에서 처음 활동할 1999년에는 백두대간 1600여 킬로를 종주했다. 대학 때는 버스를 두고 한 시간 거리를 걸어 다녔다. 또, 좋아하던 여자가 내 친한 친구와 사귀는 걸 알았을 때는 수원에서 안산까지 네 시간을 넘게 걸었던 적도 있었다.

내가 처음 한 나절 이상 걸었을 때는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새벽 리어카 배달일을 끝낸 아버지는 약주를 하고 작은형과 나를 택시에 태워 경기도 의정부시 망월사 계곡으로 갔다. 한여름 계곡은 만원인데다, 술 취한 아버지가 부끄러웠던 나는 비틀거리는 아버지를 멀리하며 따라갔다.

그러다 아버지는 갑자기 위에서 내려오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작은형과 나는 한동안 '멍'한 상태였다. 돈 한 푼 없었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여덟 시간 넘게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동네 어귀에는 어머니와 식구들이 나와 있었다. 어머니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버지에게 역정을 내셨다. 아직 술이 덜 깬 아버지는 미안한 눈빛을 나와 작은형에게 보냈다.

술 취한 아버지, 작은형과 나를 두고 택시 타고 사라져

차를 타면 주변 풍경은 그냥 스쳐지나 가지만, 걸으면 풍경은 내가 된다.
▲ 인생은 동점승부 차를 타면 주변 풍경은 그냥 스쳐지나 가지만, 걸으면 풍경은 내가 된다.
ⓒ 이성수

관련사진보기


이 기억이 지난여름 낙동강 동점승부코스를 걸으면서 들었다. 며칠 걸을 생각으로 텐트까지 짊어졌다. 때마침 내리는 강한 빗줄기를 뚫고 걷다 보니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 통증이 강했다. 아니나 다를까 큼지막한 물집이 주렁주렁하게 났다. 여행의 통증은 어찌 보면 내 삶의 보약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아버지의 '삶의 보약'은 두꺼비가 새겨진 소주였다. 별명도 두꺼비. 네 남매 키우느라 흔한 여행도 한 번 못 가셨다. 술을 드시고, 고된 노동과 삶의 무게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이 당신에게는 여행이었다. 동점승부코스를 걷는 동안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워진다. 억수로 쏟아지는 빗물이 눈에 들어가서인지, 눈에서도 비가 내렸다.

올겨울, 눈 내리는 '낙동강 동점승부코스'를 다시 가고 싶다.


태그:#도보여행, #낙동강, #동점승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강/유/미' 세상을 꿈꿉니다. 강(江)은 흘러야(流) 아름답기(美) 때문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