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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마다 꽉 찬 런던의 역사적인 건축물들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보이고 있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시원한 공기를 느끼며 기분 좋게 걸어갔다. 레스터 스퀘어(Leicester Square)에서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을 걸어서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 멀리에서도 하늘 높이 솟은 넬슨기념탑(Nelson's Column)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레스터 스퀘어에서 트라팔가 광장으로 오다보면 자연스럽게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를 만나게 된다. 세계 3대 미술관 중의 하나인 내셔널 갤러리는 트라팔가 광장의 북쪽에서 광장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다. 내셔널 갤러리의 한 중앙에 자리한 정문 입구로도 들어갈 수 있지만 우리는 정문 왼쪽에 있는 세인즈버리관(sainsbury wing)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갤러리의 작품들이 시대 순으로 되어 있고 세인즈버리관에서부터 봐야 미술사 변천의 시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 3대 미술관이다.
▲ 내셔널 갤러리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 3대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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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갤러리의 훌륭한 명화들을 감상하는 데 필요한 입장료는 없다. 전시된 그림들을 모두 국가 소유로 가지고 있는 영국은 문화강국의 자부심으로 입장료를 무료로 하고 있다. 미술관의 구석구석을 주의 깊게 다 보려면 며칠이 걸리는 곳이기에 우리는 눈에 익은 작품들만 집중적으로 둘러보기로 했다. 이곳은 사진 찍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나의 두 눈에 그림들을 담기로 했다.

베이지 색이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회색 빛 내셔널 갤러리 건물은 우아하면서도 위엄이 있다. 미술관 입구의 코린트 양식 기둥은 그리스 신전같이 세밀하며 대리석 바닥도 더 이상 화려할 수 없다. 1층 전시장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의 천장과 창 쪽의 철골 구조물은 1800년대에 유행하던 건축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다. 미술관은 각 전시실마다 번호가 표기되어 있어서 찾아가기가 아주 쉽다. 전시실이 너무나 길게 이어져 있어서 나는 한국어로 된 미술관 평면도 지도를 주의 깊게 보면서 걸음을 옮겼다.

화려한 미술관 내부는 미술관 평면 지도를 보며 찾아다닌다.
▲ 내셔널 갤러리 내부 화려한 미술관 내부는 미술관 평면 지도를 보며 찾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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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갤러리는 유럽 각국의 13세기 중반~20세기 초반의 주요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금박으로 치장된 중세의 종교화는 교회와 개인의 신앙심을 표현하고 있고, 르네상스기의 회화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을 본보기로 삼고 있다. 근대 인상주의파의 강렬한 태양 빛 그림들은 눈이 부실 정도다. 나는 그림의 시대적 배경을 잘 모르고 그림을 보는 눈도 짧지만 말로만 듣던 명화들을 큰 사이즈로 접하면서 내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

책 속에서 사진으로만 접했던 명화들을 실제 눈 앞에서 보는 감흥은 정말 확연하게 다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가 그린 <비너스와 마르스(Venus and Mars)>를 나는 이곳에서 만났다. 전쟁의 신 마르스가 미의 여신 앞에 알몸으로 곯아떨어져 있는 모습이 마치 섬세한 조각을 보듯이 입체적이다. 신비한 색감이 오묘한 그리스 시대로 안내하는 듯하다. 이름이 알려진 명화는 문외한이 봐도 주변의 다른 그림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해바라기>도 내셔널 갤러리에 있다. 관람 순서대로 미술관을 유람하다 보니 맨 마지막 전시실에서 <해바라기>를 만났다. 이 해바라기는 마치 태양 여러 개가 떠 있는 듯한 격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물감을 가득 찍어 바른 듯한 역동성을 보면 가슴 속에서 강렬한 열정이 살아나는 듯 하다. 나는 너무나 대단한 규모의 미술관 안에서 명품들을 만나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명품을 대하는 가슴 뿌듯한 행복감이 가슴 속에서 밀려 들어왔다.

계단에서 햇살을 쬐며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다.
▲ 갤러리 앞 계단 계단에서 햇살을 쬐며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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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갤러리 앞 트라팔가 광장에는 따뜻한 햇살이 내려쪼이고 있다. 갤러리에서 광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햇살을 만끽하고 있다. 넓은 광장이지만 광장은 지구촌을 망라하는 듯한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수많은 노선의 버스들이 트라팔가 광장을 감싸고 돈다.
▲ 런던 버스 수많은 노선의 버스들이 트라팔가 광장을 감싸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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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팔가 광장 주변에는 수많은 노선의 빨간색 2층 버스들이 광장을 감싸돌며 움직이고 있었다. 1840년대에 왕실 소유의 외양간과 마구간이 있던 자리의 건물들을 모두 허물고 들어선 트라팔가 광장은 이제 시위와 집회, 회사들의 각종 이벤트, 거리공연이 벌어지는 런던의 명소가 되어 있다.

트라팔가 광장에서는 다양한 거리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 거리 공연 트라팔가 광장에서는 다양한 거리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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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는 꽃잎 모양의 예쁜 분수대가 좌우로 2개 있다.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가 분수대 안에 잠긴 물은 연한 하늘색깔인데 트라팔가 광장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분수 앞에는 분수의 물소리를 들으며 앉아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다. 광장에는 사람이 넘쳐나며 북적거리는데 분수대 주변은 시간이 멈춘 듯 적막이 흐른다. 분수대 앞에 앉아서 보니 광장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대로변의 건축물들이 하나같이 아름답다.

번잡한 광장 내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 광장의 분수 번잡한 광장 내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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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제독의 기념탑 아래 기단에는 그 이름 유명한 4마리의 사자상이 늠름한 자세로 웅크리고 앉아 있다. 사자상은 사진으로 느꼈던 것보다 엄청나게 크고 듬직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장상 위에 앉아서 사진을 찍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많은 어린이들이 사자 위에 올라가려고 대기 중이어서 포기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올라탄 사자의 등과 꼬리 부분은 반질반질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사자는 네 마리의 화려하고 훌륭한 사자상이 되어 넬슨 제독을 호위하듯이 앉아 있다.

시위와 집회, 이벤트의 공간으로 유명하다.
▲ 트라팔가 광장 시위와 집회, 이벤트의 공간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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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청동 사자상은 놀랍게도 트라팔가에서 노획한 프랑스 함대의 대포를 녹여서 만든 것이다. 당시 영국에 청동이 부족했을 리도 없는데 프랑스 대포로 사자상을 만든 것은 프랑스 사람들을 조롱하고 자기들의 승전을 널리 알리려는 데에 있다. 영국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 청동사자상 위에 올라가서 기념촬영을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이라면 이 치욕의 사자상에 올라가 기념촬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사자는 프랑스군 대포를 녹여 만들었다.
▲ 넬슨제독탑 사자상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사자는 프랑스군 대포를 녹여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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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무리 봐도 사자의 앉은 자세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앞다리는 편하게 앞으로 뻗어서 쉬고 있지만 뒷다리는 잔뜩 웅크리고 앉아서 긴장감이 꿈틀거린다. 사자상의 앞다리와 뒷다리 모습은 사자의 몸 구조상 한꺼번에 만들어지기는 불가능한 모습을 하고 있다. 동물의 생태에 지식이 부족한 작가가 만든 청동상이 트라팔가 광장을 상징하고 있으니 영국인들로서도 답답한 노릇일 것이다.

넬슨 기념탑의 탑신 하단에는 넬슨 제독이 해전에서 거둔 승리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이 청동 부조에는 나일강 입구의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한 장면, 발트함대를 구성하여 코펜하겐 전투에서 덴마크 해군을 물리친 장면, 트라팔가 해협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물리친 전투기록이 묘사되어 있다. 이 청동 부조상도 프랑스와의 트라팔가 해전에서 노획한 대포를 녹여서 만든 것이어서 넬슨 기념탑의 스토리텔링에 이야기를 더하고 있다.

넬슨 제독이 승전을 거둔 역사적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 청동부조상 넬슨 제독이 승전을 거둔 역사적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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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기념탑이 자리한 트라팔가 광장은 1805년에 스페인 남쪽 트라팔가에서 벌어진 해전을 기념하는 광장이다. 당시 영국 해군을 이끌던 넬슨 제독은 유럽 여러 나라를 석권한 나폴레옹이 지휘하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격파하고 영국을 지켜 냈는데 영국 역사상 이 기념비적인 사실을 길이 알리기 위해 이 광장을 만든 것이다. 많은 영국인들이 이 전투를 통해 영국이 대영제국의 기반을 만들었다고 믿기에 넬슨은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명장이자 영웅이 되었고, 그래서 넬슨은 이 트라팔가 광장의 한 중앙에 탑의 모습으로 남아 런던 시내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5m 높이의 넬슨 제독 동상은 높이가 52m에 달하는 둥근 돌기둥 꼭대기 위에 서서 런던의 국회의사당 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넬슨 제독 기념탑의 높이가 57m인 이유는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제독이 지휘하던 대장선의 선체 길이가 57m였기 때문이다. 넬슨 제독의 동상이 높은 곳에 세워진 이유는 죽어서도 프랑스를 감시할 수 있는 높은 곳에 올려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오른쪽 팔과 오른쪽 눈이 없는 넬슨 제독이 하늘 높이 서 있다.
▲ 넬슨제독상 오른쪽 팔과 오른쪽 눈이 없는 넬슨 제독이 하늘 높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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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m 높이의 기둥 위 동상은 트라팔가 해전의 의미를 드높이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넬슨 제독 동상의 높이는 육안으로 동상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 높고, 넬슨 제독이 너무나 높은 곳에서 광장의 사람들을 외롭게 내려다보고 있다.

넬슨 동상을 아래에서 유심히 살펴보면 오른쪽 팔이 유난히 가늘고 칼도 왼손으로 잡고 있다. 그의 오른쪽 눈도 감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넬슨이 지중해 북부의 코르시카(Corsica) 섬 상륙작전에서 오른쪽 눈을 잃고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의 카나리아 섬(Canary Islands) 전투에서 부상으로 오른팔을 잃은 것을 동상에 표현한 것이다. 넬슨 제독의 감긴 눈과 없어진 오른 팔은 트라팔가 해전의 의미를 극적으로 되새김하게 만든다.

트라팔가 해전 당시 영국함대는 27척의 전투함으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33척을 물리친다. 넬슨 제독의 전략으로 연합함대는 전투함 21척이 나포되고 1척이 침몰하였지만 영국 함대는 전투함을 1척도 잃지 않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은가? 왜선 133척을 맞아 13척의 병선으로 전투를 벌인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이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는가?

넬슨 제독은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군이 쏜 총탄에 맞고 사망했다. 그는 당시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전사한다. 2백여 전에 앞서간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의 극적인 최후와 너무나도 닮은 모습이다. 넬슨은 47세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조국에 남긴 세계 최강 해군은 20세기 중반의 역사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탑 위에 서 있는 그가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런던을 여행하며 그 후에도 여러 번 트라팔가 광장을 지나쳤다. 2층 버스의 좌석에 앉아서 내셔널 갤러리의 멋스러움과 넬슨 제독의 동상, 광장 특유의 낭만을 구경하기도 했다. 트라팔가 광장은 다시 봐도 질리지 않고 다시 찾고 싶은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트라팔가 광장은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나는 언젠가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300편이 있습니다.



태그:#영국여행, #런던, #내셔널 갤러리, #트라팔가 광장, #넬슨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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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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