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술자리가 잦다. 무슨 모임에 그렇게 많이 가입했는지 만날 술을 퍼 마시게 된다. 어떤 날은 저녁을 세 번 먹는다. 지난 12월 27일은 초등학교 동창회가 있는 날이었다. 6시에 약속해 놓았는데, 또 전화가 왔다. 느닷없이 "오늘 올 거지?"라는 말에 "뭔 뚱딴지 같은 소리냐?"라고 했더니, 지난주에 약속한 걸 잊었냐고 따진다.
"잊기는 인마, 그냥 해본 소리지."머리 나쁜 티 내기 싫어서 기억하고 있는 척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7시까지 가겠다고 했다. 또 다른 그룹의 친구 녀석들은 저녁은 각자 해결하고 9시에 소줏집에서 만나잔다. 다수결로 자기들끼리 정했단다. 그래서 그날은 저녁을 세 번 먹었다.
내가 집에 복귀하지 않으면 아내는 잠을 자지 않는다. 남편이 외간 여자랑 같이 술을 마시는지 의심해서일까 아니면 술 취한 그 잘난 남편 밥 차려주려고일까. 아무래도 좋다. 아내 성의가 고마워 집에 오면 또 밥을 먹는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저녁을 네 번이나 먹는 날도 있다. 이러다 돼지 되게 생겼다. 소주는 칼로리가 높다는데, 집에 와서 또 밥 먹고.
스스로 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늦가을 곰은 온갖 걸 다 주워 먹고 나무 위에 올라간다. 뛰어내려 봐서 아프면 또 먹고 아프지 않으면 겨울잠을 시작한다나. 내가 꼭 그 꼴이다. 안 취하면 또 마시고, 그래도 안 취하면 2차도 가고, 취했다 싶으면 집에 들어와 잔다. 곰과 뭐가 다른가.
술에 떡이 된 다음 날 아침, 소주 생각만 해도 토가 나올 것 같다. 그런데 오후가 지나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알코올 향이 슬슬 그리워진다. 중독으로 가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내 친구가 빨리 와서 당신 주워가라고 전화했더라"
그렇게 많이 마시면 습관처럼 읍내를 배회한다. 집에 들어 가봐야 아내가 짜증 낼 건 뻔하다. 그게 무서워 배회한다. '술 깨면 가자' 라고 생각하거나 '마눌탱이 잘 때 몰래 기어들어가자'라고 생각하며 읍내를 비척거리며 배회했나보다. 갑자기 많이 보던 번호의 차가 내 앞에 선다. 내 차다. 아내가 날 데리러 온 거다.
"
어!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지?"
"인간아! 집으로 신고가 들어왔더라."
"어떤 신고?"
"내 친구가 당신 읍내에서 비척거리며 돌아다닌다고 빨리 와서 주워가라고 전화했더라."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자정이 넘어도 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집사람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참다 참다 못 견딘 그녀는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난 남편을 분실했습니다. 보신 분들 아무나 주워가세요. 주워가봐야 별로 쓸데도 없겠지만.졸지에 분실물이 됐다. 그래도 너무했다. 그렇게 쓸모없진 않은데. "내가 마시고 싶어서 마시냐? 그놈의 인기 때문에 그렇지"라고 말하면 아내는 "인기 두 번만 있다간 장례식장에서 만나겠다"라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아내가 날 사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날이면 원수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지난 달 어느 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아파트 계단을 올라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하기에 "누구긴 누구야 당신 남편이지" 했다. 문이 열리더니 "도둑이야!" 하면서 문을 쾅 닫는다.
집사람이 왜 저러지? 술이 확 깬다. 눈을 비비고 자세히 보니 아파트 통로를 잘못 들어온 거다. 부랴부랴 집을 찾아가 집사람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집사람이 한밤중에 용서를 빌어야 했던 촌극도 다 그놈의 술 때문이다.
"오늘은 그냥 자고 낼 나하고 이야기하자."서슬퍼런 아내의 경고다. 술에 덜 깬 상태에서 잔머리를 굴렸다. "아침 일찍 집사람이 일어나기 전에 출근을 하자"고 생각했는데, 그만 늦잠을 자버렸다.
"당신 때문에 동네 창피해서 못살겠다. 딴 사람들은 술을 마셔도 멀쩡하기만 하드만, 당신은 도대체 그게 무슨 추태냐? 오늘 이후로 술 마시고 들어오면 각오해."큰일 났다. 오늘 손님접대를 하기로 했는데, 또 술이 깰 때까지 시내를 배회해야 하나, 그러면 누군가 집으로 신고를 할 테고, 아내는 또 나를 주우러 오겠지. 면전에서 하기 힘든 말은 사무실에서 전화로 하면 편하다는 걸 안다.
"오늘 중요한 손님이 있어서 딱 오늘 하루만 마시면 안 될까?""내가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이 아니잖아. 건강을 생각해야지. 술 마시기 전에 우유하고 계란을 미리 먹고 마셔."하마터면 감격해서 '충성'이라고 말할 뻔했다. 역시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집사람밖에 없다.
술 취해서 순찰차 신세까지... 이젠 술버릇 고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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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 난 이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 무섭다. 잔소리의 전조이기 때문이다. |
ⓒ 신광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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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전날 밤에 내가 도대체 어떻게 집에 왔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자리는 간부들과의 술자리였다. 전화로 직원에게 물었다.
"혹시 말이지, 내가 어제 실수한 거 없었니?"
"없다고 할 줄 알았어요? 지금 당장 신발 좀 확인해주세요."
"신발은 왜?"
"어제 부군수님 신발이 바뀌어서 찾느라고 난리가 났었는데, 혹시 바꿔 신고 가신 거 아닌가 해서요."전날 술 마시고 실수를 하지 않았는지 묻는 질문에 직원은 신발부터 확인해 보란다. 현관에 나가 신발을 보니 내 것이 아니다. 범인은 나였구나. 그런데 맞지도 않는 그 커다란 신발을 왜 신고 왔을까! 상황이 그 정도였다면 실수를 안 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부군수님한테 바로 사과를 했다.
"제가 어제 더 마시면 실수를 할 것 같아서 급하게 나가느라고 신발을 바꾸어 신고 갔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허허 그럴 수도 있지요 뭐. 괜찮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괜찮다. 지난 10월, 춘천에서 모임이 있던 날, 비가 내리는 저녁이었다.
"아저씨, 어디 사세요?"그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경찰관 두 명이 내 앞에 서 있다. "어떻게 된 거죠?"라고 묻자 그 경찰관은 "그걸 왜 우리한테 묻느냐"는 거다.
"실은 아파트 주민들이 신고를 했어요. 아파트 입구에 술 취해서 자는 사람 좀 어떻게 해 달라고."어떻게 된 건가. 모임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 2차를 간다고 하기에 잠시 쉬었다 가겠다고 말하고 비를 피해 아파트 현관 앞에 잠시 앉았다. 그런데 그만 잠이 들었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이 혐오스럽다고(!) 치워달라고 신고를 한 것이다.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경찰 순찰차를 타고 귀가했다.
이 사건은 집사람이 모른다. 알면 "화천에서도 모자라 춘천까지 나가 추태를 보이냐"고 퍼부어댈 게 틀림없다. 술만 취하면 실수하는 습관, 이번 연말을 계기로 반드시 고쳐야 할 과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