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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시댁에서 놓사 지은 팥입니다
▲ 팥이 굵고 티 하나 없습니다 친구 시댁에서 놓사 지은 팥입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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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서 팥이 왔다고. 지금 얼른 성당으로 와"
"기왕이면 우리 집까지 가져다주지 왜 성당에서 만나 주려고 해?"
"성당에서 연말정산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 받아야 해. 우리 며느리가 받아오래. 그러니까 성당에서 만나자고."

나는 얼른 전화를 끊고 서둘렀습니다. 나도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 받아야 합니다. 모자가 달린 두꺼운 코트를 입고, 목도리도 둘렀습니다.

아이들이 미끄럼을 지치면서 지나가서 미끄러운 길이 되었습니다
▲ 미끄럽습니다 아이들이 미끄럼을 지치면서 지나가서 미끄러운 길이 되었습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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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에서 내려다 본 풍경입니다
▲ 눈이 많이 왔습니다 발코니에서 내려다 본 풍경입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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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지만, 눈이 많이 와서 길이 아주 미끄럽습니다. 바람도 강하게 붑니다. 일부러 운동화를 신었는데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저만치서 초등학교 3~4학년 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신나게 미끄럼을 지치며 바람처럼 마주 오고 있습니다. 놀라서 재빨리 길섶으로 비켜서자마자 아이가 휙, 내 옆을 지나갔습니다.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길 한 가운데가 반들거리면서 윤이 납니다.

성당 로비에 들어서자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던 친구가 손을 들어 보입니다. 내가 마주 앉자마자 팥이 든 비닐봉지를 내게로 밀었습니다. 비닐봉지가 투명해서 붉은 팥알들이 그대로 보입니다. 팥알이 굵고 티 하나가 없어 보입니다. 반 말 입니다. 반 말에 오만 원.

"팥이 아주 좋네. 상품 중에 상품이네. 고마워. 근데 서리태 찰수수도 살 수 있을까? "
"이젠 다 팔구 없대. 이참에 다 장에 내다 팔았대. 손자 대학등록금 보태 줄려구 먹을 것도 안 남기구 싹 내다 팔았대. 아무튼 우리 형님은 맏손자를 얼마나 애지중지 하나 몰라. 자신은 농사 때문에 허리 아프다 무릎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 말야."

친구와 나는 사무실에 들어가서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받았습니다. 친구는 이내 돌아가고 나는 탁자에 둔 팥 봉지를 집어 듭니다. 묵직합니다. 미끄러운 길이 생각났습니다. 팥 봉지를 안고 가다가 또다시 미끄럼을 지치는 아이들을 만날까봐 걱정이 됩니다. 나는 팥 봉지를 다시 내려놓고는 매듭 끝자락으로 매듭을 한 번 더 지어 줍니다.

"팥이 참 좋네. 팥죽 쑤면 맛있겠는데."

옆 탁자에서 커피를 마시던 어르신이 말을 건네 왔습니다. 돌아보니 아는 어르신입니다.

문이 열리면서 작은 식빵 봉지를 든 여자 아이가 찬바람을 몰고 들어왔습니다. 아까 미끄럼을 신나게 지치면서 지나가던 바로 그 아이입니다. 또 미끄럼을 지치면서 왔는지 아이의 볼이 사과처럼 빨갛습니다. 어르신이 아이가 내민 식빵 봉지를 받아들면서 말했습니다.

"빨리 갔다 왔구나."
"미끄럼 지치면서 갔다 왔거든요. 얼마나 빠르고 재밌는데."

"저런저런, 미끄럼을 지치면 길이 더 미끄러워지잖아. 내가 어떻게 다니라구! 내가 미끄러져서 꽈당 하고 다치면 좋겠냐, 엉? 다신 그러지 말어!"

아이는 풀이 죽어 "알았어요"라더니 입술을 삐죽 내밉니다. 귀엽습니다. 화가 난 할머니의 눈치를 보다가 할머니가 커피를 마시고 난 종이컵을 얼른 집어다가 휴지통에 넣는 것을 보니 잘못을 깨달은 모양입니다.

아이가 힐끗 나를 보았습니다. 아이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긴 미끄럼을 지치면서 바람처럼 지나갔으니 내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웃어 줍니다.

"이야, 팥이네. 팥소 만들어서 식빵에 발라먹으면 좋겠다. 할머니, 우리도 팥 사가지고 가요. 엄마한테 팥소 만들어 달라고 하게요."
"길 미끄럽고 바람 부는데 수퍼에 가자고? 오늘은 있는대로 딸기쨈 발라 먹자."

할머니는 아직도 화가 덜 풀렸나봅니다. 아이는 또 입술을 쑥 내밉니다.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이가 또 팥을 돌아봅니다. 순간 아이의 까만 눈에서 빛이 튀었습니다. 식빵에 달콤한 팥 팥소를 발라먹는 상상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맛있는 것을 먹을 때면 눈이 보석처럼 반짝입니다.

"어르신, 잠시만요."

어르신이 돌아봅니다. 나는 얼른 사무실에 가서 작은 비닐봉지 하나를 얻어가지고 나왔습니다. 비닐봉지에 팥을 조금 담아서 아이의 손에 들려주자 아이의 얼굴이 반짝, 꽃처럼 피어났습니다. 어르신은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아이의 꽃 같은 얼굴을 보더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고맙습니다라고 해야지"라고 말합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은 아이의 반듯한 그 모습이 사랑스럽고도 대견했던지 활짝 웃었습니다. 나도 웃었습니다. 속으로는 할머니의 말씀대로 아이가 다시는 길에서 미끄럼을 지치면서 다니지 않기를 바라면서.


태그:#미끄러운 길, #함박눈,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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