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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토막을 지게위에 올립니다. 무릎 꿇고 지게를 짊어집니다. 두 어깨에 삶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 삶의 무게 나무토막을 지게위에 올립니다. 무릎 꿇고 지게를 짊어집니다. 두 어깨에 삶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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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조용한 토요일 아침입니다. 따듯한 잠자리에서 게으름 피우고 있는데 느닷없이 스마트폰이 발작을 일으킵니다. 평소 아름다운 벨소리를 들려주던 물건이 그날 따라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더군요. 도대체 스마트 폰이 왜 저러는지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지난밤 스마트 폰 알람을 진동 모드로 바꿔놓았습니다. 오랜만에 조용하고 느긋한 아침을 맞으려고요. 웬만하면 스마트 폰의 경고를 무시하려 했습니다. 잠시 저러다 멈출 거로 생각했죠. 하지만 눈치 없는 물건은 쉼 없이 전기 오븐 위에서 춤을 추더군요. 시끄럽게 철판을 두드리면서 말입니다.

야속하게 날뛰는 녀석의 몸짓에 조용한 아침은 저 멀리 달아났습니다. 등 짝에 달라붙은 온기를 가까스로 털고 일어나 스마트 폰에 귀를 댔습니다. 광양 사는 처남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조용한 아침, 처남이 형식적인 수인사를 건넨 후 치명적인 한마디를 던지더군요.

"매형, 어제 비가 많이 와서 땅파기 좋아요. 매실 묘목 사 놓았으니 빨리 광양으로 넘어오세요. 매제는 어제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처남이 저를 택한 이유... 세 아들 때문입니다

처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조그마한 밭이 있습니다. 몇 주 전부터 처남과 함께 감나무를 자른 곳입니다.
▲ 밭 처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조그마한 밭이 있습니다. 몇 주 전부터 처남과 함께 감나무를 자른 곳입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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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 들으니 갑자기 처남이 마귀할멈으로 변하더군요. 황급히 옷을 챙겨 입고 광양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운전대를 잡고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몇 주 전부터 토요일마다 처남과 벌이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처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조그마한 밭이 있는데 그곳에서 농사일을 시작했거든요.

감나무와 매실나무가 뒤엉킨 밭인데 감나무를 베고 몽땅 매실나무를 심기로 했습니다. 저와 처남은 계획을 세우고 어른 허벅지만 한 감나무를 스무 그루 넘게 잘랐습니다. 또, 밭 곳곳에 스러진 나무를 쌓아 놓았죠. 지난주 차곡차곡 쌓인 나무를 보며 생각했죠.

이제 자른 나무만 집으로 옮기면 고된 일도 끝이라고요. 마음대로 농사일을 마무리하던 제가 마지막(?) 남은 일을 까맣게 잊었던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잊고 싶었습니다. 반면, 처남은 계획한 일이 많은데 튼실한 일꾼이 딴청을 피울까 봐 고민이 된 겁니다.

매실차는 막내가 몽땅 마십니다. 매실장아찌는 큰애와 둘째가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먹습니다.
▲ 매실차와 장아찌 매실차는 막내가 몽땅 마십니다. 매실장아찌는 큰애와 둘째가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먹습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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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낸 나무도 옮겨야 하고 매실나무도 심어야 하는데 말이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지난 금요일 많은 비가 내렸기 때문입니다. 땅파기엔 더없이 좋은 날이 된 거죠. 눈치 빠른 처남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있겠어요. 재빨리 계획을 바꿨겠죠. 매실나무를 심기로 말입니다.

때문에 아침 댓바람부터 제게 전화를 넣은 겁니다. 덕분에 저는 고요한 아침을 멀리 떠나보내고 광양으로 달려갔습니다. 처가에 도착하니 날씨는 봄인 듯 포근하더군요. 궁금한 점은 처남이 농사일 함께할 사람으로 왜 저를 택한 걸까요? 곰곰이 생각했더니 이유가 단박에 튀어나왔습니다.

세 아들 때문입니다. 녀석들 먹성이 장난 아니거든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양이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특히, 처가에서 가져온 매실차와 장아찌는 오래 두고 먹어 보질 못했습니다. 매실차는 막내 몫인데 아침과 저녁으로 한약 챙겨 먹듯 꼬박꼬박 마셔버렸거든요.

또, 큰애는 매실장아찌를 김치 먹듯 없앴습니다. 이런 사정이니 처남이 부르면 마땅히 일손을 거들어야지요. 그나저나 왜 스마트 폰이 발작을 일으키던 날은 모든 생각을 잊고 진동모드로 바꿔놓았을까요? 돌이켜 생각하니, 저는 그날 감히 게으름 섞인 느긋한 휴일 기대했나 봅니다.

땅 한번 파보고 농사일 거뜬히 하겠다? 큰 오해였습니다

묘목이 잘 자라도록 하려면 알맞은 깊이로 구덩이 파야 하는데 그 깊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겠더군요
▲ 흙구덩이 묘목이 잘 자라도록 하려면 알맞은 깊이로 구덩이 파야 하는데 그 깊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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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숨쉬게 하는 기특한 생물입니다.
▲ 지렁이 땅을 숨쉬게 하는 기특한 생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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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도 한번쯤 그런 날이 찾아와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달콤한 본능이 힘든 기억을 잠시 눌렀던 겁니다. 씁쓸한 생각을 하다보니 이내 광양에 닿았습니다. 시간은 10시. 급히 골짝 밭으로 향했죠. 그곳에 두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한바탕 일을 마쳤는지 마른 풀 위에 앉아 쉬고 있더군요.

가까이 다가가니 저를 쳐다보는 눈이 곱지 않았습니다. 재빨리 곁으로 다가가 흙 묻은 삽을 들었죠. 땅 팔 곳이 어디냐며 두리번거리니 처남이 대뜸 종이컵을 내밀더군요. 목부터 축이라고요. 구덩이 한 곳도 파지 않았는데 종이컵 속 음료수는 염치없이 시원스레 목을 타고 잘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시원함이 사라지기도 전에 처남이 삽을 들고 먼저 일어섭니다. 덩달아 나머지 두 사람도 일제히 무거운 엉덩이를 땅에서 땠습니다. 이윽고 삽을 들고 흙구덩이를 팠습니다. 어른 팔 길이쯤 되는 매실나무 묘목이 잘 자라도록 구덩이를 만들었죠.

그 위에 나무를 심고 흙을 잘 덮어 주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사일은 참 쉬웠습니다. 비 내린 다음날 땅파기는 식은 죽 먹기였죠. 삽날을 흙 위에 살짝 놓으면 땅속으로 빨려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속으로 생각하길 이 정도면 농사일 거뜬히 해내겠더라고요.

내친김에 어깨에 힘을 줘 한 삽 크게 뜨니 지렁이도 나오더군요. 실한 밭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신나게 일했습니다. 어느새 매실나무 묘목은 모두 심었습니다. 뱃속이 허한 게 시간을 살피니 점심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났더군요.

난생 처음 짊어진 지게, 피하고 싶었습니다

어린 매실나무를 심었습니다. 이 작은 녀석은 탐스런 열매를 언제쯤 맺을까요?
▲ 매실나무 어린 매실나무를 심었습니다. 이 작은 녀석은 탐스런 열매를 언제쯤 맺을까요?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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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마무리하고 처가에서 맛난 점심을 먹었습니다. 배고프니 모든 음식이 맛있더군요. 매실나무 심었다며 장모님이 매실주도 내오셨고요. 세 남자가 음식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수차례 잔을 마주쳤습니다. 저는 매실주로 잔을 채우며 또다시 부질없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무는 모두 심었으니 오늘 일은 이것으로 끝이라고 말이죠. 마음 놓고 잔을 받았는데 처남이 대뜸 그만 마시고 다시 밭으로 가잡니다. 남은 일이 있다는 겁니다. 감나무를 한곳에 모아야 한답니다.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농사일은 끝이 없더군요. 결국 뱃속에 매실주를 담고 밭으로 향했습니다.

이번에는 처남이 어디서 빌려 왔는지 철로 된 지게를 내놓더군요. 고백건대, 저는 그때 처음 지게를 어깨에 걸쳐 봤습니다. 물론 구경은 많이 했지요. 하지만 지게를 제 어깨에 메고 그 위에 짐을 올려 본 일은 없었죠. 당황스러웠습니다. 때문에 위기를 넘기고자 처남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지게로 나무를 옮기면 정리할 사람은 필요하니 내가 그 일을 맡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결코 제가 힘든 일을 피하려고 꾀를 낸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처남은 저와 둘이서 지게를 지고 매제는 나무를 쌓으라는 냉정한(?) 작업 지시를 내리더군요.

어깨에 내려앉은 상처, 뿌듯합니다

지게는 홀로 서 있지 못합니다. 지게 작대기에 의지해야 하지요.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 지게 지게는 홀로 서 있지 못합니다. 지게 작대기에 의지해야 하지요.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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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처남의 뜨거운 배려 덕분에 난생처음 지게를 짊어졌습니다. 가냘픈 작대기에 지게를 걸치고 감나무 토막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습니다. 무릎을 땅에 대고 지게에 매달린 띠를 어깨에 걸었습니다. 몸을 일으키려고 온 힘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게는 제 몸과 함께 뒤로 넘어가더군요.

몸이 처음 짊어진 지게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도전 끝에 가까스로 일어섰더니 이번에는 지게 위 나무토막이 한쪽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습니다. 허탈하더군요. 오기가 생겨 또 한 번 지게질을 시도했지만 결국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나무토막들은 매번 흙바닥으로 뒹굴었고 수차례 엉덩방아도 찧었습니다. 한참 동안을 지게와 씨름한 후 겨우 자세를 잡게 됐습니다. 결국,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리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지게질도 나름대로 기술이 필요하더군요. 그렇게 땀 흘리다 보니 끝없어 보이던 농사일이 마무리되더군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뻐근한 곳을 만지며 제 어깨를 짓누르던 지게를 떠올렸습니다. 그날 저는 비록 느긋한 아침을 맞지는 못했지만 삶의 무게를 톡톡히 경험했습니다. 세 아들이 좋아하는 매실을 거두기 위해 어린나무를 심었고 난생처음 지게질도 해봤습니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애들 먹성을 생각하니 앞으로 별별 일을 다 해야 할듯합니다. 또 한 가지 잊지 못할 일이 있습니다. 고된 일 중에도 봄이 오는 소리와 냄새를 맡았습니다. 작은 도랑을 흐르는 물소리가 봄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봄이 옵니다. 매실나무에 새순이 돋았습니다.
▲ 봄 봄이 옵니다. 매실나무에 새순이 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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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윗옷을 벗었습니다. 난생처음 짊어진 지게 덕분에 어깨에 멋진 훈장이 내려앉았습니다. 그 흔적을 세 아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였더니 막내가 아픈 곳을 만져 주더군요. 다음에는 제 몸 어느 구석에 고통의 흔적이 생길지 기대됩니다.


태그:#지게, #매실나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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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 커가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애들 자라는 모습 사진에 담아 기사를 씁니다. 훗날 아이들에게 딴소리 듣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세 아들,아빠와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기억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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