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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長崎) 데지마(出島)에서 아카사코(赤迫)행 노면전차를 타고 마쓰야마마치에키(松山町駅)에서 내렸다. 하차 후 오른쪽으로 나와 큰 길을 건너니 근방에 헤이와코엔(平和公園), 원폭낙하중심지, 원폭자료관이 가까운 곳에 모두 모여 있다. 원폭낙하중심지공원 북쪽의 언덕에 자리한 평화공원을 가장 먼저 가기로 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을 편하게 올라가기 위한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편하게 언덕에 올라가서 정중하게 평화를 기원하라는 의미인가?

가장 먼저 평화공원으로 가는 언덕에 올랐다.
▲ 평화공원 가는 길 가장 먼저 평화공원으로 가는 언덕에 올랐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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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와코엔 우리말로 평화공원은 비참한 전쟁의 희생을 반복하지 않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일본인들의 의지가 담긴 공원이다. 평화를 염원하는 헤이와코엔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지점에 만들어진 공원이다. 나가사키 헤이와코엔에서는 당시 나가사키 인구 중 7만 5천명의 사망자를 포함하여 15만 명이 희생된 나가사키 원폭사건의 피해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공원의 언덕을 오르자마자 공원 입구에 나타나는 것은 공원의 적막감을 깨우는 분수다. 이 분수대는 지름이 18m나 돼서 일본에서 보는 분수 중에서 대형이다. 분수대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노즐은 날아가는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을 하고 있다. 평화를 상징하는 학의 날개를 형상화해서 만든 인공 물줄기인 것이다.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 접고 또 접는 종이학같이 한 마리의 학이 이곳에 날아와 앉아 있다. 분수대의 학의 날개는 이곳 사람들이 평화를 갈구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

갈증에 죽어간 원혼들 달래려 공원 곳곳에 물 

갈증 속에 죽어간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 평화의 샘 갈증 속에 죽어간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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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수대의 이름을 읽어보니 '평화의 샘'이다. 분수대 전면의 검은 석판에는 원폭 투하 당시에 물을 찾아 헤매던 한 소녀의 수기가 옮겨져 있다. 이 수기로 인해 이 분수대가 공원에 남겨진 것이다. 그 소녀의 수기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목이 말라 참을 수가 없었다. 물 위에는 기름 같은 것이 한 면에 떠 있다. 물이 너무 마시고 싶어서 결국 기름이 떠 있는 채로 물을 마셨다.'

원폭 희생자들이 죽어가면서 가장 괴로워했던 것은 갈증이었다. 원폭의 굉장한 열 때문에 사람들의 몸 속에 있는 수분이 모두 마르고 몸은 타들어갔던 것이다. 당시 극심한 열상을 입은 원폭 부상자들은 물을 찾아 헤매다가 죽어나갔다. 그래서 이 공원의 큰 분수는 당시 희생자들의 원혼이 갈증을 모두 해소하라는 바람을 담고 있다. 분수대의 물은 몸이 타들어가던 부상자들을 달래기 위해 오늘도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다.

평화공원에는 유난히 물을 소재로 하는 조형물이 많고, 조형물마다 물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갈증 속에 죽어간 원폭 희생자들이 저 세상에 가서라도 물을 충분히 마시도록 위로하기 위한 조형물들이다. 평화의 종 앞에도 수많은 플라스틱 생수병이 놓여 있다. 이 생수병들은 목이 말라 죽어간 원폭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함이다. 평화의 종 아래에 세워진 청록색 비석도 물에 젖은 형상을 하고 있고 비석에 물을 적시기 위한 플라스틱 양동이까지 놓여 있다. 오늘 같이 비가 온 날에는 원폭 피해자들이 원도 없이 물을 마셨을 것 같다.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비석은 항상 적셔져 있다.
▲ 평화의 종과 비석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비석은 항상 적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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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종 아래에는 매우 인상적이 그림이 한 폭 걸려 있다. 그림 안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된 부상자들이 구원열차로 뛰어들고 있다. 구원열차에는 원폭 피해자를 돕기 위해 파견된 의료팀이 타고 있었다. 그들이 살려달라고 치켜 든 손에는 죽지 않고 살고자 하는 간절함이 가득 담겨 있다. 맨 몸에 피투성이인 부상자들은 이성을 잃은 모습들이다. 죽음 앞에서 누가 냉정할 수 있었겠는가?

평화기념상으로 가는 길 바로 앞에는 나가사키 형무소 우라카미(浦上) 형무지소 흔적이 남아 있다. 원폭의 폭발로 철근 콘크리트의 높이 4m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현재는 그날의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단의 잔해만 남아 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한발의 플루토늄형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폭심지에서 가장 가까운 공공건물이던 형무소는 콘크리트 벽의 대부분이 밑부분부터 무너져 전소되었다. 그리고 형무지소의 직원 및 수용자 134명은 모두 현장에서 폭사했다.

이곳에서 이름 모를 조선인 독립지사도 유명을 달리했다.
▲ 우라카미 형무지소 터 이곳에서 이름 모를 조선인 독립지사도 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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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형무소 자리에서 원폭으로 목숨을 잃은 조선인은 최소 13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형무소에 일반 수감자들과 더불어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인들과 중국인들도 수감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건물이 모두 날아가 버렸으니 기록을 확인할 길이 없다.

이 형무소에서 원폭으로 사라진 조선인 독립운동가는 역사에 이름도 남기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곳은 이름 없는 순국선열이 이국 타향에서 영문도 모르고 목숨을 잃은 곳이다. 그들의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이 현장은 순국선열들에게 눈을 감고 묵념을 해야 할 곳이다.

평화기념상 옆에는 반짝이는 황동 종이학이 내려다보는 탑이 있다. 우리들의 눈에도 익숙한 형형색색의 종이학들이 여러 갈래로 엮여 탑 아래에 가득 걸려 있다. 일본 전국 각지의 초등학생 등이 원폭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자 보내온 종이학들이다. 종이학은 원폭 희생자를 기리며 희생자들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염원하고 있다.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보내온 종이학들이 걸려 있다.
▲ 종이학의 탑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보내온 종이학들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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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긴 작업 끝에 완성한 평화기념상...우람한 서양인 형체라 어색 

평화공원은 조형물들의 퍼레이드라고 할 수 있는 곳이지만 평화공원을 상징하는 조형물은 따로 있다. 그것은 1955년 8월에 원폭투하 10주년을 기념하여 완성된 평화기념상이다. 나가사키를 홍보하는 팸플릿이나 일본여행 책자에 나가사키의 상징으로 되어있는 조형물이다. 이 조형물은 인상적인데다가 다른 일본 도시에는 없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높이 9.7m에 무게가 30톤에 달할 만큼 큰 평화기념상은 일본과 외국에서 모인 기부금으로 건립되었다. 이 기념상은 전쟁으로 처참한 희생을 당한 나가사키 시민들이 평화를 갈구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 나가사키 출신의 조각가 기타무라 세이보(北村西望)가 무려 5년간의 긴 작업 끝에 완성한 기념상이다.

부처님 손 모양인 수인(手印)으로 여러 깨달음을 표현하듯이 이 푸른 청동상은 손짓과 다리의 자세, 눈을 통해 여러가지를 상징하고 있다. 하늘을 가리키듯이 위로 세운 오른손은 원폭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고, 수평으로 늘어뜨린 왼손은 평화를 상징한다. 구부리고 있는 오른쪽 다리는 마치 명상하듯 고요함을 나타내고, 직각으로 접힌 왼쪽 다리는 구제를 향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근육맨은 불안정한 자세 때문에 마치 손을 들어 균형을 잡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람들에게 평화를 지키라고 강요하고 있다.
▲ 평화 기념상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람들에게 평화를 지키라고 강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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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념상의 우람한 체격은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런데 일견 이 청동 평화기념상은 마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같이 우람해 보인다. 아무리 보아도 근육질의 우람한 서양인 모습을 하고 있다. 서양인의 원자폭탄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당한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서양인에 대한 열등 콤플렉스가 자리하고 있고 그 콤플렉스가 이 기념상에 나타난 것이리라.

평화기념상의 온화한 얼굴은 신의 사랑, 혹은 부처님의 자비를 나타내고, 지긋이 감고 있는 눈은 원폭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명복을 기원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얼굴도 피해를 당한 일본인의 얼굴이 아니다. 얼굴 뒤로 더부룩한 곱슬머리는 누가 봐도 서양인의 얼굴이다. 평화기념상은 마치 원폭을 발사한 서양인들에게 평화를 지키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 같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이 평화기념상 앞에서 매년 8월 9일 원폭의 날에 평화기념식전이 열린다는 사실이다. 매년 평화기념식전에서 전세계를 향한 세계평화선언이 이루어지는데 세계평화선언의 주체가 일본이어서 어이가 없을 뿐이다. 아직도 종군위안부의 역사를 부정하고 자신들이 전쟁에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평화를 부르짖는다는 사실이 웃기기만 하다.

정확히 줄을 맞춰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 일본인 단체 관광객 정확히 줄을 맞춰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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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로 이곳을 찾은 노인 관광객들은 기념촬영 의자까지 준비해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그 뒤편에는 이 평화공원에 단체로 견학 온 일본 학생들이 조용히 모여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다. 학생들은 안내원의 설명을 듣기 전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의 미래를 짊어진 어린 학생들이 왜곡되지 않은 역사 교육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요새 들려오는 일본의 역사교육 기사들을 보면 암울하기만 하다.

일본의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학생 관람객 일본의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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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념상에서 공원 입구로 이어지는 길 양 옆에는 세계 각국에서 세계평화를 기원하며 보내 온 15개의 조각상과 기념비가 늘어서 있다. 이 평화상들도 모두 평화와 함께 일본이 당한 아픔만을 담아내려고 하고 있다. 평화공원에는 전쟁에 패배한 참혹한 상처만이 남아 있고 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평화'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원자폭탄에 의해 영문도 모르는 평범한 시민들이 하루 아침에 목숨을 잃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일본이 피해자이기만 한 것처럼 평화를 강요하는 것만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나가사키에 거대한 섬광이 덮친 이후 반세기가 훨씬 지난 세월, 나무 한 그루 자랄 것 같지 않던 나가사키의 이 언덕에는 나가사키 평화공원이 생겼고 그 주변에는 크게 자란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일본인들은 왜 이곳에 원폭이 떨어졌는지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왜 죄 없는 수많은 시민들이 즉사해야 했는지 반성할 줄 모르고 있다. 일본인들이 나가사키 평화공원에서 원자폭탄을 비난하는 것은 여러 사람을 살인한 살인자가 자기 가족을 죽인 다른 살인자를 비난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전쟁을 일으킨 야만의 역사를 부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을 뉘우쳐야 그들에게 진정한 평화가 다가올 것이다.

아내와 함께 공원을 나오는 길, 공원은 평화스러우면서도 공기가 묵직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300편이 있습니다.



태그:#일본여행, #규슈, #나가사키, #평화공원, #평화기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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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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