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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철 사장이 물러났다. 170일간의 파업과 230명이 넘는 대량 징계는 그가 남긴 상처다. 이제는 그 후가 중요하다. 상처를 씻기 위해, MBC는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 <오마이뉴스>는 MBC 내부 인사와 언론 전문가 릴레이 기고를 통해 그 방안을 모색한다. [편집자말]
김재철 MBC사장이 지난 3월 26일 오전 자신에 대한 해임안이 논의될 방문진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방송문화진흥회 사무실에 도착하고 있다.
▲ 방문진 도착하는 김재철 MBC사장 김재철 MBC사장이 지난 3월 26일 오전 자신에 대한 해임안이 논의될 방문진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방송문화진흥회 사무실에 도착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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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 토요일 오후였다. 방문진에서 사장 해임안을 상정키로 했다는 연락을 받고 설렜다. 웬만한 일에 희비의 감정이 일지 않는 편이지만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몇 발짝만 가면 내 방에 1000장 넘는 CD가 꽂혀 있음에도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온 몸에서 힘이 빠지고 나른해지더니 눈이 감겼다. 일자로 누웠다. 비록 내 집 소파라고 해도 그런 주인 행세는 퍽 오랜만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해 스마트폰에서 BBC 라디오2가 나오는 앱을 눌렀다.

"It's over. It's over..."

목소리는 들으니 로이 오비슨인데 모르는 노래였다. 이별 노래였는데 "더 이상 당신을 원치 않아요. 다 끝났다는 메아리가 안 들리나요? 당신은 외로운 일몰을 보겠죠? 이제 끝이에요"라는 노랫말이 심상치 않았다. 끝? 누가? 김재철?

이어서 비틀즈의 <애비 로드> 앨범에 실린 3부작('Golden Slumbers', 'Carry That Weight', 'The End'로 이어지는 나의 애청 코스)이 흘러나오면서 더욱 묘해졌다. "내 사랑, 네 눈에 단잠이 가득하구나. 일어날 땐 미소가 잠을 깨워줄 거야"라는 노랫말이 나오는데 실제로 낮잠에 빠질 듯하던 다섯 살 난 둘째가 활짝 웃으며 춤을 추는 게 아닌가? 두 번째 해고통보를 받던 순간 내 품에 안겨 자던 둘째가 춤추며 웃다니.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남몰래 예감했다. 이번엔 정말 끝이다!

예감대로 그는 갔다. 다행이다. MBC에서는 그간 직업인으로서 생목숨이 여럿 날아갔고 사람이 무수히 다쳤으며 심장 상할 일들은 끊임이 없었는데 이제 '박해 끝, 구원 시작'인가 싶어 안도한다. 지난해 파업에 불참한 어느 부장이 후배 기자에게 썼던 '근육이 터지고 피가 철철 흘러 대하를 이룰 때까지'라는 섬뜩한 표현을 실제 상황에서 절실히 겪었기에 더욱 그렇다.

사장 퇴진과 함께 돌아온 공정방송의 실현

시기적으로도 다행이다. '되는 게 뭐 있나?'라는 무력감 속에 우리들의 희망은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상식에 호소하고 절규해도 상대는 불사신 같았고, 사태를 해결할 의지만 있다면 힘은 충분했던 쪽도 어디 끄떡이나 했던가?

결과론이지만 차라리 잘된 점도 있다. 노조의 요구와 무관하게 대주주가 이사회에서 사장을 해임한 만큼 '승리'니 '패배'니 하는 말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노조가 활개 칠 것'이라는 익숙한 공세가 활개 쳤을 것이다.

기자회 제작거부를 주도했던 개인적 입장에서도 다행스럽다. 3·1 독립만세 부르면 광명이 있을 거라던 희망이 그 뒤 수십 년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 침잠한 것처럼, 우리들의 싸움도 결국에 의미는 있었지만 성과는 없었다는 평가를 받게 될까봐 고민이 깊던 참이었기에.

그가 갔으니 정말 끝일까? 그의 해임이 확정된 순간, '그들'과의 싸움은 끝났지만 이제 '일'과의 싸움, '우리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되겠구나 하는 부담감이 엄습했다. '일'과의 싸움은 당연히 MBC의 재건, MBC의 부활에 요구되는 모든 노력을 뜻한다. 이를 위해 기자와 PD가, 아나운서가,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장 퇴진과 동의어로 설정해온 공정방송의 실현은 고스란히 당장의 책무가 됐다.

나는 이 시점이 지금껏 '그들'을 향해 내뿜은 정의감의 눈빛을 '우리 자신'을 향한 냉정한 성찰의 시선으로 바꿀 때라고 생각한다. 뉴스의 공정성은 외압이나 조직 논리에도 좌우되지만 기자 개인의 자질, 자기검열로도 공범이 될 수 있다. MBC의 불공정 보도에서 사장을 비롯한 보도국 간부들의 권력 눈치 보기와 편향된 보도 태도는 세상이 다 아는 일이 됐다. 그렇다면 최근 보도국 기자들 사이에 확산돼 있던 비판의 마비, 마르쿠제 식으로 말해 '순응기제의 만연'도 과소평가돼서는 안 된다. 기자들이 보도국 내부에서 자율적인 태도로 견해의 차이를 숨기지 않고 부정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한 불공정 보도가 재연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내부 구성원보단 시청자 납득에 초점 맞춰야 한다

총파업에 돌입한 MBC 노조원들이 지난해 2월 6일 오후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 김재철 사장의 퇴진을 촉구하며 집회를 열고 있다.
 총파업에 돌입한 MBC 노조원들이 지난해 2월 6일 오후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 김재철 사장의 퇴진을 촉구하며 집회를 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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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철 체제는 어떻게 정리돼야 할까? 시청자들이 MBC의 변화를 받아들일지 여부는 여기에 달려 있다. 어떤 이는 심판을, 어떤 이는 화해를 앞세울 수 있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을 강조하는 것은 성급할 뿐 아니라 적절치도 않아 보인다. 모든 것은 오로지 MBC의 재건이라는 하나의 기준에서 따져봐야 할 것이고, 내부 구성원보다는 시청자를 납득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하지 않을까 싶다. 시청자들은 MBC 기자들이 어떤 불공정 보도 때문에 떨쳐 일어났는지 기억하고 있고, 파업 이후 김재철 체제가 얼마나 더 심각한 불공정 보도와 황당한 방송 사고로 물의를 빚었는지도 잊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한 MBC의 정상화 과제니 방안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사치스런 고민이 아닐까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누가 후임 사장이 되느냐에 따라 낙하산 논란이 재연될 수도 있고, '김재철 시즌2'라는 말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실제로 최근 언론이 예상하는 사장 후보자 명단에는 김재철 체제의 중요한 기둥 역할을 한 인사나 불공정 보도의 지휘 책임선상에 있던 인사도 끼어 있다. 적어도 그들은 김재철 체제의 MBC가 구성원들의 존엄성을 짓밟았다거나 회사의 경쟁력을 추락시켰다거나 혹은 불공정 보도를 양산했다는 지적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인사들 가운데서 사장이 탄생한다면 재건의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게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해고자로서 복직의 꿈을 유보해야겠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닐 것 같다.

우리가 김재철씨의 퇴장에 환호한 것은 승리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결코 승리가 아니다. 평화가 다시 찾아오고, 희망이 회복되고, 공영방송이 재건될 수 있는 기회가 왔기에 안도한 것뿐이다. 부활의 날갯짓과 재건의 몸부림을 다 같이 할 수 있을지 설렘 속에 기대를 가져보는 것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봄은 왔으나, 신군부에 의해 이내 짓밟힌 80년 '서울의 봄'처럼 짧은 봄이 될지 불안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면 "It's over..."라는 노랫말을 입에 담는 것은 경솔한 처사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성호 전 MBC 기자회장은 지난해 6월 보도국 기자들의 제작 거부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태그:#김재철 사장,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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