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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발표된 판타지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이 큰 인기를 누렸다. 이 소설은 고 이휘소 박사가 "비밀 핵무기개발을 추진하다가 미국 정부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소설의 영향으로 지금도 국민 상당수는 세계 소립물리학계의 선구자인 이휘소 박사를 엉뚱하게도 핵무기 과학자로 알고 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이기 때문에 용인될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최근 유럽에서 '힉스입자'가 발견되면서 이휘소 박사의 실제 과학적 업적이 조명되고 있는데도 국내 언론, 정계, 교육계가 이 일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는 데 있다.

최근 박근혜정부가 핵재처리와 우라늄농축을 위해 미국과 국내에서 대대적인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여론몰이에 나서는 상황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열풍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것이 국내 몇몇 정치인이 주장하는 노골적 핵무장론이건 정부의 공식입장인 "사용후핵연료 관리상 불가피하다"는 주장이건 국내외 현실에서 한국에서의 핵연료 재처리는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소설과 달리 정부정책은 상황을 오도했을 때 뒤따르는 책임이 막중하다. 더욱이'사용후핵연료 관리'와 에너지정책에서 정작 정부가 해야할 일을 방기하고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재처리 주권'의 허구와 사용후핵연료 관리 문제의 실상

지난 3월 11일 오후 청와대 세종실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모두발언하고 있다.
 지난 3월 11일 오후 청와대 세종실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모두발언하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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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의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안의 핵심 내용은 사용후핵연료(원자로에서 연료로 사용된 뒤 배출되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의 이른바 재처리와 우라늄농축의 허용이다. 그 근거는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하는 국내 원전부지의 임시저장수조가 2016년부터 포화상태로 들어가 원전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5위 원전강국으로서 재처리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사용후 핵연료에 포함된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이용하기 위한 재처리기술은 농축기술과 함께 군사적으로 매우 민감한 기술이기 때문에, 일부 선진국에서만 독점하고 있다.

정부의 논리는 언뜻 들어보면 그럴듯하지만 사실 조금만 들추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국 원자력계의 희망대로 재처리가 허용된다 하더라도 아직 연구단계의 기술을 상업적 규모로 개발하려면 최소 20년이 걸린다고 한다. 당장 3년 후 저장수조가 포화된다며 '숨 넘어가는 소리'를 하면서 이를 근거로 20년 후에나 실현가능한 방안을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미 재처리를 하고 있는 일본은 어떤가? 2년 전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 엄청난 양의 사용후핵연료가 임시저장수조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세계가 놀랐다. 그로 인해서 피해가 더 커졌다. 이론과 달리 재처리의 공정이 더디다보니 사용후핵연료를 로카쇼에 있는 재처리시설로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 하는 일본조차도 54기 원전중 17기가 2018년이면 포화상황에 도달한다. 결국 최대 원전업체인 도쿄전력은 아오모리현 무츠시에 5천톤규모의 저장시설을 건설해 올해부터 운영할 예정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여전히 재처리후 발생한 최종 핵폐기물 처분장을 별도로 마련해야 한다.

원자력협정 상대방인 미국은 어떠한가? 104기의 원전을 가동중이지만 핵확산문제로 지난 1970년대 재처리를 전면 중단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지난 1990년대에만 8기의 발전용 원전이 폐쇄되었으며, 현재는 폐쇄된 9개 원전부지에 남은 사용후핵연료 관리문제까지 있어 한국 못지않은 어려움이 있다. 게다가 미국의회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2035년에는 폐쇄 원전부지가 총 30개로, 2050년에는 총 70개로 늘어날 전망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 과거 추진되었던 네바다주 유카마운틴 핵폐기장계획도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백지화했다. 그렇다고 해서 재처리를 재개하자는 주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1월 미국 의회차원에서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방안으로 오바마 행정부에 전달한 이른바 '블루리본위원회보고서(Blue Ribbon Commission Report)' 역시 최종 핵폐기장이 마련될 때까지 건식 중간저장을 권고했지만 재처리여부 판단은 유보했다.

이처럼 선진국들의 경험은 재처리 여부가 사용후핵연료의 중간저장과 최종처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며, 실제로 당면하고 있는 이슈들은 최종처분전까지 어떻게 중간저장을 할 것인지이다. 따라서 정부가 사용후핵연료 관리에서 정작 해야할 일은 사용후핵연료의 중간저장과 최종처분을 어떤 방식과 경로를 거쳐 진행할지 국민적 공론화를 거치는 일이다. 물론 R&D규모를 키워야하는 국내 원자력계에 재처리가 중요한 주제지만, 기껏해야 원자력연구원과 같은 정부출연기관 고충수준의 문제를 일국의 대통령이 산적한 에너지이슈들을 제쳐두고 몰두할 일인지 의문이다. (결국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이 현지시간으로 18일 종료됐다.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현 협정을 2년 연장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전력수급 위기와 셰일혁명은 '수수방관'

러시아 가즈프롬의 주요 천연가스 수출국. (2012년 기준)
 러시아 가즈프롬의 주요 천연가스 수출국. (2012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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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처한 대내외 에너지여건은 어느 때보다 엄중하다. 안으로는 초유의 '915 정전사태'의 근본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다. 경제성장과 무관하게 전력수요의 급증이 지속되고 있고, 삼면의 해안가에 원전과 석탄화전을 계획대로 다 건설한다 하더라도 최대 수요지인 수도권까지 이어지는 송전망의 용량과 신규부지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장거리송전 전력수급 패러다임을 심각하게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이다.

대외적인 상황은 또 어떤가? 5년전 미국에서 시작된 셰일가스 혁명은 세계 에너지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이미 북미에서는 석탄과 원전건설계획들이 대부분 취소되고 가스발전으로 대체된 상황이다. 또한 문닫았던 미국 석유화학업체들이 싼 셰일가스에 기반해 세계 석유화학제품 시장을 뒤엎고 있고, 그 영향으로 국내 석유화학업체들도 이미 타격을 받고 있다.

한편 세계 최대 천연가스 공급자인 러시아의 가즈프롬은 셰일혁명의 여파로 유럽에서의 지분이 급감하면서 아시아로 눈을 돌려야하는 상황이다. 가격문제로 10년을 끌던 중-러간 천연가스 공급협상이 지난달 양국 정상회담에서 양해각서체결로 전환점을 돌았다. 이에 따라 2018년부터 중-러간 천연가스 공급이 본격화되면 천연가스 변방지역이던 동북아 에너지시장은 큰 변화를 맞는다.

일본의 경우도 지난해 9월 러시아와 LNG도입 양해각서를 체결한 이후, 지난 17일 도쿄에서 모테기 도시미츠 경제산업장관이 러시아 가즈프롬 사장단과 블라디보스톡 LNG 기지건설과 2018년부터 시작되는 LNG공급에 대한 협의를 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 자원에너지청은 같은 날 후쿠이현에서 가즈프롬 실무진과 함께 공급계약의 세부협의 및 상호기술협력에 대한 논의를 하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경우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대부분 정지된 원전을 대체할 전력원으로 천연가스의 도입량을 늘려야 하는 상황이지만, 러시아 역시 극동지역 천연가스 공급시설투자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필요한 상황이다.

러시아 천연가스의 극동지역 공급과 이에 필요한 설비투자를 두고 중국, 일본, 러시아간 치열한 에너지 외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변화에 수수방관할 경우 국내 전력, 석유화학, 기계, 소재 등 천연가스의 전후방산업 전체가 중요한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은 물론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가스공사와 같은 특정 공기업에 맡길 문제가 아니라 국가차원의 종합정책수립과 발빠른 에너지외교가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도 박근혜 정부에게는 '원자력협정 개정' 말고 이렇다 할 에너지정책이 없다.이런 배경에는 박근혜 정부가 투명하고 체계적인 에너지정책 논의 채널 없이, 주변 소수 원자력 인맥에게만 정보를 의존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정권초 6명이나 되는 장차관 지명자들의 사퇴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배경과 그 궤를 같이한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밝힌 것처럼 진정으로 핵무장을 추진하지 않을 바에야 섣부른 '핵주권론'으로 한정된 외교자원과 행정력을 낭비하지 말고, 체계적인 에너지정책 논의채널부터 마련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에너지시민연대 정책위원입니다



태그:#원자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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