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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 진영이 보여주는 인물화의 종교성

원효대사 진영
 원효대사 진영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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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대종사 사리탑비명을 보고 나서 나는 성보박물관으로 간다. 9시에 문을 열기로 되어 있는데 8시 반쯤 되니 벌써 문을 열었다.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돌기로 한다. 가장 먼저 의상대사의 진영이 눈에 들어온다. 의상대사는 범어사를 창건한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의자에 가부좌를 하고 앉은 좌상으로 얼굴 모습이 아난존자를 닮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767년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비단에 채색을 했다. 크기는 가로가 91.3㎝ 세로가 124.3㎝다.

의상대사 옆에는 원효대사가 있다. 원효대사는 의자 아래로 다리를 내리고 앉은 모습으로, 얼굴 표정이 원만구족하지는 않다. 원효대사의 진영을 모사한 것으로 19세기 중후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화면 향좌측 상단에 붉은 바탕에 검은색으로 해동초조 화엄강사 원효대화상 진영(海東初祖華嚴講師元曉大和尙之眞影)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그림의 기법에서 의상대사 진영만 못하고, 배열에서도 의상대사 다음에 위치하고 있다.

동산 대종사
 동산 대종사
ⓒ 범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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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사명대사, 묘전대사 등 조선 후기 이 절을 거쳐 간 스님들의 영정이 있다. 그리고 근․현대 경허선사, 혜성대사, 용성대사, 동산대종사의 영정이 있다. 그 중 동산대종사의 모습이 실제 모습에 가장 가까운데, 그것은 서양화 기법을 도입해 명암과 원근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특히 눈가의 주름, 모발과 눈썹, 코와 귀, 입술선의 형태가 사실적이다.

지도와 금구 그리고 불화

범어사 전경도
 범어사 전경도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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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지나면 동래성과 금정산 그리고 범어사 지도가 있다. 금정산 선찰대본산 범어사 전경도 오른쪽 위에는 산림면적, 건물평수, 사암열록(寺菴列錄)이 표현되어 있다. 사암열록이란 일종의 건축물 목록이다. 그리고 왼쪽 아래에는 창건연대, 중창연대, 창립자, 현 주지, 그림을 그린 연도가 표현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범어사의 창립자는 의상조사다. 그런데 창립연대는 흥덕왕 9년(乙卯: 835)이라고 적혀 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지도를 작성한 것은 성월대선사가 주지로 있던 1915년 8월 9일이다. 그럼 지금부터 100년 전 금정산과 범어사의 모습이다. 한두 가지 건물만 추가되었을 뿐 전체 구도가 지금과 다르지 않다. 지도 옆에는 세 개의 금구(金鼓: 청동북)가 있다. 그들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국청사 청동북(보물 제1733호)이다. 1666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은해사 청동북과 함께 17세기 대표작으로 여겨진다.

국청사 금구
 국청사 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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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바깥 면에 세 줄의 동심원을 그리고 그 안에 글자와 장식을 새겼다. 중심원 안쪽은 북을 치는 곳으로 비워두었고, 중심원 바깥 두 번째 원 안에는 다섯 개의 범자문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가장 바깥 원 안에는 당초문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북의 가장자리 가운데 위쪽으로 세 개의 고리가 있어 벽이나 좌대에 고정시킬 수 있도록 했다. 북의 후면에 기록된 강희(康熙) 5년(丙午) 3월에 주조해 만들었다는 기록을 통해 1666년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있는 불화 중 눈에 띄는 것은 영산회상도와 아미타회상도다. 아미타회상도는 붉은 색 바탕에 흰색으로 도상을 선묘한 선묘불화다. 선묘불화는 조선전기 왕실발원 불화에서 출발해 조선후기에 보편화되었다. 화면 중앙에 아미타좌상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 보살상과 사천왕상, 나한상을 배치하여 아미타극락세계를 표현했다. 화면 하단 중앙에 함풍(咸豊) 십년(庚申)이라고 적혀 있어 1860년에 제작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성보박물관의 큰 보물 네 가지

삼국유사(1512년 간행)
 삼국유사(1512년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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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지나면 자연스럽게 박물관 중앙에 있는 4가지 보물을 만나게 된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삼국유사>(보물 제419-3호)다. <삼국유사>는 일연(一然)스님이 쓴 삼국시대의 야사다. 이곳에 있는 <삼국유사>는 4-5권을 1책으로 묶었다. 1512년(중종 7) 경주에서 <삼국사기>와 함께 간행되었다. 이 책의 초간본은 1394년(태조 3) 경주에서 간행된 바 있다.

범어사 소장 <삼국유사>는 태조 때의 초간본을 저본으로 중종 7년 경주에서 간행한 인쇄본으로 본다. 그러나 같은 해 발행된 정덕본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문자상 차이가 있고, 책의 크기도 조금 크다. 그리고 책의 일부 내용에는 구결(口訣)로 현토(懸吐)를 달았다. 아쉬운 점은 완질이 아니고 서문과 발문이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 때의 초간본과 1512년 정덕본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귀중한 책이다.

금장요집경
 금장요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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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옆에는 보물로 지정된 세 가지 불경이 있다. <주범망경(注梵網經)> <불조삼경(佛祖三經)> <금장요집경(金藏要集經)>이 그것이다. <주범망경>은 구자국 출신의 구마라집이 번역한 <범망경>을 송나라 혜인이 주를 단 주석본이다. 이 책은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을 정리한 기본적인 경전이다. 계율의 중요한 부분을 주석한 책으로 원대(元代)의 판본을 바탕으로 고려 말에 다시 복각하여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불조삼경>은 <불설사십이장경(佛說四十二章經)> <불유교경(佛遺敎經)> <위산경책(潙山警策)> 등 3종의 불경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원나라 몽산 덕이(蒙山 德異)가 1286년(至元 丙戌)에 초서로 쓴 서문이 있고, 그 뒤로 3종의 불경이 실려 있다. 끝 부분에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발문에 의하면 고려 우왕 10년(1384: 靑龍 甲子) 지봉(志峯), 지도(志道), 각온(覺溫)이 김씨의 시주를 받아 이 책을 중간(重刊)하였다.

<금장요집경>은 북제(北齊)의 승려 도기(道紀)가 각 경전에 나오는 인과응보에 관한 설화를 중심으로 엮은 일종의 교화용 경전이다. 7권 가운데 2권(권1~2)만이 전한다. 서명 다음에 목차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22개 연(緣: 篇에 해당)의 제목이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전체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경전 하단에 '현사(玄四)', '문향(文鄕)', '백기(白基)' 등 각수(刻手)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들 각수와 판각의 상태로 보아 고려 말에 새겨 조선 전기에 인출한 것으로 생각된다.

범어사 연
 범어사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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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박물관에는 이들 외에도 불상과 불교의식 용구, 목판과 와당 등이 전시되어 있다. 불교의식구 중에는 연(輦)이 가장 눈에 띈다. 연이란 불교의식을 위해 불상을 옮길 때 쓰는 가마다. 이 연은 가마채인 네 개의 손잡이, 작은 집 모양의 몸체, 돔 형식의 옥개(屋蓋)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장엄함과 화려함이 잘 조화되어 있다. 목판에는 천수경판과 다라니경판이 있다. 와당은 범어사 증개축시 사용된 것이란 명문이 있다.

범어사를 떠나며

성보박물관을 나오니 해가 이만치 올라와 있다. 9시가 넘어서인지 범어사 경내의 수목이 빛을 받아 더욱 더 싱그럽다. 신록이 피어나는 오월의 산사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서양 사람들은 눈이 온 날 아침 산사를 제일 좋다고 하는데, 나는 5월 신록의 산사가 제일 좋다. 해마다 오월이면 초파일을 전후해 산사로 답사를 떠난다. 작년에는 울진 불영사엘 갔고, 재작년에는 해남 미황사를 갔고, 재재작년에는 해남 대흥사를 갔다.

금정산 정상 고당봉
 금정산 정상 고당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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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절에서 나는 항상 좋은 경치를 보고 훌륭한 문화유산을 만나고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어왔다. 이번 범어사 템플스테이에서도 우리 회원들은 묘중 스님과 인연을 맺었고 금정산 자락의 아름다움을 만끽했고, 가치 있는 문화유산을 만났다. 범어사는 튀지는 않지만 대중을 품어주는 푸근함이 있는 절이다. 범어사를 감싸고 있는 금정산도 화기가 강하지 않으면서도 웅혼한 맛이 있어 좋다. 이곳에서 우리 회원들은 하룻밤을 지내며 자연과 종교 그리고 사람과 친해졌다.
 
9시 30분이 되자 묘중스님 주관으로 휴휴정사에서 회향식을 진행한다. 27명의 회원이 모여 우리말로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식을 끝낸다. 모두들 스님과 자원봉사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떠나는 아쉬움을 이야기한다. 절을 내려가는 길은 보제루, 천왕문, 일주문을 따라 이어진다. 회원들 중 일부가 성보박물관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다시 한 번 성보박물관엘 들렀다. 아까보다 사람들이 많아졌다. 다시 보아도 좋은 불교 문화유산이 가득하다.

범어사 풍경을 스케치하는 여고생
 범어사 풍경을 스케치하는 여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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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아래 대형주차장에 있다고 해서 우리는 일주문 앞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에는 여고생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월초파일을 맞이해 범어사 사생대회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9시에 대회가 시작되어서인지 이제 겨우 스케치 단계에 있다. 대개 등나무와 편백나무, 소나무와 팽나무 등 큰키나무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숲 안에서 그림을 그려 너무 미시적으로 대상을 보는 것 같다.

쉽지는 않겠지만 계명암 정도에 올라가 범어사, 고당봉, 금정산, 부산 시내 등을 보며 좀 더 스케일 크게 그림을 그렸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러려면 등산을 해야 하는데 요즘 학생들이 거기까지 올라가려 하려 않을 것이고 또 안전사고 우려도 있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것 같다. 하긴 우리도 안전사고를 우려해 금정산성 답사를 포기하지 않았던가? 금정산성을 올라가자는 회원이 두셋 있었지만 다수의 의견에 따라 우리도 산내 암자를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일주문에서 주차장까지는 500m 정도 거리다. 주차장에는 이미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열시가 조금 넘어 우리는 범어사를 떠난다.


태그:#범어사 성보박물관, #의상과 원효, #청동북과 불화, #불교서적, #사생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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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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