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과 장독대는 서로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만, 둘은 우리의 독특한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주 문화는 독특하지요. 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흰옷을 즐겨 입었고, 된장·고추장·간장과 같은 발효음식을 먹어왔으며, 난방으로 구들을 사용하였지요.
굴뚝은 구들이라는 우리의 독특한 주거문화에서, 장독대는 말리고 발효시켜 먹는 우리의 식생활에서 나온 실재적 표현물입니다. 둘은 우리 집에 빠지지 않고 자리하고 있지요. 궁궐이라고 하여 다르지 않습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에도 장고(醬庫)가 있었지요. 잘사는 집이든, 못사는 집이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게 굴뚝과 장독대입니다.
우리는 굴뚝을 거추장스럽다던가, 귀찮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집을 꾸미는 독특한 장식물로 여기고 집 앞에 세우기도 하고, 후원에 과감히 드러내기도 하지요. 장맛으로 그 집안의 음식솜씨를 알 듯, 굴뚝에서 나는 연기의 때깔로 그 집 형편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숯을 사용한 궁궐의 굴뚝에선 연기조차 나지 않고, 잘 사는 집 굴뚝에서는 잘 마른 장작을 사용하기 때문에 파르르한 연기가 솟아납니다. 그러나 못사는 집 굴뚝에서는 메케하고 축축한 연기가 납니다. 나무를 해오면 말릴 새도 없이 젖은 나무를 바로 사용하기 때문이지요.
집안 사정에 따라 장독의 크기와 개수가 달라집니다. 굴뚝도 마찬가지입니다. 초가집에는 벽돌로 쌓은 굴뚝은 어울리지 않지요. 나무판자 네 개로 통을 만들어 세운 굴뚝이라든가 황토에 막돌이나 깨진 기와를 꾹꾹 찔러 넣어 투박하게 만든 굴뚝이 어울릴 겁니다.
궁궐이나 상류층 기와집 굴뚝은 벽돌굴뚝을 세웁니다. 집 주인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지는데, 여성이 거주하는 집이면 황토색 벽돌로 화려하게 만들고, 남성이 거주하는 집이면 회색 벽돌로 세련되게 만듭니다.
유명한 농원에 가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많은 장독이 있지요. 제 눈에는 그다지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왠지 과시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지요. 뼈대 있는 종가 장독대라도 생각보다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장독대로 허세를 부리지 않지요. 어느 집을 가든 장독대만큼은 소박하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굴뚝으로 치면 '낮은 굴뚝'입니다. '낮은 굴뚝'은 연기가 밖으로 새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낮게 만든 것입니다. 굴뚝 연기는 따뜻한 방과 따뜻한 밥의 상징입니다. 밥 짓는 연기는 춥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낮은 굴뚝은 남을 배려하는 선비정신이 엿보이는 굴뚝입니다.
굴뚝과 함께 후원의 주인노릇을 하는 것이 장독대입니다. 뒤뜰에 정갈하고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지요. 어린애가 빠지면 나오지 못할 정도로 큰 장독은 맨 뒤에 놓고, 그 다음 키 순서에 따라 뒤에서부터 배치하여 대가족이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듯합니다.
된장과 간장, 고추장은 모두 메주에서 나온 것이니 핏줄이 같은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장독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 모습이 서로 닮아 보이는 게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장맛보고 딸 준다"라는 말이 있지요. 장맛이 그 집안의 음식솜씨를 나타내고 집안의 살림솜씨나 가격(家格)을 짐작케 해주는 것입니다. 장맛은 맛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게지요. 장을 담그려면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장을 담그기 전에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장독에 금줄을 치거나 버선본을 거꾸로 붙여놓기도 합니다.
장맛을 그르치는 잡신이 얼씬도 못하게 막는 게 금줄이요, 잡신이 들다가 거꾸로 뒤집힌 버선본에 놀라 도망가거나 잡신이 들어오다 버선 속으로 빠져들도록 설치해놓은 것이 버선본입니다. 하얀 버선본은 햇빛이 반사되어 빛을 싫어하는 지네와 같은 벌레를 쫓기 위한 것으로, 과학적인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장독대는 그저 먹을 것을 보관하는 그런 곳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의 신앙과 같은 존재여서 매일 행주질을 하여 윤기를 잃지 않게 하였지요.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칠성신에게 무병장수와 소원을 빌던 곳도 장독대입니다.
집 안의 신으로 가옥을 지켜주는 성주신이 있고 터를 지켜주는 지신, 부엌의 조왕신, 우물의 용왕신, 변소의 측신, 대문의 문신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천륭신이라 하여 장독대를 지켜주는 신이 어엿하게 한자리 차지하고 있습니다. 장독대는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뗄 수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장독대는 신성한 공간이어서 늘 정갈하게 유지합니다. 장독대 주변엔 맨드라미, 봉숭아 등 키 작은 꽃을 심거나 장독대 돌 틈 사이에 듬성듬성 바위솔을 심기도 하고 박을 심어 운치를 내기도 합니다.
장맛은 대대손손 이어집니다. 어머니는 그전 어머니로부터 장 담그는 법을 전수받고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전수합니다. 장독에서 장이 익어가듯 장독대에서는 고부의 정이 익어갑니다.
장은 발효음식입니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을 기다려야 제대로 된 맛을 내지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구들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구들은 불을 지피고 곧바로 데워지지 않습니다.
굴뚝으로 나오는 연기는 아궁이에서 시작하여 고래를 타고 방구들 윗목에 깊이 파놓은 고랑인 개자리에 머물며 티끌과 먼지를 털어낸 다음 굴뚝으로 나오게 됩니다.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연기는 오래 머물수록 열을 보존하고 골고루 방을 데우는 것이지요. 둘 다 느림의 미학이 있습니다.
언제가 모르게 빨리빨리 문화가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데 본디 우리에게는 '빨리빨리 문화'보다는 느림의 문화가 더 어울립니다. 경박한 외래문화가 들어와 우리민족을 바꿔 놓았습니다. 인스턴트식품, 아파트, 경쟁, 실적지상주의 등이 느림의 사회에서 속도경쟁의 사회로 변하게 했지요.
굴뚝과 장독대가 함께 있는 뒤뜰 정경을 가끔 봅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도 닮지 않았으나 속은 따뜻한 정이 듬뿍 들어가 있는 형제를 보는 것 같습니다. 둘 다 느려 터져 누구하나 이기지 못하고 모질지 못하여 싫은 소리 못하는 착한 마음씨를 가진 형제를 보는 것 같습니다.
굴뚝과 독항아리는 서로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서로 한 몸이 되어 붙어 있기도 합니다. 독항아리가 굴뚝의 몸통이 되어 개성 있는 굴뚝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항아리가 굴뚝에 올라 앉아 연가(煙家)가 되기도 합니다. 물동이를 이고 가는 시골아낙처럼 보입니다. 둘 다 느림의 문화를 담고 있는 절묘한 만남입니다.
'독을 품은 굴뚝'은 개성 있는 굴뚝이상의 심상(心象)이 있습니다. 아무런 연이 없는 사람끼리 만나 서서히 방이 데워지듯, 느릿느릿 장이 익어가듯, 정이 깊어져 연을 맺고 한 몸이 된 금실 좋은 부부처럼 보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pressianpl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