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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무에타이 체육관에서 폼을 잡았다. 그는 프로선수 15년 동안 식사시간, 취침시간, 운동시간 등은 1분도 어기지 않고 철저하게 지켰다고 했다. 이런 정신으로 요즘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 한영진 그의 무에타이 체육관에서 폼을 잡았다. 그는 프로선수 15년 동안 식사시간, 취침시간, 운동시간 등은 1분도 어기지 않고 철저하게 지켰다고 했다. 이런 정신으로 요즘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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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안성의 무에타이 체육관에서 만난 한영진 관장.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 시나리오를 보는 듯했다.

중3 때 무에타이 프로선수로 데뷔

그가 초2 때부터 시작한 축구를 잘하도록 그의 아버지는 무에타이를 시켰다. 하지만 그는 중2 때 돌연 축구를 그만두고 무에타이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버지가 반대했지만, 링 밖에선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허락받았다.

그의 스승 이원길 관장이 그를 알아보았다. 그의 파이터 기질을 알아본 스승이 학교로 찾아와 그를 스카우트했다. 그의 승부근성과 성실성이 스승의 눈에 들었다. 거기에다가 중2답지 않은 훤칠한 그의 키(183cm)는 스승도 그의 미래를 꿈꾸게 만들었다.

한영진 관장의 경기장면이다. 그의 발차기가 일품이다
▲ 경기장면 한영진 관장의 경기장면이다. 그의 발차기가 일품이다
ⓒ 한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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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권유로 중3 때 프로선수로 데뷔했다. 하지만, 시작은 녹록지 않았다. 4전 전패였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자신에 맞는 체급을 찾지 못해서라 판단했다. 웰터급으로 자신의 체중을 맞췄다. 그 무렵(고1) 태국으로 무에타이 유학도 갔다.

4패는 전화위복의 도화선이었을까. 그 후 70연승을 거뒀다. 20세에 국내 챔피언 획득, 23세에 동양챔피언 획득. 그는 동급에선 그야말로 아시아의 천하무적이었다.

격투기가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그는 배고팠다. 국내챔피언 때도 대전료는 고작 한 경기당 20~30만 원이었다. 국내 프로선수로선 1세대이기에 항상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힘껏 상대방 때리는 게 링 위의 예절?

그는 15년 무에타이 인생에서 제일 기억나는 경기를 치렀다. 바로 동양챔피언 타이틀전. 상대 선수는 전설의 무에타이 파이터 리키다(태국)였다. 무에타이 종주국 선수답게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자였다.

7라운드 경기였다. 리키다는 챔피언답게 강했다. 주거니 받거니 난타전이 이어졌다. 서로 피범벅이 됐다. 승부는 팽팽했다. 이대로 가다간 그가 질 수도 있었다. 그가 종료 1분을 남기고 카운트 펀치를 날렸다. 리키다가 링 위에 쓰러졌다. KO승이었다.

가난한 그에게 절실한 승리였다. 하지만, 그 결과로 얻은 상처도 컸다. 눈 아래 뼈와 코뼈 등이 부서지고, 어깨가 탈골 되고, 머리가 찢어졌다. 워낙 큰 부상이라 그 후 3개월 동안 운동을 못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목숨 걸고 동양챔피언을 따냈다. 그는 말했다.

"링 위의 예절은 최선을 다해서 상대방을 때려주는 것이다. 만일 설렁설렁 때린다면 상대방은 그걸 알게 되고, 자존심을 생명으로 하는 파이터에겐 크나큰 모욕이 된다."

그는 리키다에게도 최선을 다해 예의를 지켰다.

링 위에선 70연승, 인생에선 쓴맛

요즘 체육관에 오는 관원들과 함께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6세부터 60대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온다고 했다.
▲ 관원들과 함께 요즘 체육관에 오는 관원들과 함께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6세부터 60대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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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가도를 달리던 그에게도 시련의 바람은 불었다. 그가 선수해서 모은 돈으로 어머니를 위해 전세를 마련했다. 고작 6~7개월 살고, 전셋집이 날아갔다. 부동산 사고였다. 졸지에 가족이 바닥에 나앉게 생겼다. 가족이 시골집으로 겨우 이사를 했다.

운동만 하던 그에겐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링 위의 70연승이 인생 70연승을 보장해주진 못했다. "그때 마음은 다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였다"고 말하는 그의 입술이 떨렸다. 캄캄한 좌절의 순간이었다.

이때, 어머님의 한마디가 그를 구했다.

"비싼 수업료 내고 인생 공부 했다 생각하고, 계속 하던 일혀." 

70연승 비결, 알고 보니

왼쪽이 박슬기 관장이고 오른쪽이 한영진관장이다. 아주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폼을 잡았다. 이들은 요즘 체육관 파트너로서 함께 일하고 있다. 후진양성, 새로운 체육관 건립 등의 꿈은 박슬기 관장이 함께 하기에 꿈을 꿀 수 있다고 한영진 관장은 말했다.
▲ 파트너 왼쪽이 박슬기 관장이고 오른쪽이 한영진관장이다. 아주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폼을 잡았다. 이들은 요즘 체육관 파트너로서 함께 일하고 있다. 후진양성, 새로운 체육관 건립 등의 꿈은 박슬기 관장이 함께 하기에 꿈을 꿀 수 있다고 한영진 관장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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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6세에 무에타이 선수를 은퇴했다. 10년 전, 무에타이 체육관을 안성에 냈다. 평소 그의 성실성을 인정하던 지인들이 십시일반 빌려줬다. '후진양성과 경제적 해결'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의 이름으로 '팀한스'라는 프로팀도 창단했다. 여기에서 우리도 알만한 선수들(김세기·김내철·명현만 선수 등)이 대거 배출됐다.

그는 링 밖에서 인생과 한판 승부를 걸었다. 새벽에 홍보포스터를 붙이러 다니고, 땀 흘려 후학을 가르쳤다. 링 위의 파이터 정신이 링 밖에서도 통했을까. 2년 만에 빚을 청산했다. 안성 사람들을 자신 만큼 많이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오죽하면 관원들 입관원서(A4용지)를 쌓았더니, 2m 높이로 다섯 뭉치가 나오더란다.

체육관의 번창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프로 선수 생활 15년 동안 식사 시간·취침 시간·운동 시간 등을 1분도 어기지 않았다고 했다. 70연승의 비결은 이것이었다. 바로 철저한 자기관리.

후진들에게 그는 늘 말한다고 했다. "나는 무에타이에 미쳤었다, 인생에 한 번은 무언가에 미칠 기회가 올 거다, 그때 맘껏 미쳐라"고.

앞으로 그의 꿈은 '첫째도 후진양성, 둘째도 후진양성'이라고 했다. 자신을 무에타이로 인도해준 그의 스승처럼 자신도 누군가에게 멘토가 되고 싶은 게다.


태그:#무에타이, #한영진, #이종격투기,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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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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