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정치인만큼 욕을 많이 먹는 집단이 또 있을까요?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나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나 정치인 욕하기는 최고의 안줏거리입니다. 정치인이 존경받지 못하는 나라이기 때문인지 누구도 막상 정치인이 되기 직전까지는 정치인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쉽게 밝히지 못합니다.
아니 정치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순간부터 욕을 먹기 시작하는게 더 맞겠네요. 때문에 선거에 출마하는 경우에도 후보등록에 임박해서야 출마를 공식적으로 밝힙니다.
과도하게 후보자의 활동을 제약하는 공직선거법 탓도 있겠지만,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을 일찍 밝히는 것은 자신이 가진 패를 먼저 보여주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야권으로 분류되는 시민사회나 진보진영 인사들이 정치에 뛰어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사회 전반에 걸친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 때문인지 남이 등을 떠밀지 않으면 스스로 정치를 하겠다고 먼저 나서는 일도 흔치 않은 일입니다. 깜이 안 되면서 정치를 하겠다고 설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괜찮은 사람들 중에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겠지요.
문재인, 안철수 두 대권 후보가 그랬듯이 시대의 요구, 국민의 부름에 역사적 소명의식으로 응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하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시대적 ·역사적 책무를 거절하지 못하여 순교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처럼 비쳤지요.
그런데 서울시장을 1년 6개월 지낸 박원순은 완전히 다릅니다. '정치가 즐겁다'고 고백하듯이 말합니다. 시민 사회운동 혹은 진보 진영에서 활동하다 정치인(국회의원이나 시장, 도지사)이 된 사람들 중에 박원순 시장처럼 정치가 즐겁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신선한 충격입니다.
박원순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민운동이나 사회운동을 10년 이상 하고 나면 정치에 뛰어들어 세상을 바꾸는 즐거움을 누려봐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정치를 하라!서울시장이 되기 전 여러 강연에서 박원순 시장이 "젊은이들이여 고향으로 돌아가 시의원이 되고, 시장이 되라"고 하던 때가 생각나더군요. 그때만 해도 박 시장은 자신은 시민사회 영역에 남을테니 당신들은 풀뿌리부터 지역을 바꾸는 정치를 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해보니 정치가 즐겁다며 정치를 시작하라고 노골적으로 선동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 서론이 길다보니 책 소개가 늦었습니다. 지금 전 <정치의 즐거움- 오연호가 묻고 박원순이 답하다>(오마이북)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 취임 1년 6개월, 일찌감치 서울시장 재선 출마를 선언한 박원순 시장의 2014년 선거를 1년 앞둔 절묘한 시점에 나온 책입니다.
그러나 정작 인터뷰를 시작한 시기는 2012년 대선이 끝난 직후 진보개혁진영이 멘붕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은 48%의 유권자가 멘붕에 빠졌다고 질문하자 시민운동을 하는 30년 동안 늘 희망을 이야기 하던 활동가 출신답게 "위기가 곧 기회다"라고 하는 뻔한 이야기를 그는 박원순 버전으로 새롭게 들려줍니다.
"어떤 전쟁이나 정치적 싸움이 있을 때, 굉장히 소수이거나 불리해 보이는 사람들이 이기는 경우가 많아요. 상황이 어렵고 절박하니까 오히려 힘을 내고 비상한 방법들을 생각해냈기 때문이에요. 반면 유리한 상황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지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본문 중에서)물론 소수이거나 불리해 보이는 사람들이 이기는 경우에는 늘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새로운 의욕이 솟구치고 희망이 불끈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쩌면 당신도 책을 덮을 때쯤이면 뭔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오를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랬습니다.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언론의 역할이 열악해져 잘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박원순 시장이 취임한 지난 1년 6개월 동안 서울시에는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컨대 노숙자 리스트 작성, 서울시민복지기준선 마련, 민생침해 시민참여센터 '눈물그만' 운영, 뉴타운 출구전략 만들기, 마을공동체만들기, 협동조합만들기, 보도블록 혁신 같은 일들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박원순 시장이 이사장을 맡은 서울시립대는 반값 등록금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고, 전국 최고수준의 정보공개와 시민참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시민과 소통하고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내며 협력하는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대선의 화두가 되었던 새 정치에 대해서도 박원순 시장은 "소통과 참여, 거버넌스입니다.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하는 행정, 위키피디아식 행정"이라고 분명하게 정리해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특별한 서울시민의 복지
또 박원순 시장은 보편적 복지, 최소한의 복지 기준선을 마련하여 서민에게 기본적인 삶의 질을 보장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으며, 차근차근 실천해가고 있다고 합니다. 서울시 공무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던 시장이 박원순 이전에도 있었을까요?
"서울 하늘 아래서 단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단 한 사람이라도 한뎃잠을 자서는 안 된다. 단 한 사람이라도 끼니를 걸러서는 안 된다."(본문 중에서)이런 생각에 뿌리를 두고 만든 서울시의 실천 목표가 바로 서울시민복지기준선입니다. 주거, 건강, 교육, 돌봄, 소득 5개 영역에서 최소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복지기준을 담았는데,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복지기준이라고 합니다.
"주거 영역의 경우에는 임대료 비중이 소득의 30%를 넘지 않고, 주거 공간을 43제곱미터 이상 확보할 수 있도록 한다.......또 돌봄 영역에서는 영유아 장애인 등 돌봄이 필요한 시민들이 가구소득의 10% 이내의 지출로 주거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본문 중에서)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옛말이 있는데, 전혀 다른 의미에서 앞으로 대한민국의 지방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될 것 같습니다. 원래부터 서울이 잘 사는 도시였는데, 복지수준까지 전국에서 가장 높은 도시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한편 정말 시민운동가 출신 서울시장답다는 생각이 확 드는 대목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 정책에 반대하는 민원인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보통 공무원들은 시정에 대한 시민단체의 반대를 '행정에 대한 발목잡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데 시민운동을 했던 서울시장은 공무원들에게 새로운 접근 방식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안이나 정책에 대해 문제제기가 있으면 그것을 가장 반대하는 사람을 먼저 만나세요. 그러면 문제의 본질에 빨리 접근할 수 있고 해법도 보일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어떤 사안이나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만나서 소통하고 해결책을 함께 찾아보라는 주문입니다. 처음엔 더디게 보일지 몰라도 가장 반대하는 사람만 설득할 수 있거나, 합의안을 마련하면 정책 추진은 훨씬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책을 읽는 동안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시장 한 사람만 바뀌어도 서울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민주당이 다수인 서울시의회가 민주당 소속 시장을 든든하게 뒷받침을 해주고 있는 것이 큰 차이라고는 하지만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김두관 전 경남지사의 도정과 너무나 크게 차이가 납니다.
박원순 시장은 민주개혁 진보진영에서 그동안 배출했던 다른 어떤 정치인과도 비교해도 분명히 결이 다른 철학과 비전을 가진 정치인입니다. 백성을 잘 살게 하는 정치를 꿈꾸었던 조선후기의 실학사상 혹은 동학사상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요?
박원순 시장에게는 서울시장 재선이 당면한 과제입니다만, 2012년 12월 48%에 속했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박원순 시장이 재선을 지나 다음 대선에서 야권의 대표 선수로 나설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화두 던진 박원순 시장, 기대된다
물론 예상했듯이 대담에 나선 오연호 대표가 던진 질문은 살짝 피해 갔습니다. 그러나 <정치의 즐거움> 책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은 '결코 피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집니다. 이른바 정치 9단으로 불렸던 양김 대통령을 비롯해 역사상 누구도 정치를 즐겁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따라 갈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타고난 정치인도, 노력하는 정치인도 정치가 즐겁다고 말하는 박원순 시장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시장 출마를 앞두고 안철수 의원과 담판을 지을 때 박원순 시장은 '나는 (마음의)준비가 끝났다'는 말로 단일화를 성사시켰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승리한 것은 민심의 파도에 올라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민주당이나 새누리당은 거대한 항공모함이지만 민심의 파도를 거슬렀고, 자신의 민심의 파도를 탔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의 염원과 소망을 충실하게 따르면 순항할 수 있고, 만약 거스르면 아무리 큰 조직이라도 하찮은 먼지처럼 가라앉겠죠." (본문 중에서)<정치의 즐거움>을 읽는 내내 새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갈망은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났지만, 정작 새 정치의 구체적 실체를 국민들에게 보여주면서 민심의 파도를 타고 있는 사람은 박원순 시장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책에 박원순 시장이 지금 우리 사회는 시대의 화두를 둘러싸고 정치인, 행정가, 시민사회, 언론이 모두 경쟁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물론 정치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세력이 서로 경쟁하고 있다는 주장 역시 맞는 말입니다. "정치는 새로운 시대의 화두를 잡고 그것을 세밀한 정책으로 실천해내는 일입니다. 저는 과거 시민운동을 할 때도 넓은 의미에서는 정치인이었어요. 시민들의 요구를 잘 파악하고 실천해서 사회변화로까지 만들어내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정치인이었고 월급 없는 공무원이었고 공적 지식인이었죠." (본문 중에서)박원순 시장이 '정치가 즐겁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과 닿아 있을 것입니다. 시민운동은 공적인 권위나 힘이 없는 상태에서, 권력이 없는 상태에서 시대의 요구를 통찰하고 실천하는 어려운 일이지만, 정치는 그보다 훨씬 쉬운 일이라는 것이겠지요.
박원순 시장은 스스로 과거에도 정치인이나 다름없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미 박원순 시장은 전업정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시대의 화두를 둘러싼 여러 세력의 경쟁보다 더 큰 관심이 쏠리는 것은 차기 대선주자들이 벌이는 선의의 경쟁입니다.
이미 좁게는 2017대선을 앞두고 야권과 안철수, 문재인 의원을 비롯한 야권 정치인들 역시 시대의 화두를 둘러싸고 서로 다시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박원순 시장이 먼저 '상대가 누구라도 좋으니 시대의 화두를 놓고 정정당당하게 겨뤄보자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책을 덮은 후에 다시 생각해보아도 이런 저의 상상이 지나치지 않았다는 확신이 듭니다.
지난 2011년 박원순 후보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했을 때, 대학시절부터 함께 모임을 해오던 친구들과의 계모임 곗돈 500만 원을 몽땅 박원순 펀드에 투자했습니다. 이미 원금은 모두 돌려받았지만 박원순식 서울시정을 통해 한국사회를 바꾸는 투자수익은 끝없이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2014년에도, 2017년에도 박원순 펀드에 투자하여 원금뿐만 아니라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나라', '공동체가 회복되고 국민의 복지수준이 높아지는 나라', '평화를 기반으로 남북이 공존하는 나라'를 이자로 톡톡히 돌려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포스팅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