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약 1400개 도시 시장들의 모임인 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ICLEI)에서 제게 회장직을 제안했는데, 제가 일단은 초선이고 서울시를 제대로 바꾸는 일에 집중할 필요가 있어서 사양했어요. 그 대신 산하에 있는 기후변화세계시장협의회(WMCCC) 의장을 보기로 했습니다."어느 선진국의 시장 얘기가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 서울시장, 박원순이 인터뷰에서 직접 한 얘기다. 메이저 언론에서 보도해주지 않으니 대부분의 국민들이 알 도리가 없다. 별 것도 아닌 행사나 사건을 호들갑 떨면서 홍보하는 자치단체장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일까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기자는 '오연호가 묻다' 시리즈에 박원순을 초대했다. 신간 <정치의 즐거움-오연호가 묻고 박원순이 답하다>는 그렇게 탄생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됐고 총 300페이지 남짓, 반나절이면 읽을 수 있다. 이 책이 잘 읽히는 이유는 오 기자의 글 솜씨도 한몫 하지만, 읽는 내내 내용 하나하나가 참 유쾌, 상쾌, 통쾌하다. '(인생을)고민할 게 아니라 박 시장님처럼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하는 구체적 행동 지침 같은 것이 절로 생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에 대한 혐오를 느끼는 독자들께 일독을 권하고 싶다.
고건 시장 시절 6조 원이던 서울시의 빚이 이명박, 오세훈 등 두 전 시장을 거치면서 20조 원으로 불어났지만 "과거를 탓하지 말자. 현재와 미래는 지금 우리의 책임이다"라는 자신의 철칙에 따라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추구한다는 박 시장은 할 일도 많은데 네 편 내 편 따질 시간이 없단다.
뉴타운 출구전략, 시립대학 반값등록금, 보도블록 개혁, 비정규직 직원 정규직화, 노숙자리스트 만들어 동절기에 보살피기, 미분양된 아파트 팔기, 마을공동체 만들기, 협동조합 만들기, 사회적 기업 만들기, 서울시에 새로이 25개 과를 새로 만들거나 확 바꾸기(정보공개정책과, 마을공동체담당관, 임대주택과, 재생지원과, 사회적 기업과 등이 신설되었다고 한다), 원전하나 줄이기 사업, 공립 어린이집 매년 100개씩 늘려가기, 서울시 정보공개하고 빅데이터사업과 연결하기 등 박 시장은 자신의 취임 슬로건인 '(시민들에게)내 삶을 바꾸는 첫 번째 시장'으로 남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 중이다. 불과 1년 6개월 만에 수 많은 일들을 추진하고 성공시킬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농촌 출신으로서 배운 삶의 지혜가 있단다.
"농촌 사람은 왜 근면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농촌에서 살아보면 아는 건데, 하늘을 상대로 사기를 칠 수 없거든요." 농사라는 일이 제때에 제대로 일을 해야 수확이 가능하기 때문에 성실할 수밖에 없는 농부의 삶을 지켜본 자식들은 인생을 낭비할 수 없다는 얘기다. 어둑한 저녁까지 부모님의 추수 장면을 목격하면서 울컥했다는 박 시장은 그때부터 말썽쟁이에서 열심히 자신의 인생을 꾸릴 줄 아는 소년으로 변해갔다고 한다.
"구한말 위정척사 운동을 벌였던 면암 최익현 선생을 통해 위대한 애국심과 시대의 통찰력을 배웠다"는 박 시장은 백 년 앞을 내다보는 역사의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당장 내 임기나 내 생에 뭔가 이루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근시안적 결과지상주의에 경종을 울린다.
"서울시의 어마어마한 랜드마크는 역사입니다. 서울은 600년 동안 조선의 수도였고, 500년 동안 한성 백제의 수도였습니다." 서울의 땅 밑에 어떤 역사적 문화유산이 숨어있을지 궁금해서 복원해 보고 싶어 하는 박 시장을 보면서 여태 그런 시장이 한 분이라도 있었던가 궁금해진다.
'정치적 인간 박원순'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누구일까. <전태일평전>의 저자이자 인권변호사의 대부이기도 했던 고 조영래 변호사라고 말한다. 그가 폐암으로 병상에 있던 시절 박 시장에게 "박 변호사, 이제 돈 그만 벌고 해외로 나가보지"라고 권유했고, 박 시장은 당시 권유를 계기로 외국의 시민사회를 돌아보고 시민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고.
'고위공직자, 국회의원을 할 사람은 10년 정도 시민운동 해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박원순 시장은 30여년을 시민운동가로 일했다. 참여연대,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등의 설립자인 그는 우리 사회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미 아름다운 사람이다.
노숙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조사해서 리스트를 만든다거나 보도블록 십계명을 만들 정도로 그는 낮은 곳으로 또 그동안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하찮게 여겨지던 것들에도 천착하면서 새로운 정치인이자 시장으로의 이력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정밀행정, 트위터 행정, 휴먼터치행정 등의 수사가 그저 수사로만 그치는 것이 아닌 지난한 작업을 통한 귀결임을 이해할 수 있다.
"제가 추구하는 새 정치의 핵심은 소통과 참여, 거버넌스(Governance, 공공경영)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민과 전문가, 공무원이 함께 하는 이른바 공공경영으로 자신의 철학을 관철하고 있다. 특히 공무원들을 대하는 태도, 보수적일 것으로 판단되는 단체나 집단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설명 등에도 귀 기울일 만하다. 오세훈 전시장은 '무능한 공무원 3% 퇴출'로 사회적 논란을 낳았다는 설명에 코웃음이 나온다. 결국은 오 전 시장 자신이 퇴출됐기 때문이다.
회의석상에서 잘 하지도 못하는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직원들 문상에 반드시 참석하고, 시장 집무실에 직원들 가족을 초대하고, 정규직 공무원으로 전환되는 분 가슴에 '공무직'이라는 명찰을 달아주며 주체없이 눈물을 흘리는 박 시장을 얼마 전부터는 '우리 시장님'으로 부르는 공무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이제까지는 잘 없던 일이라고 한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그의 시장으로서의 포부는 너무 원대해서 요원해 보였을 정도였다. 뉴욕이나 파리, 런던의 시장들이 공무원들을 데리고 서울로 배우러 오게 하겠다니 말이다. 그런데 인터뷰 내용을 읽으면서 곧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세계 주요도시의 경쟁력을 비교한 자료들을 보면, 서울의 경쟁력은 10위권인데 복지나 삶의 질 측면에선 70위권입니다. 삶의 질과 복지에서도 경쟁력을 높여야 합니다"라는 현실을 그가 직시하고 있고, 인터뷰 내내 경쟁력을 업그레이드할 획기적인 아이디어들이 넘쳐서 일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그의 결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을 걸으면서 시대의 요구와 저의 행보를 깊이 고민했기 때문에 생각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어요."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전 지지율 5%였던 박 시장의 당시 심경이다. "(제가) 시대가 요구하고 시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금방 한계에 봉착했겠죠"라는 자평은 자신감의 발로다.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백년의 일정이 담겨있는 달력을 보며 미래를 설계하는 시장, 어떤 행정이든 반대하는 시민들이나 단체들을 먼저 만나 협의하는 시장, 좌우나 빈부를 가르기는커녕 철저하고 꼼꼼하게 아우르는 시장, 세상에 산처럼 쌓인 서류를 솎아내고 묶어내는 파일링, 스크랩이 자신의 취미이자 오락이라는 시장(모 TV 버라이어티프로그램에 출연해 드럼이 취미라며 드럼세트 앞에 앉은 모습을 보인 전 시장과 비교해보라), 백두대간 종주 당시 속리산에서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 비가 시민들의 눈물인 것 같아 펑펑 울었다는 시장이 지금 대한민국 서울시장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