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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박원순. 소문은 사실이었다. 기자는 박원순 서울시장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일화'는 여러 곳에서 들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박원순 시장이 시민운동 할 때, 상근자들은 야근을 불사하며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야근을 마치고 퇴근했다 다음날 출근하면 상근자들의 컴퓨터에는 빼곡하게 적힌 메모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밤사이 박원순이 생각한 아이디어를 상근자들의 컴퓨터에 일일이 붙여놓은 것이다.

물론 그 메모를 소화하는 것은 상근자들의 몫이다. 지독한 워크홀릭, 상근자들의 스트레스 가속기.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가 만난 서울시장 박원순은 역시나 이런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목부터가 남다르다. <정치의 즐거움>이라니. 도대체, 정치가 뭐가 그리 즐겁단 말인가? 책장을 넘기면 더 가관이다. 취미가 '스크랩'이란다. 오 기자와 인터뷰 하는 와중에도 그의 책상에는 사나흘 정도 걸려야 정리가 되는 서류뭉치가 쌓여 있다. 그런데도 그는 "신난다"고 한다. 이쯤 되면 병이라 할 만하다. 그의 넘치는 아이디어와 취미에서 비롯되는 무수한 일감을 넋 놓고 보고 있을 서울시 공무원들이 안쓰럽다.

보도블록에 집착하는 남자, 박원순

<정치의 즐거움> 책표지.
 <정치의 즐거움> 책표지.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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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렇지. 공무원들도 반발하긴 했나 보다. 참다 참다 한 공무원이 시장에게 "박원순 시장이 들어오면서 야근이 늘어났다.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은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는 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상명하복의 기풍이 살아 있는 공무원들이 항의 메일을 보낼 수밖에 없는 사람. 바로 박원순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1년 10월 보궐선거에서 승리해 취임했다. 일한 기간은 1년 반 가량. 그 짧은 시간 동안 박 시장에 대한 업무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다. 전임 시장들은 하나 같이 굵직굵직한 토건사업에 집중했다. 하지만 박 시장은 낮은 곳부터, 생활 의제부터, 전임 시장이 벌인 일의 '설거지'에 집중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시 보도블록 사업이다. 전임 시장은 '세빛 둥둥섬'이나 '아라 뱃길', 대규모 '뉴타운' 사업 같이 스펙터클한 초대형 블록버스터 프로젝트를 추진했는데 그깟 보도블럭이라니? 그 집착도 남다르다. 전임 시장 시절 서울시 대형 프로젝트를 총지휘했던 공무원을 '보도블록혁신단장'으로 임명했다. 이쯤 되면 '좌천'소리가 나올 만도 한데 들어보니 그게 아니다.

4명이 관리하던 보도관리팀을 확장해 보도환경개선과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5개 팀이 있고, 보도블록 문제만 전담하는 보도정책팀과 보도관리팀에 15명의 공무원이 있다. 보도블록혁신단장은 통상 4급이 맡는 다른 과와 달리 3급 국장이 맡고 있다. 시장 방 입구에는 보도블록 견본 23개가 진열대에 가지런히 전시돼 있고, '보도블록 10계명'까지 등장했다.

박 시장이 이토록 집요하게 보도블록에 집착한 이유는 여기에 "한국전쟁 이후 60여 년간 지속돼온 잘못된 관행"이 집약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덕분에 서울시 도시안전실장은 자비로 일본까지 가서 보도블록 정책을 관찰해야 했고, 담당자들은 주간 단위로 보도블록 정책 실행 여부를 보고해야 했다.

그가 전임 시장과, 아니 다른 정치인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런 점이다. 오랫동안 시민운동의 상징처럼 살아왔던 그에게는 '전시행정'이 아니라 '체험행정', '참여행정'이 몸에 배어있는 듯했다. 큰 건물을 짓기보다 마을을 만들고, 뉴타운의 파국적 결말을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직접 사무실을 옮겨가며 출구전략을 짜고, 전시실로 배정되었던 신청사 지하를 '시민청'으로 만드는 사람.

최근 오마이북이 내놓은 <정치의 즐거움>에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주말을 이용해 서른 시간 나눈 대담이 담겨 있다
 최근 오마이북이 내놓은 <정치의 즐거움>에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주말을 이용해 서른 시간 나눈 대담이 담겨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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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대통령도 안 하는 반값등록금 정책을 당선되자마자 서울시립대 반값등록금으로 실현해 내고, 논란만 거셌던 무상급식을 보란 듯이 실천해 보이는 추진력까지 있는 사람. 오연호가 그려낸 박원순의 모습이다.

정치가 즐겁지 않으면 떠난다?

오연호 대표기자는 대선 패배 후 '멘붕'에 빠져 있을 48% 사람들에게,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알고 보니 '일베'였다는 사실에 경악한 더 많은 사람에게 '그래도 제대로 된 정치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게다.

오연호가 만난 박원순 시장은 "시민참여 행정 실험, 마을공동체 만들기, 역사도시 보존과 활용, 시민 삶의 질 확보, 협동조합 지원, 원전하나 줄이기 등" 서울시가 역점을 두고 있는 일들이 "시대의 요구이자 화두"이면서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도 들어맞기 때문에 "신이 난다"고 표현한다. 그러고서 "재미가 없어지면 그때는 떠난다"고 단언한다. 이 책의 제목인 <정치의 즐거움>이 무엇을 말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오연호가 그려낸 박원순의 주위에는 나쁜 사람이 없다. 자신의 책임이 아닌데도 자신에게 항의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더 치밀한 정책을 짤 수 있게 해주니 "고맙고", 그를 반대할 만도 한 재향군인회 행사에서도 박수를 받는다. 정치가 그렇게 신나고 즐거울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정치가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인터뷰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국정원의 댓글 공작 대상에는 박원순 시장도 포함되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검찰이 국정원의 문서가 아니라고 발표했지만, 국정원 직원의 실명과 전화번호까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던 문건의 목표는 '박원순 서울시장 제압'이었다. 한 언론은 박 시장의 정책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음해하는 수만 개의 댓글이 국정원 쪽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을 찾아내기도 했다.

정책 반대야 박 시장의 표현처럼 정책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지만, 악의적인 공세는 정치를 즐겁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박 시장이 추진하는 여러 사업이 성공적일수록, 시민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을수록, '공작 정치'는 더 노골적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그래서 걱정이다. 그가 이런 진흙탕에서 재미없어 질까봐. 그래서 떠날까봐.

그의 야심, 말이 아닌 실천으로 드러내야

박원순 시장은 벌써부터 차기 대권주자를 거론하는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물론 소위 야권 성향의 이들에게도 박원순 시장이 항상 좋은 평가만 받는 것은 아니다.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마을공동체 사업에 이런 저런 비판이 없지 않고, 최근 재추진을 결정한 경전철 사업에 대해서도 '토건종식' 선언과 배치되는 선거용 사업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다. 선거를 무시할 수 없는 정치인의 한계상, 그 역시 뭔가 큰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도 여전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4일 오후 2시, 서울시청에서 기자설명회를 열어 9개 노선, 총 85.41km의 경전철 건설 계획을 담은 '서울시 도시철도 종합발전방안'을 발표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4일 오후 2시, 서울시청에서 기자설명회를 열어 9개 노선, 총 85.41km의 경전철 건설 계획을 담은 '서울시 도시철도 종합발전방안'을 발표했다.
ⓒ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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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시장이 이런 저런 장애물을 넘어서, 그의 야심대로 서울을 세계 최고의 행복도시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의심을 거두게 하는 실천을 보여줘야 한다. 그는 분명 '선거용 정치인'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오세훈 전 시장보다 '조금 덜' 잘생겼고, 맞수 나경원보다 '조금 덜' 말을 잘했다.

실제 '얼마나 시정을 잘 이끌 수 있느냐'와는 별개로 선거에서는 주로 잘생기고 말 잘하는 사람이 당선하기도 한다. 안철수 의원의 양보가 아니었다면 시장이 아닌 낙선한 '시민운동가 박원순'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저런 상황과 조건은 그를 시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평가는 역대 시장과 비교했을 때 좋은 편이다. 지독한 일 중독자, 넘치는 아이디어를 주체하지 못하는 에너자이저 박원순은 실무형 시장이다. 그는 이런 저런 비판과 의혹, 향후 행보에 대한 의심을 화려한 정치적 언변이 아닌 잔잔한 실천으로 넘어야 한다. 

조건은 좋다. 박원순은 서울시장 당선 이후 전임 시장이 벌여놓은 일의 '설거지'에 탁월한 면모를 보여줬고, 한국 정치는 지금도 설거지가 필요한 접시들을 차곡차곡 쌓고 있다. 어느 때보다 이미지 마케팅이나 댓글 조력이 아닌, 실제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실무형 정치인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저런 의심에도 그의 가치가 계속 빛을 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만 걱정되는 건, 공무원들의 고된 노동강도다. 그러나 그들도 박원순 시장을 따라 '정치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최소한 '인권침해'는 아니지 않을까?


태그:#박원순, #정치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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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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