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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수용소 유엔군 기간병들이 이를 잡고자 포로들에게 디디티를 살포하고 있다(거제포로수용소, 1952. 5.).
 포로수용소 유엔군 기간병들이 이를 잡고자 포로들에게 디디티를 살포하고 있다(거제포로수용소, 1952. 5.).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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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포로수집소

"이 동무 아딕도 자고 있네."

준기는 그 말소리에 어슴푸레 잠이 깼다. 준기가 두리번거리며 겨우 정신을 차리자 어느 검문소 유치장 안이었다. 준기가 언저리를 살피자 자기와 비슷한 몰골의 청년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다. 준기 눈에도 그들이 인민군 패잔병으로 보였다.

"여기가 어디야요?"
"장평 삼거리 검문소 유치장이라우."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윤성오 상등병이 대꾸했다. 유치장 내 포로들은 모두 같은 처지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날 저물 무렵 스리쿼터(4분의 3톤) 트럭이 오더니 무장한 국군 헌병 두 명이 검문소 유치장에 갇힌 그들 다섯 명을 뒤에다 싣고 원주 시내 한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유엔군 측에서 임시로 만든 포로수집소였다. 그들은 한 교실에 수용됐다. 그날 밤 포로 신문관이 연행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내어 신상을 캐물었다. 그는 계급장도 없는 모자를 쓴 한국인으로 미제 야전 잠바를 입고 있었다.

"이름은?"
"김준기입네다."
"부대 소속은?"
"조선인민군 제3사단 야전병원입네다."
"입대 전 직업은?"
"학생입네다."
"어느 학교 다녔어?"
"펭안북도 넹벤 농문둥학교 3학년…."
"중학생으로 입대했구먼."
"기래습네다."

"야, 김준기! 넌 지금 이 시간부터 포로야."
"…."
"저기 가서 신상명세서 숨기지 말고 써!"
"…."

가마니에 덮인 시신

포로들의 긴 행렬(1950. 10. 16.).
 포로들의 긴 행렬(1950. 10. 16.).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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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기는 포로신문관이 준 신상명세서를 말없이 받아 교실 바닥에 앉아 빈칸을 다 메웠다. 포로 신문이 끝나자 늦게야 저녁밥이 나왔다. 된장국 한 그릇과 밥 한 공기 그리고 단무지 세 조각이었다. 조악한 꽁보리 잡곡밥이었지만 준기에게는 환장할 만큼 맛있는 밥이었다. 준기가 제대로 된 밥을 먹어본 지 일주일은 더 된 것 같았다. 그 즈음에는 감자나 옥수수 아니면 칡뿌리나 야생 열매·메뚜기·개구리·뱀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으며 주린 배를 채웠다. 그날 잡힌 포로들은 모두 같은 처지라 죄다 며칠 굶은 사람들처럼 국물 한 방울, 밥알 한 알 남기지 않고 밥그릇을 핥았다.

"오늘이 메칠입네까?"
"아마 10월 22일 거야요. 어제 삐라를 주워보니까 그새 남조선 국방군들이 벌써 평양에 진주했대요."
"발쎄?"
"그런 모양입네다."

팔에 붕대를 감은 한 사내가 말했다. 준기는 더운 국물이 입안에 들어가자 조금 생기가 돌았다. 그날 밤 포로들은 허름한 모포 한 장씩 지급받았다. 준기는 가마니를 깐 교실 바닥에 모포 한 장으로 반은 깔고 반은 덮고 눈을 감았다. 옆자리 윤성오 상등병도 그제야 기운을 좀 차린 듯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조용히 말했다.

"내레 조금 전에 보초의 호위로 뒷간을 가면서 보니까 뒤편 가마니에 덮인 시신이 남 대장 이야요."
"네에!"
"살아남은 우리는 죄인입네다."
"기렇구만요."

준기도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소리 없이 울었다. 비로소 준기는 그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구운 감자

준기가 동피골 동굴에서 남 대장과 윤 상등병과 함께 이틀 밤을 보낸 다음날이었다. 그날은 동피골을 따라 오대산 정상 비로봉에 오른 뒤 거기서 본격적으로 북행할 계획이었다. 그들은 여러 날 날감자만 먹자 입에서 구역질이 났다. 그래서 준기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언저리에서 솔잎과 마른 소나무가지, 그리고 마른 싸리가지를 주워 불을 피운 뒤 그 잿물에다가 감자를 구웠다. 그날 아침, 세 사람이 그 구운 감자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구운 감자를 먹으니까 아주 살 것만 같구만. 뱃속에서도 대환영이야. 김 동무 수구햇수다래."

남 대장은 흡족한 얼굴로 준기를 칭찬했다.

"긴데 국방군 아새끼들이 이 연기를 보지 않았을지 모르갓구만. 내레 빨치산 시절 왜놈 사냥개 토벌대 아새끼들은 개코요, 솔개 눈깔이엇디. 거 개새끼들은 냄새도 개처럼 잘 맡고, 연기도 귀신 같이 찾아내더라구. 기때 우리 항일동디들이 밥해 먹다가 많이들 희생됐디. 자, 이제 날래 출발하자구."
"네."

김준기와 윤성오가 막 자리에 일어나 떠날 차비를 마쳤다. 그때 요란한 엠원 총소리와 카빈 총소리와 함께 빗발치는 듯한 총탄이 동굴 언저리에 쏟아졌다.

토벌대의 기습

유엔군들이 서울을 수복하면서 공산군 부역 혐의자를 연행하고 있다(서울, 1950. 9. 26.).
 유엔군들이 서울을 수복하면서 공산군 부역 혐의자를 연행하고 있다(서울, 1950. 9. 26.).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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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예감이 적둥했군."

준기와 윤성오는 무척 당황했지만 남 대장은 오히려 태연했다.

"내레 죽을 죄를 졌습네다."
"이미 엎지른 물이야. 야, 침착하라우. 이럴 때일수룩 정신을 차려야 살아남을 수 있디."

남 대장은 이미 모든 걸 각오한듯 따발총에 비상용 탄창을 끼우며 말했다. 총은 남 대장밖에 없었다. 그때 빗발치던 총탄 소리가 잠시 멎더니 곧 앞 산등성이 쪽에서 확성기 소리가 났다.

"야, 인민군들! 너희들 목숨이 아까우면 빨리 손들고 나오라. 지금 너희들은 우리들에게 완전히 포위됐다."
"지금 너희들은 독안에 든 쥐다. 빨리 손들고 나오라! 그러면 너희들 목숨은 살려주겠
다…."

토벌대의 손 마이크 소리가 낭랑히 이른 아침 고요한 계곡의 정적을 깨트렸다.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정확히 10분간의 여유를 준다. 잘 생각해 보고 살고 싶으면 무기를 버린 뒤 두 손을 들고 동굴밖으로 나와 투항하라."

숲으로 빽빽하게 우거진 오대산 동피골 계곡(2013. 8. 5.).
 숲으로 빽빽하게 우거진 오대산 동피골 계곡(2013. 8. 5.).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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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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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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