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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 토요일 오전, 아무도 없는 <가디언>의 런던 킹스크로스 지사 사무실 지하에서 <가디언> 편집자와 컴퓨터 전문가가 앵글 그라인더(휴대용 전동 공구)와 드릴을 들고, 암호화된 파일이 저장돼있는 하드 드라이브와 메모리칩을 파기했다. 2명의 영국 GCHQ(정보통신본부) 관계자들이 이를 감시하면서 컴퓨터 회로판의 어느 부분을 공격해야 하는지 지시했다. 그들은 메모하고 사진을 찍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20일(이하 현지시간) 파기된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 사진을 공개했다. 이와 함께 전 세계를 뒤흔든 특종이 들어있는 문건을 자신들의 손으로 망가뜨릴 수밖에 없었던 보다 상세한 이유도 밝혔다.

<가디언> 앨런 러스브리저 편집장은 전날인 19일 칼럼을 통해 '스노든 특종' 이후 영국 정부로부터 2달간 지속해서 '스노든 문건'을 양도 혹은 폐기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결국 영국 정보기관인 GCHQ 보안 전문가 2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노든으로부터 건네받은 문건의 사본이 들어있는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를 파기했다고 폭로했다.

<가디언> "첫 보도 2주 후, 정부 관료 찾아와"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20일(현지시간) 공개한 파기된 하드 드라이브. 이 하드 드라이브에는 암호화된 '스노든 문건'이 저장돼있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20일(현지시간) 공개한 파기된 하드 드라이브. 이 하드 드라이브에는 암호화된 '스노든 문건'이 저장돼있었다.
ⓒ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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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에 영국 정부로부터 처음 압력이 들어온 것은 '스노든 문건' 관련 첫 번째 기사가 나간 지 2주 후였다. 6월 6일, <가디언>은 미국 고등법원이 미국 통신 회사인 버라이즌에게 고객들의 통신 기록을 넘기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이후 <가디언>은 미국 NSA(국가안보국) 인터넷 감시 프로그램인 '프리즘(PRISM)'의 실체를 폭로했고, 이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영국 GCHQ가 어떻게 활용했는지 파헤쳤다. 또한 6월 17일에는 영국 정보기관이 2009년 런던에서 열린 2번의 정상회담에서 동맹국을 감청·해킹했다고 보도해 큰 파장이 일었다.

곧 이어 2명의 영국 정부 고위 관료가 <가디언> 런던 지사 사무실을 찾았다. 그들은 앨런 러스브리저와 폴 존슨 부편집장을 만났다. <가디언>은 그들이 가디언이 갖고 있는 모든 '스노든 파일'을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고 전했다.

3주 후, GCHQ와 NSA의 인터넷·통화 감시에 대한 추가적인 보도가 나가자 정부가 다시 접촉을 해왔다. 지난번과 똑같은 2명의 관료가 다시 가디언 사무실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훨씬 단호한 태도였다. 이들은 <가디언> 보도에 대한 인내심이 다했다며 "재미를 봤으니 이제는 자료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가디언>은 이들이 외국 정부, 특히 러시아나 중국이 <가디언>의 IT 네트워크를 해킹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밝혔다고 전했다. <가디언> 측은 '스노든 문건'은 별도로 보관돼있으며 가디언 시스템 어디에도 저장돼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에 돌아온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정보기관 전문가는 이 문서가 (보안에) 취약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했다. 만약 우리가 작업했던 방에 플라스틱 컵이 있다면, 외국 요원들은 레이저로 컵의 진동을 측정해 우리가 무엇을 말했는지 알아낼 수 있다. 창문의 진동 역시 원격으로 모니터링된다."

"취재원-저널리즘 보호 위해 자료 파기"

<가디언>의 앨런 러스브리저 편집장은 19일(현지시간) '데이비드 미란다, 부칙 7조 그리고 모든 기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가디언>의 지하실에서 2명의 영국 GCHQ(정보통신본부) 보안 전문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드 드라이브를 파기했다"고 폭로했다.
 <가디언>의 앨런 러스브리저 편집장은 19일(현지시간) '데이비드 미란다, 부칙 7조 그리고 모든 기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가디언>의 지하실에서 2명의 영국 GCHQ(정보통신본부) 보안 전문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드 드라이브를 파기했다"고 폭로했다.
ⓒ 가디언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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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19일. 정부의 압박은 더욱 강해졌다. 전화와 만남이 이어졌다. 이들은 <가디언>에게 "법적 절차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경고했다. <가디언>의 변호사는 정부가 공공 비밀 보호법 등을 통한 법적 절차를 밟게 되면, <가디언>이 보도를 할 수 없게 되거나 강제로 자료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러스브리저 편집장은 "나는 영국 정부에게 미국과 브라질에도 사본이 있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면서 "하지만 그들이 법적 절차를 밟을 것이 확실해지자 영국에 있는 사본을 파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취재원 보호 역시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러스브리저는 "영국 정부가 스노든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알도록 돕고 싶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컴퓨터 기록을 통째로 넘기게 될 경우, 어떤 언론인이 그것을 보았는지 또 작업했는지 분석될 위험성도 있었다.

결국 러스브리저는 런던에 있는 사본을 파기하고 미국이나 브라질에서 보도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언론의 자유를 보장받는다. 1971년, 베트남전의 진실을 다룬 '펜타곤 페이퍼'가 미 법무부의 소송 끝에 언론을 통해 보도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가디언>은 7월 20일, 사무실 지하에서 자신들의 손으로 하드 드라이브를 파기하던 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것은 오랫동안 불편한 관계를 가져 온 언론과 정보기관의 독특한 만남이었다. 그리고 국가안보와 자유로운 표현에 대한 요구 사이의 매우 이례적이고 물리적인 타협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양측 모두 알고 있었다. 다른 사본이 영국 밖에 있다는 것을. 21세기 정부의 감시에 대한 보도는 계속되리라는 것을. 자료는 파기됐지만, 이것은 취재원과 저널리즘을 보호했다."

이후에도 <가디언>은 스노든의 문건을 토대로 미국이 GCHQ에게 도청업무의 대가로 자금을 지원했다는 내용 등 계속해서 '특종'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영국 정부가 <가디언>에서 스노든 문건 관련 보도를 하고 있는 글렌 그린월드의 연인 데이비드 미란다를 '테러법 2000' 부칙 7조에 따라 런던 히드로 공항에 9시간 동안 구금해 논란이 되고 있다. 정부 압력에 대한 <가디언>의 폭로는 이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미 백악관 대변인 "상상도 못 할 일"

한편, <가디언> 편집장의 폭로에 대해 미국 백악관 대변인 조시 어니스트는 "상상도 못 할 일"이라는 평을 내놓았다. 20일 일일 브리핑에서 어니스트는 '오바마 정부는 국가 안보 보호를 위해 미국 언론사에 들어가 언론사의 하드 드라이브를 파기할 수 있나'라는 질문에 이처럼 답했다. 미 정부는 전날에도 데이비드 미란다의 구금과 관련해 영국 정부로부터 구금 전 미리 내용을 전달을 받기는 했지만, 자신들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며 영국 정부와 거리를 뒀다.

미란다 구금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영국 정부는 테러법 적용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영국 내무장관 테레사 메이는 "만약 경찰이 누군가 그의 소지품이 매우 민감한 훔친 정보이고, 테러리스트를 도울 수 있으며, 누군가의 목숨을 잃게 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면 경찰의 행동은 옳다"고 말했다.

크리스핀 블런트 전 영국 교정 장관은 이날 '채널4'에 출연해 "테러 이슈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에 테러법을 적용한 것은 의회가 통과시킨 법에 불명예를 가져올 수 있다"고 비판했다.


태그:#가디언, #그린월드, #GCHQ, #스노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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