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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 금요일이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갈 곳은 바둥역이다. 이곳이 바둥이니까 바둥역이면 근처에 있을 거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이곳에서 자그마치 남쪽으로 100여km 더 가야 한다. 바둥이리고 하는 현이 그만큼 넓은 것이다. 우리가 있는 곳은 우리나라의 읍 소재지로 보면 된다. 읍 소재지에서 군 경계까지 가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이름만 보고 바둥역에 왔다가는 역에서 바둥 시내까지 다시 100여km를 더 가야 된다.

장준하 일행이 걸어서 온 곳은 바로 이곳 바둥까지였다. 이곳에서 사흘을 머문 후 5000톤급 군용선박을 타고 만현(萬縣)을 경유하여 8일 만에 충칭(重庆)에 도착했다. 그래서 우리도 공식적으로는 바둥에서 주행을 끝냈다. 장준하 일행처럼 양쯔강을 타고 충칭으로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배가 더 이상 다니지 않는다. 유람선은 있지만 오래 걸리고 요금도 매우 비싸다. 그래서 바둥에서 바둥역까지는 차를 대절해서 갔고 충칭까지는 기차로 갔다. 

대절했는데 말도 없이 사람을 더 태우네!

아침 나절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휴식을 취하면서 보냈다. 기차가 밤 12시경에 출발하다 보니 일찍 갈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점심을 여기서 먹은 후 천천히 출발하기로 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호텔 주변을 어슬렁대다 보니 선능자산림구역으로 가는 곳이라는 것을 알리는 한국어 광고가 눈에 띄였다. 따라가 보니 양쯔강 가에 큰 호텔과 상가가 있다. 한국어 광고가 있는 것을 보아 좀 더 하류에 있는 이창(宜昌)에서 출발한 배를 타고 와서 이 호텔에서 하루 묵고 선능자산림구역으로 가는 한국 관광객이 많은 것 같았다.

두 시쯤 어제 예약한 차가 왔다 길에서 자주 눈에 띄인 아주 작은 승합차 두 대다. 그래도 9인승이다. 대우 승합차 다마스를 닮았으나 조금 크다. 한 차에는 자전거를 모두 싣고 다른 차에는 우리가 모두 탔다. 그런데 가는 도중 우리에게는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한 할머니를 더 태운다. 바구니에 뭔가를 잔뜩 싸갖고 가는 이 할머니는 거의 옛날 우리 할머니들의 모습과 똑같았다. 우리와 한 2/3 정도는 같이 가다 아주 높은 곳에서 내렸다. 승합차가 도착하자 미리 알았는지 길가의 집에서 마중 나오는 모습이 아마도 딸네 집에 가는 것 같았다.

우리가 타고 갈 승합차. 대우 승합차 다마스보다 약간 크다.
 우리가 타고 갈 승합차. 대우 승합차 다마스보다 약간 크다.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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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둥 시내에서 바둥역까지 가는 길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그 어떤 길보다 더 경사가 심했다. 바둥 시내에서부터 급경사를 올라간다. 거기다 비까지 왔다.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여기도 자전거로 넘자고 했으면 분명 중도에서 그만 두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경사가 심했고 높았다. 바둥까지 오고 보니 우리도 지쳤고 더 이상 자전거 타고 가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을 것으로 생각해 바둥역까지 차로 가기로 결정한 것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할머니를 내려주고 한참 내려가 한 마을로 들어가더니 이번에는 자기 아내를 태우겠단다. 슈퍼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를 데리고 갈 시간이라나? 아무튼 비좁은 9인승 차에 8명이 계속 타고 온 셈이다. 저 멀리 산과 산을 연결하는 다리가 보였다. 운전기사가 설명하기를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다리라고 한다. 멀리서 보는 그 다리는 참으로 장관이었다. 울창한 두 산 사이 깊은 계곡 위로 현수교가 가로질러 놓여 있다. 그 길은 고속도로라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다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다리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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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기 위해 자전거를 가방에 넣다

다섯 시쯤 되어 바둥역에 도착했다. 역 입구에는 우리나라 포장마차 수준의 음식점이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근처 마을까지 나갔다 오기도 그렇고 해서 이곳에서 저녁을 먹으며 지루하게 무창에서 오는 오후 12시 기차를 기다렸다. 이 기차역은 3년 전에 개통했다고 하나 그렇게 깨끗해 보이지는 않았다.

기차역 입구에 공항에서나 봄직한 검색대가 있고 관리원도 서너 명이나 앉아있다. 도대체 이 나라는 가는 곳마다 검색하는 것 같다. 자전거를 그대로 갖고 들어가려 했더니 안 된다고 가로막는다. 그러면서 입구에 한자로만 적혀 있는 안내판을 보여주더니 자전거를 가방에 넣으라고 한다. "가방을 안 갖고 왔으면 어쩔 뻔했지?" 그냥 끌고 가면 편할 자전거를 다시 분해해 가방에 넣었다.

자전거를 둘러매고 안으로 들어가니 기차 칸과 칸 사이에 넓은 공간이 있어 자전거 6대를 넣으니 꽉 찼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이 기차에서 가장 좋은 4인실 침대칸이다. 다른 6인실 침대칸은 문이 없어 개방되어 있었으나 4인실에는 문이 있어 매우 쾌적했다. 기차표는 중국에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이미 예매를 했다. 1000km가 넘는 먼 거리였음에도 가격은 1인당 5만 원이 좀 안 되었다. 기차는 예정보다 늦게 다음 날 오전 11시가 다 되어 충칭북(重庆北)역에 도착했다.

장준하 일행은 임정요인이 환영, 우리는 부관장이 환영

쉬저우 츠카다 부대를 탈출한 지 5개월 24일 만인 1945년 1월 31일 오후 50여 명은 충칭 시내를 행진하며 그렇게 갈망하던 임시정부에 도착했다.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과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의 각료들이 감회에 젖어 그들을 맞이했다. 지청천 장군은 구한말 한국 무관학교 재학 중에 정부에서 파견한 유학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유학했다. 그러나 졸업할 때 한일합방이 되자 중위로 진급한 후 탈출하여 이름을 이청천으로 바꾸어 독립군으로 활동했다.

나라 잃은 슬픔에 환영회는 통곡의 장이 되었다. 중한문화협회에서 열어준 환영회에서 연합군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다수의 조선인이 쉬저우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6000리를 걸어 충칭으로 와 항일 광복군이 된 사건이 국제적인 보도로 취급되었다. 그 결과 조선인이 스스로 일본인이 되길 바란다는 황당무계한 일제의 말과는 달리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려 임시정부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기차에서 내리니 날씨는 매우 맑았다. 임시정부 청사 이선자 부관장이 교민신문 기자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어 그런지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우리도 장준하 일행처럼 도로를 행진해 가기로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표시를 한 차가 앞서 가며 길을 안내했다. 그러나 길이 자주 막혀 함께 가기가 힘들었다. 결국 우리가 앞서 가서 기다리다 차가 오면 다시 앞서 가기를 반복했다.

옛 광복군 사령부 건물. 일층엔 옷가게가 있고 이층부터는 완전히 폐허 상태로 남아있다.
 옛 광복군 사령부 건물. 일층엔 옷가게가 있고 이층부터는 완전히 폐허 상태로 남아있다.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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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광복군 사령부가 있던 미원식당이라는 곳으로 갔다. 식당은 이제 옷을 파는 가게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층부터는 3년 전에 들렀을 때와 똑같이 변함이 하나도 없었다. 복원도 전혀 되지 않고 건물은 거의 다 망가져 있었다. 다시 복원한다고는 하나 자료가 거의 없어 어렵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군대인 광복군 사령부를 제대로 복원할 수 없다니!

충칭북역에서 임시정부 청사까지는 12km 정도였다. 청사에 도착하니 오후 한 시였다. 이제 정말 끝났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장준하 선생을 추모하는 구국장정육천리 순례를 마쳤다.

순례를 마치며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순례를 마치며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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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포장할 상자는 그렇게 클 필요 없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 했나? 하지만 우리에게는 장준하 일행이 중국 목욕탕에서 우선 몸을 씻고 저녁 환영회에 간 것처럼 점심보다는 샤워가 먼저였다. 부관장이 청사 근처에 있는 호텔을 예약해 두어 우리는 여장을 풀고 샤워를 할 수 있었다.

그 호텔에서 함께 점심을 했는데 진수성찬이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장준하 일행을 환영한 것처럼 임시정부 청사 부관장이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우리가 오면서 먹었던 음식과는 모양과 질이 달랐다. 이런데 사용할 공금도 없었을 텐데…. 미안하면서 감사할 뿐이다.

당장 급한 것이 자전거를 다시 포장할 상자를 찾는 것이었다. 충칭이 원체 산에 건설된 도시라 언덕이 많아 자전거가 거의 없다. 다시 말하면 자전거 가게를 보기 힘들다는 뜻이다. 그래서 백화점으로 갔다. 물건을 싸 갖고 갈 수 있게 내놓은 상자들이 많이 있었다. 필요한 만큼 작은 상자들을 여러 개 갖고 왔다.

비행기를 이용해 자전거 여행을 할 때 항상 근처에 있는 자전거 가게에서 자전거를 포장한 상자를 얻어다 포장했는데, 자전거를 포장할 때 굳이 자전거 상자처럼 큰 상자가 없어도 됐다. 작은 상자를 접어 밑바닥을 깔고 주요 부분만 잘 포장하면 전체적으로 부피도 많이 줄어들고 안전하게 자전거를 포장할 수가 있었다.

덧붙이는 글 | 한국문화신문 게재



태그:#기차, #충칭, #바둥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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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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