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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봄 도서관' 맨 아래층이 이원수문학관이다. 사진의 아래 부분은 이원수문학관의 현관을 덧붙인 것입니다.
 '고향의 봄 도서관' 맨 아래층이 이원수문학관이다. 사진의 아래 부분은 이원수문학관의 현관을 덧붙인 것입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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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평산로 135번지 32에 있는 도서관은 이름이 특이하다. '고향의 봄 도서관'이다. 국립중앙도서관, 대구동부도서관 식의 이름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낯선 이름 붙이기이다.

하지만 그 이름이 전혀 낯설지가 않다. 도서관 현판을 보는 바로 그 순간 누구든지, 애국가보다도 더 많이 불린다는 이원수의 동시 <고향의 봄>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창원이 이원수의 고향인가? 그는 본래 경남 양산읍 북정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날짜는 1912년 1월 5일(음력으로는 1911년 11월 17일). 그러나 생후 10개월만에 창원읍 중동리 100번지로 이사했고, 거기서 10여 년을 살았다. 마산 오동동으로 옮겨가 살게 되는 것은 1922년의 일이고, 마산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26년 방정환이 발행하던 <어린이> 4월호에 <고향의 봄>을 발표했다. 그의 나이 불과 15세 때의 일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창원에 '고향의 봄 도서관'이 세워지고, 도서관 안에 '이원수 문학관'이 마련된 것은 <고향의 봄>의 무대가 바로 창원이기 때문이다. 태어난 곳은 양산이지만 생후 10개월만 그곳에 머물렀기에 정신적 고향으로 볼 수 없고, 그때 본 주위 산들의 풍경을 이원수가 기억해내어 노래했을 리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원수 본인도 글을 통해 '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읍이다. (중략) 그러나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 되어 곧 창원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에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 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이원수는 창원에서 아홉 살까지 살고, 진영에서 한 해 산 다음, 열 살 때 마산으로 이사를 와서 학교에 다니게 된다. 이 부분 중략) 마산은 바다와 산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고 회상하고 있다. 요약하면 <고향의 봄>의 무대가 창원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원수문학관 홈페이지부터 사전 답사를 해보니

창원으로 가서 이원수문학관을 보고 싶다. 하지만 답사를 하기 전에 사전 준비를 충실하게 해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책을 읽거나, 적어도 홈페이지가 있는 곳이면 그곳부터 사전 답사를 해야 한다. 그것도 어렵다면 인터넷 검색이라도 좀 해보고 떠나야 한다.

'이원수문학관'의 홈페이지를 보다가 깜짝 놀란다. 그의 경력을 소개하는 부분에 '1942년 <지원병을 보내며> 등 친일 작품 발표'라는 대목이 실려 있다. 이런저런 유명 인사들의 생가 등을 찾았을 때 단 한 번도 안내판에서 본 적이 없는 사실 그대로의 경력 소개가 낯이 설 지경이다. 게다가 그가 쓴 대표적 친일 작품 <지원병을 보내며>는 전문이 올라 있다. 

지원병 형님들이 떠나는 날은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거리고 소리높이 군가가 울렸습니다.

정거장, 밀리는 사람들 틈에서 손 붙여 경례하며 차에 오르는
씩씩한 그 얼굴, 웃는 그 얼굴
움직이는 기차에 기를 흔들어 허리 굽은 할머니도 기를 흔들어
"반자이" 소리는 하늘에 찼네
나라를 위하여 목숨 내놓고 전장으로 가시려는 형님들이여
부디부디 큰 공을 세워주시오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소원의 군인이 되겠습니다.
굳센 일본 병정이 되겠습니다.

1976년, 사당 자택에서 집필 중인 모습. 이원수문학관 게시 사진입니다.
 1976년, 사당 자택에서 집필 중인 모습. 이원수문학관 게시 사진입니다.
ⓒ 이원수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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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친일 경력과 작품을 홈페이지에 공개해 두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원수 문학관'은 훌륭하다. 은폐하고, 왜곡하기 일쑤인 이런저런 기념관들에 견줄 때 이 정도면 결코 모자람이 없는 옳은 처사이다. 이원수가 1942∼3년에 친일 작품 다섯 편을 쓴 사실은 밝혀두지 않은 채 찬양만 늘어놓은 곳이라면 이원수문학관은 둘러볼 가치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가 몇 편의 친일 작품을 쓰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원수는 이미 <고향의 봄>을 발표하던 15세의 나이 때에도 일본인을 비방하는 학급신문을 등사하였고, 1935년에는 급기야 반일문학모임인 '독서회' 사건으로 1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마산에서 일어난 3·15부정선거 파동을 보고 유일하게 사건을 개탄하는 동화와 동시를 발표했고, 박정희 독재정권 때에도 전태일 분신 사건을 유일하게 동화로 발표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이오덕 선생의 말을 들어보자.

선생의 친일시는 우리 민족 앞에서 크나큰 죄를 지은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섭섭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이상 더 실망하지는 않는다. 이원수 선생이 쌓아놓은 문학의 업적이, 선생의 그 전과로 하여 무너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선생의 문학을, 우리 겨레 어린이 문학을 떠받치는 가장 든든한 기둥으로 되어 있다고 보고, 또한 선생의 사람됨을, 이 세상에서 만났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맑고 바르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분으로 언제나 가까이하여 왔던 지난 모든 날들을 결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생만큼 불의와 부정을 싫어하고,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만난 적이 없다. 작품으로도 그렇다. 4·19때 독재자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동화로 쓰고 동시로 쓴 사람은 이원수 선생뿐이었다. 전태일 청년이 스스로 몸을 불태운 사건을 동화로 쓴 사람도 이원수 선생뿐이었다. 남북 분단의 비극과 통일을 애타게 바라는 우리 겨레의 슬프고 애끓는 바람을, 선생은 여러 동화 작품에서 훌륭하게 그려보였다.

선생은 이렇게 올곧게 살았고 우리 어린이문학에서 그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작품을 발표하였는데도 세상살이에서는 언제나 푸대접을 받았다. 권력과 손잡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선생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가는 길과 아주 어긋난 사람의 손을 잡은 일이 없었다.


1936년 결혼 당시 모습. 이원수문학관에 게시된 사진으로, 사진의 장소는 수원 처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1936년 결혼 당시 모습. 이원수문학관에 게시된 사진으로, 사진의 장소는 수원 처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 이원수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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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았던 태도로 미루어 선생은 일제 말기에 한때 저질렀던 그 친일 행적을 뼈아프게 뉘우쳤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선생은 그 부끄러운 친일 동시를 썼던 몇 해 동안의 죄를 갚기 위해 그 뒤로 그 몇 해란 세월의 꼭 열 배나 되는 동안을 (한평생을) 우리 어린이와 겨레를 살리기 위한 작품을 써서 남기려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난한 목수집이었지만 그런대로 생계를 유지해오던 이원수 집안은 그가 4학년이 되던 1925년 아주 풍비박산이 난다. 그나마 가난한 집을 지탱하고 있던 아버지가 별세한 때문이다. 어머니는 땔감을 하느라 산에 올라 방황했고, 누이들은 공사장으로 나갔다. 기생 노릇을 하다가 반일사상가의 후실이 된 누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원수는 마산상업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

금융조합 서기로 취직했던 이원수는 1년간 감옥에 갇혔다가 1936년 1월 출옥한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편지를 주고받으며 인연을 쌓아왔던 최순애와 결혼한다. 이를 두고 아동문학계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아동문학가 부부가 탄생했다'고들 이야기한다.

최순애는 누구인가? 13세 때 <오빠 생각>을 쓴 사람이다. 박태준이 곡을 붙인 <오빠 생각>을 한번 불러보자.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이렇게 식민지 시대의 어려운 형편을 노래했지만, 사실 최순애는 대단한 부잣집 딸이었다. 그래도 순정을 버리지 않고 이원수와 결혼하여 평생을 같이했다. 하지만 기생집과 노동판에서 일하는 누이들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닌 이원수의 어린 시절은 아주 힘든 가난의 연속이었다. 학교에 납부할 공납금(월사금)을 내지 못해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 체험은 18세에 쓴 동시 <헌 모자>가 되었다.

1926년 <어린이>에 실린 이원수의 사진. 오른쪽 위의 사진이 이원수이며, 이원수문학관 게시물을 재촬영한 것입니다.
 1926년 <어린이>에 실린 이원수의 사진. 오른쪽 위의 사진이 이원수이며, 이원수문학관 게시물을 재촬영한 것입니다.
ⓒ 이원수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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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마루 구석에
헌 모자 하나
날마다 혼자 남는
헌 모자 하나

학교 애들 다 가고
해질녘이면
가고 없는 주인이
그리웁겠지

월사금이 늦어서
꾸중을 듣고
이 모자 쓰지도 않고
나간 그 동무

지금은 어디 가서
무얼 하는지
보름이 지나도록
아니옵니다

월사금이 소재가 된 동시는 1930년에도 발표되었다. 제목은 <교문 밖에서>. '월사금이 없어서 학교 문밖에 / 나 혼자 섰노라니 눈물만 나네 // 집으로 돌아가면 우리 어머니 / 쫓겨온 날 보고 또 울겠구나'라는 이 동시는, 이와 유사한 일이 여전히 벌어졌던 1970년대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 가난하게 학창 시절을 보낸 추억을 되살려준다.

그런가 하면 이원수는 고생하는 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애환도 노래했다. 제목은 <찔레꽃>.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언니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배고픈 날 따 먹는
꽃이라오

광산에서 돌 깨는
언니 보려고
해가 저문 산길에
나왔다가

찔레꽃 한 잎 두 잎
따 먹었다오
저녁 굶고 찔레꽃을
따 먹었다오

비록 다섯 편의 친일 작품을 발표하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해방 이후에는 단 한 번도 독재 정권과 세력에 아부하지 않고 살아온 이원수, 그를 찾아 창원의 '고향의 봄 도서관'으로 길을 떠난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의 마지막 문장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를 차용한다면, 도서관 오르는 길에는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아름답게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태그:#이원수, #고향의봄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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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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