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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작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감정이 있는데, 그게 바로 키 작음의 비애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생 번호를 키 순서로 붙였답니다. 반 배정을 받는 학기 첫 날에는 선생님이 학생들을 키 순서로 일렬로 세웠지요. 그러고는 그 열을 따라 뒤로 한 걸음씩 걸어 나가면서 출석부로 학생들을 찌르며, "너는 1번, 너 2번, 3번, 4번, 야, 너부터 번호 소리쳐봐." 그러곤 그 자리에 서서 번호를 외치는 학생들을 한명씩 쳐다보며 번호가 맞게 붙여졌는지 확인하셨죠.

저는 늘 1, 2번을 달았답니다. 어쩌다 1번(이게 1등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을 면해 보려고 몇 명 뒤에 서서 쭈뼛거리고 있으면, 선생님은 그걸 금방 알아채시고, "야, 너는 키도 작은 놈이 왜 거기 서 있어? 빨리 앞으로 안 나와!"라고 짜증 섞인 함성을 지르곤 하셨답니다. 선생님이 어찌 제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긁적이며 몇 걸음 나설라치면 선생님은 금세 제 팔을 잡고 끌어다가 앞에 세우셨지요. 선생님의 손길이 감사했지만 끌려가는 위치는 늘 반갑지 않았답니다.

마지막 학생이 "57번이요" 하면, "자, 니들 번호 다 알지? 그 순서대로 교실에 들어가서 앞에서부터 앉아라. 알것냐!" 그러면 우리들은 갈 길을 잃은 양들 마냥 우르르 교실로 몰려 들어가 우왕좌왕하다가 자리를 찾아가 앉았지요. 그 덕분에 저는 늘 앞자리에 앉았답니다. 그때는 왜 그리 뒷자리의 자유와 여유가 부러웠던지, 맨 앞줄에 앉아 선생님의 열정만큼이나 사정없이 튀어나오는 뜨뜻한 침을 맞아보지 않는 사람은 모르실 겁니다.

중학교 2학년 이후 '뚝'... 지조있는 내 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키가 크대요. 그렇다고 장대처럼 키가 쑤욱 자랐다는 의미는 아니고, 평소 1번의 위치에서 8번 정도의 위치로 이동했다는 뜻이지요. 중학교에서는 키 순서대로 번호를 먹이지 않고(우리는 '번호를 먹인다'고 했어요. 배고픈 우리 과거의 흔적일까요?) 이름의 가나다순으로 번호를 정했기 때문에 1, 2번이 되는 수모는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키가 성장한다는 것은, 즉 나의 눈이 위치한 높이에서 볼 수 있는 시야가 확장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대로만 꾸준히 성장한다면 대한민국 평균치는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 가슴이 부풀기도 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중학교 2학년 이후, 내 키는 백두산 천지의 수위만큼 변화가 없습니다. 입이 짧아서였을까요? 못 먹어서 그랬을까요? 운동이 부족한 탓일까요? 아니면 하기 싫은 공부로 스트레스를 받아서였을까요? 아무튼 잘 자라던 키가 '뚝' 하니 멈춰 서 버렸답니다. 그러곤 오늘날까지 한 치의 변함없이 그 높이를 지키고 있네요. 내 키도 꽤나 지조가 있다고 해야 할까요?

지조만 높은 키 덕분에 결혼식 때 난감했던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신부 키가 저보다 5만 원짜리 지폐의 길이만큼(가로가 아니라 세로입니다)이나 크거든요(제가 얼마나 능력 있는 남자인지 이제야 아시겠죠?).
 지조만 높은 키 덕분에 결혼식 때 난감했던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신부 키가 저보다 5만 원짜리 지폐의 길이만큼(가로가 아니라 세로입니다)이나 크거든요(제가 얼마나 능력 있는 남자인지 이제야 아시겠죠?).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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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만 높은 키 덕분에 결혼식 때 난감했습니다. 신부 키가 저보다 5만 원짜리 지폐의 길이만큼(가로가 아니라 세로입니다)이나 크거든요(제가 얼마나 능력 있는 남자인지 이제야 아시겠죠?).

신부 키가 크다 보니 웨딩 사진도 앉아서 찍어야 하고, 함께 서서 찍을라치면 주변에 있는 돌이라도 가져다 신부 뒤에 놓고(정면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말입니다), 중심이 잘 잡히지 않는 돌 위에서 흔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태연한 척 서서 멋진 포즈를 연출하기도 하고, 신랑을 배려한 신부는 결혼식 때 신발을 신지 못했답니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키가 커야 하나요? 도대체 이런 관념은 누가 만든 겁니까? 남자의 넓은 가슴에 안기고 싶은 여자가 만든 걸까요? 키가 크면 힘도 셀 것이라는 근거 없는 상상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아니면 내세울 것 없이 키만 큰 남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창조한 아이디어인가요?

아무튼 저는 이 관념 때문에 괴롭습니다.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청춘들의 엉덩이만큼이나 열심히 흔들리는 버스 손잡이를 잡을 때도 그렇고, 터질 듯한 김밥 속 같은 지하철에서도 그렇고, 심지어는 모델처럼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학생들 옆에 서서 사진을 찍을 때도, 저는 작은 키 때문에 난감하기만 합니다. 

"아빠는 왜 그렇게 키가 작아?"... 학생들과 포옹을 해도 애매~

어제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다들 바쁠 텐데 나를 보겠다고 주말 점심 시간을 희생하고 나왔더라고요. 감동이었지요. 내가 연구년을 갔기 때문에 그동안 못 보았노라고, 무척 보고 싶었노라고(참, 얼마나 듣기 좋은 말입니까!). 어느 선생님은 나에게 어설픈 포옹을 주기도 했지요. 아, 그런데 이 순간에도 선생인 내가 학생을 품는 모습이 아니라, 키가 작은 내가 키가 큰 엄마에게 안기는 형상이 됩니다. 애매~합니다. 

해나가 세 살 때는 나에게 "아빠는 왜 그렇게 키가 커?"라고 묻곤 했답니다. 세 살 해나에게 아마도 나는 키가 무척 큰 아빠였을 겁니다. 한참을 올려다 보아야 하니 말입니다. 그러던 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나보다 키가 큰 사람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최근에 부쩍 커버린 자신의 키 덕분에 눈높이가 바뀌어서 그런지, 며칠 전에는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러대요, "아빠는 왜 그렇게 키가 작아?" 그래서 내가 꼼시럽게 대답했지요. "그래도 내가 너보다 크잖아!" 아이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잇"하고 음흉한 '썩소'를 나에게 날립니다.

영화 <걸리버 여행기>의 한 장면.
 영화 <걸리버 여행기>의 한 장면.
ⓒ 20세기 폭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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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러대요, 세상에는 키에 따라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답니다(세상에, 꼭 키를 가지고 사람까지 분류해야 되겠습니까!). 키만 큰 사람, 키도 큰 사람, 키만 작은 사람, 키도 작은 사람.

제가 걸리버처럼 외항선을 타고 난쟁이의 나라를 찾아가지 않는 이상, '키도 큰 사람'이 되기는 글렀습니다. 그래서 저의 목표는 '키만 작은 사람'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불만을 참으며 열심히 살아보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키가 자라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태그:#작은 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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