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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TV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는 여자 사기장(沙器匠)의 이야기다. 실화가 아닌 픽션이지만 이 드라마의 실존인물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공 1천여 명을 이끌며 조선의 자기를 빚어냈던 백파선(百婆仙)이다.

일본에서는 '아리타 도업(陶業)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그녀에 대해 '1623년경 심해종전(深海宗傳)의 미망인 백파선(百婆仙)이 동족인 조선 사기장 960명을 이끌고 아리타의 히에고바에 가마를 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사기장이었던 자신의 남편 김태도와 함께 일본으로 끌려간 백파선이 남편이 죽은 후에도 사기장들을 이끌었다는 이야기. 온화한 카리스마를 가진 백파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도자기를 굽는 가마는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있어 단순한 생산시설이 아닌 신성한 장소로 여겨진다. 여성들이 중요한 의식에 접근만 해도 부정 탄다는 이유로 배척되었던 시대에 여성이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들을 이끌었다는 것은 이례적일 뿐 아니라 매우 놀랍다.

그렇다면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조선시대가 아닌 현대는 어떨까?

도자기는 산업화 이전, 스승에게 개인적인 지도를 받으며 기능을 익히던 도제식 수업 방법에서 대학에 도자기 관련 학과가 생겨난 후에는 여성도 자연스럽게 도자문화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사기장 또는 도예 작가라고 하면 여성보다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물론 여성 도예가들 가운데는 국외에도 알려진 유명 작가들부터 이제 막 현업에 들어선 이들까지 매우 다양한 작가들이 있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활동하는 여성 도예가에 대한 관심은 그리 높지 못한 듯 하다. 우리사회에서 아직은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은 남자'라는 인식이 보편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기자는 9월 28일부터 오는 20일까지 도자기 축제가 열리는 경기도 여주시의 여주 도자기 축제에 참여한 여성 도예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의 도자문화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기로 했다. 현재 경기도 여주시에는 여주 도자기사업 협동조합의 이사장을 지낸 도예가 황예숙 작가를 비롯해 30~40명이 종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연지] 남편과 함께 도자기 만들다 늦깍이 도예가로

박연지 도예가
 박연지 도예가
ⓒ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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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 안정된 사람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남편의 도자기 제조와 유통업을 도우며 남다른 사업 수완으로 가업을 성장시킨 사람이 도자 예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데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도예가로서의 이름으로 '깊은 샘'이라는 뜻의 소야(沼也)를 선택한 박연지.

20여 년 넘게 남편과 함께 도자기를 만들고 '여주도예촌'이라는 상호로 도자기를 판매한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자신만의 도자기를 꿈꿨다고 한다. 자신이 추구한 '박연지 도자기'를 위해 그녀는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생업과 학업을 동시에 해나가며 2007년 여주 대학교 도예과를 졸업했다. 그리고는 차근차근 자신의 도자기를 만들어 나가며 2009년 제1회 목포도자기 전국공모전 입선을 비롯해 단국 대학교 사발 공모전 입선 등을 통해 기량을 알리기 시작했다.

소야 박연지의 작품
 소야 박연지의 작품
ⓒ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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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자유분방한 분청을 태토로 사용하는 그녀는 꽃을 주제로 한 양각 작품이 많다. 늦게 시작한 만큼 해야 할 공부도 많다는 소야(沼也) 박연지. 그녀는 기존 자신의 작품 세계뿐만 아니라, 계절별 생활 도자기 등 다양성을 가진 도자 식기를 제작하고 있다.

[홍미례] 도예 입문 3개월 만에 축제 출품  

작은공방 홍미례
 작은공방 홍미례
ⓒ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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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육식물을 심으면 예쁠 듯한 작은 화분부터 다양한 형태의 화분들이 가득한 부스는 예쁜 화분에 눈을 빼앗긴 사람들이 가득하다.

꽃을 담는 그릇으로 올해 처음 여주 도자기 축제에 참가한 '작은공방' 홍미례 대표는 새내기 도예인이다. 그러나 '도자기에 입문한 지 3개월 남짓하다'는 그녀의 말이 곧이들리지 않은 이유는 수작업으로 만들어 낸 화분의 다양성과 장식기법, 그리고 대담한 색채 때문이다.

아무리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라도 흙을 사용하는 도자기 작업의 속성상 모양을 만들고, 장식을 한 후 말리고 가마에 넣어 굽는 단계별 과정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에 짧은 시간에 이렇게 창업하고 도자기를 만들어 축제에 출품한 것이 놀랍기만 하다.

작은공방 홍미례의 도자기 화분
 작은공방 홍미례의 도자기 화분
ⓒ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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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미례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는 도자기를 직접 만들지는 않았지만 여주시의 한 도자기 업체에서 15년을 관리직으로 일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어깨 너머로 배운 세월'의 실력이 발휘된 듯하다. 그녀는 "조금 힘든 일이 있어 흙을 만지게 되었는데, 흙을 만지는 동안은 시름을 잊고 편안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하나씩 하나씩 필요한 기술을 익히면서 지난 3개월간 작품을 만들었다는 홍미례 대표의 작업에 대해 주변에서는 '대단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홍미례 대표는 '꽃을 담는 그릇'을 통해 작은공방에 큰 꿈을 담아내길 희망하고 있다.

[김혜순·이상희] 쪼물쪼물 손 느낌인데 솜씨가 범상치 않네

클레이 수의 이상미
 클레이 수의 이상미
ⓒ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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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의 일반적인 형태와 달리 균형과 대칭을 무시한 모습이 눈을 끄는 '클레이 수'의 도자기는 울퉁불퉁 아이들이 흙장난으로 만든 것 같다.

도자공예의 기초기법 중 하나인 '핀칭' 기법과 '코일링' 기법을 주로 사용하여 만들어진 클레이 수의 도자기는 쪼물쪼물한 손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어 자연스럽다. 핀칭이나 코일링은 문화센터 등에서 운영하는 도자기 강좌에서 일반적으로 제일 먼저 배우는 형태의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이다. 아주 기초적인 기술이지만 손 느낌이 그대로 살아나고 똑같은 것이 없다. 취미로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방법의 하나다.

클레이 수의 도자기를 보면, 얼핏 초보자의 도자기 같기도 하지만 도자기에 사용된 유약 색을 보면 전문가의 맛이 드러난다. 기본적인 성형 방법으로 만든 기물에 그림을 그려 넣거나 독특한 색상의 유약을 발라 구워낸 솜씨가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더니 황청자로 유명한 이형우 여주시 도예명장의 부인 김혜순씨와 딸 이상희씨의 합작품이란다.

오랜동안 남편의 작업을 도와 온 김혜순씨와 태어나면서부터 도자기를 만드는 집안에서 자란 딸의 솜씨가 합쳐지니 이형우 도예명장의 황청자와 또 다른 느낌의 그녀들만의 도예작업을 만들어가고 있다.

클레이 수의 3인용 차그릇
 클레이 수의 3인용 차그릇
ⓒ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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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분]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자 작품

부여도예 이종분
 부여도예 이종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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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풍속화가 그려진 화병과 양각으로 촘촘히 새겨놓은 물결 사이로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큰 접시. 그 사이로 도자기 필통과 도자기 목걸이가 가득한 '부여도예' 이종분 도예가의 부스는 편안한 분위기로 관람객의 발길을 잡는다.

전통 도자기 작업을 생활 도자기에 접목시킨 도자기를 만드는 이종분 도예가는 조각된 도자기의 그림에 화려한 색채를 덧입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자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부여도예의 도자기 작품
 부여도예의 도자기 작품
ⓒ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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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분 도예가는 주로 분청과 조합토를 사용하지만 물레 성형과 핀칭, 판작업까지 다양한 성형 기법과 조각, 그림 등 장식 기법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백자 작업에서도 본인의 개성이 강한 작업을 보여준다.

이종분 도예가의 도자기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녀의 도자기 필통은 수저통, 화분 뿐 아니라 테이블 위의 작은 편지함 등으로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도록 넉넉하게 만들어져 인기를 끌고 있다.

백자에 물결과 잉어를 조각하고, 추상적이기보다는 원색의 느낌이 강한 채색으로 장식한 큰 접시를 통해 솔직함을 추구하는 그녀의 작업세계를 엿볼 수 있다.

[김정란] 백자에 천착... 좋은 작품 만드는 도예가로 기억되고파   

송전도예공방 김정란
 송전도예공방 김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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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에 천착하여 박지 기법(도자기 표면의 흙을 긁어내는 방법)의 양각 장식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송전도예공방' 김정란 도예가. 그녀가 만들어내는 백자는 순백의 차가움에 모란과 매화의 넉넉함, 여유로움이 함께하여 전통 백자와는 다른 '김정란 백자'를 보여주고 있다. 전통 문양인 모란과 매화에도 충실하지만, 당초문을 현대적 감각으로 변형한 문양을 음각한 항아리는 김정란 도예가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송전도예공방의 백자 작품
 송전도예공방의 백자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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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도예가의 박지 기법은 표현할 문양을 남기고 전체를 싹 쓸어 긁어내는 일반적인 기법이 아니라 주로 위에서 아래로 한 줄씩 긁어내 도자기 조각도의 칼맛이 살아나는 특징이 있다. 이런 기법은 일반적인 박지 기법과 달리 문양 주변 조각도의 칼자국에 의해 문양에 운동감을 줌으로써 문양이 더욱 생생하게 드러나는 느낌을 준다.

김정란 도예가는 전통 백자로 입문하였지만 전통적인 것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그녀의 백자 작품은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전통 기물의 형태에 현대적인 문양을 넣거나, 현대적인 기물에 전통문양을 넣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작품을 표현해 나간다.

중년 여성도예가들 중에서 주목받는 도예가인 그녀는 여성이라는 접두어 없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 도예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의 도입부 일부는 2005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경기도자문화원형>프로젝트의 내용과 문화원형스토리 <'불의여신 정이'의 실존인물, 백파선을 아시나요?>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 여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여주, #경기도, #도자기축제, #여성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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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에서 지역신문 일을 하는 시골기자 입니다. 지역의 사람과 역사, 문화에 대해 탐구하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이런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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