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지? 난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나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식들 커가고 생계비는 날로 더 많이 드는데... 학교 일용직인 내 월급은 3년이 되어도 땡전한푼 오르지 않고, 언제 정리해고 당할지 모르고...'그런 생각이 부쩍드는 요즘입니다. 가장이라는 무게감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저의 힘든 마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지만 모두들 먹고 살기 힘들어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말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인지라 괜스레 저 때문에 불편해 할까봐 그냥 마음속으로 꾹꾹 누르고만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 깨질듯이 두통이 생기기도 하고 얼굴이 이유없이 화끈 거리기도 합니다. 마음속엔 '자살이나 자결'이라는 단어가 자주 맴돌고 있고, 높은 곳에 있으면 뛰어 내리고 싶은 충동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커가는 자식을 둘이나 가진 가장이고 저로부터 형성된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돌려먹곤 하지요.
저만 그런지 몰라도 세상이 참 허무하게 느껴지고 슬프게 보입니다. 길거리 다니다 보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바쁘게 살고 활기차 보이는데 저는 그곳에서 시간이 멈춰버린듯이 흑백으로 제 모습이 보이곤 합니다. 우울증 일까요? 아내에겐 한숨을 왜그리 자주 쉬냐고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노조활동 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가 작성되어 그나마 돈을 더 벌 수 있는 대기업 하청엔 들어갈 기회가 아예 봉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나마 지금 다니는 학교 일자리마저 일용직이라 언제 다시 떨려날지 모른다는 고용불안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고 있습니다.
이러다간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좋은 정보를 만났습니다. 현대차 비정규직 해고자인 저는 노동문제라면 귀를 쫑긋 세우고 다닙니다. 상급단체 민주노총 울산본부에서 '내 안의 나를 만나는 치유놀이터'란 행사를 진행한다고 하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참여해보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지금의 제 처지에 대해 어쩌면 조금은 위로가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구 비정규직 노동자 지원센터로 전화를 걸어 심리상담을 받아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려면 사전에 조사할 게 있다면서 문서를 가지러 오라 했습니다.
2주전 시간을 내어 북구청 옆에 있는 비정규직노동센터로 갔었습니다. 5백문항이 넘는 질문지를 주면서 빠른 시일내 답을 해서 제출하라 했습니다. MMPI 라고 하는 심리상담 전문 질문서 였습니다. 시간 날 때 마다 질문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냥 생활 질문에 맞다, 아니다로 답변을 하는 것이라 간단했습니다. 그러나 550여 문항이나 되어서 시간이 꽤나 걸렸습니다. 이틀에 걸려 다 작성하고 갔다 주었습니다. 행사 당일 오라며 그날 행사 전단지를 한장 주었습니다. 전단지엔 그날 할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내 안의 나를 만나는 치유놀이터란?힘들고 지친 아프고 상한 마음을 만나 신명나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돌보고, 치유하고, 성장하도록 돕는 열린 상담공간입니다. 상담, 하면 좀 이상한 사람이 가는 곳이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겪게되는 스트레스, 우울, 무기력함 등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상담입니다. 감기 앓이처럼 누구에게나 가볍게 왔다가 큰 병을 남길수도 있습니다. 치유놀이터에서 심리치유상담 체험마당이 펼쳐지니, 찬찬히 살펴보고 따뜻한 기운 듬뿍 안고 가시기 바랍니다.
선전물 첫면을 펴니 치유놀이터가 뭔지 알리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제 심정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고 위안이라도 좀 받을수 있을거 같았습니다. 상담체험으로 개인상담과 심리상담, 문학치유, 타로상담, 장난감 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중강연으로 정혜신 정신과 의사가 나와 강의를 한다고 했습니다. 상담도 받아보고, 그 분 강의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지난 2009년 쌍용차에서 2500여 명의 대규모 구조조정에 휘말려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 가족이 2년동안 17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정혜신 박사는 방치하다간 큰일나겠다 싶어 2011년부터 쌍용차 해고자 가족 치유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 '와락'이라는 심리치유센터가 생겨났고 활동이 이어지고 있는 거 같습니다.
담당자는 행사 당일날 오라 했습니다. 행사는 10월 19일(토) 12시부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는 오전 11시경 행사장에 도착했습니다. 천막이 십수개 쳐져있었고, 천막마다 다양한 상담 담당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벽에는 민주노총 울산본부에서 왜 상담치유 사업을 시작하는지 알리는 벽보가 여러장 붙어 있었습니다.
12시가 되어 2주전에 질문지 답변을 제출했던 심리상담 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여성분이었는데 그분은 제가 제출한 질문지 답변으로 결과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심리검사서는 '다면적 인성검사'라는 것으로 MMPI라 불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객관적인 성격검사라 합니다. 개인적인 성격 특성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 상담 대상자의 마음이 어떻게 얼마나 불편한지 잘 나타내 준다고 합니다. 그 인성검사는 1943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병원의 두 정신과 의사에 의해 개발되었고, 한국엔 2005년부터 정심검사용으로 쓰여지고 있다고 합니다.
"변창기씨는 이 심리검사서 결과표에 나타난 심리상태는 이렇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안되어 화도 나고 분노도 일어납니다. 그게 스트레스가 되고 쌓여 침울합니다. 마음의 스트레스가 지속하여 쌓이게 되면 머리가 아프거나 배가 아프거나 가슴이 뛰거나 명치가 아프기도 합니다. 인정받고 싶고, 관심받고 싶은데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거 같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면에 쌓여있는 화나 분노가 많으나 풀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자신은 할만큼 하고 있는데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갑자기 불같이 화가 폭발하기도 하지만 꾹 참고 있는 상태입니다. 늘 침울하게 지내거나 좌절감, 무기력, 의기소침이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정서가 매우 불안합니다. 실수를 자주 하지요? 그건 긴장하고 있어 그렇습니다. 사는게 어렵게 느껴지고, 힘들게 느껴집니다. 우울한 감정이 크게 자리잡고 있습니다."상담하는 선생님은 저에게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금의 제 심정을 그대로 알려 주었습니다. 500가지가 넘는 질문에 답한 결과가 그렇다니 정말 신기했습니다. 모두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 분은 중간중간 다음 차례로 지날 때마다 저에게 어떤 현실에 처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대답하자 그레프를 보여주며 친절하게 답변을 이어갔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힘들 때마다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는 벗이 있는지를 묻고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으면 찾으라 했습니다. 그분은 지속적인 상담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쌍용차 해고자들이 했던 그 지속적인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겠다고 하니 추천을 해주었습니다.
상담은 1시간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저 때문에 많은 시간 할애해준 상담선생님께 고맙다고 전하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저는 다른 상담하는 곳도 돌아보다가 오후 3시경 북구청 강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 박사가 나와 강의를 한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이 나와 강연회를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고, 북구청장도 나와 격려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리던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쌍용차 가족 스물네명의 죽음을 접하고 이 심각한 사회현상을 방치해선 안되겠다고 생각되어 와락이라는 노동자 치유센터를 만들고 그들을 치유시키는 데 앞장서 왔습니다. 오늘 강의 제목이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해 입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혼란스럽고 병든 정신을 치유하기 위해선 치유의 근본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래야 치유의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안에 중요한 치유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쌍용차 해고자의 연이은 죽음을 목격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OECD 자살률 1위 국가라 하죠. 그건 인구 10만명당 32명, 노인 10만명당 83명이 해마다 소중한 목숨을 스스로 끊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사회 병리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저는 그 분 이야기에 마음이 쏠려 들어 갔습니다.
"이 문제에 관심 가지고 연구해 보니 독거노인이나 풍족한 노인이나 자살률이 비슷했습니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뭔가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10년새 급속도로 자살자가 상승했습니다. 요즘,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데 너무 함부로 대하는 사회 같습니다. 어느 공장에 사고가 났는데 걸레로 피를 닦아 내고 다른 노동자를 즉시 투입시켰다고 합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이나 자존감 조차 없는 사회 같습니다. 기본 예의도 무너진 사회 같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요리사 된다고 하니 부보들이 펄쩍 뜁니다. 그 부모는 판검사나 의사가 되라 강요합니다. 사람이 서로 존중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그분은 왜 상담이 중요한지 이야기 했습니다.
"전쟁 때 이야기 입니다. 서로 마주보고 총을 무차별로 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린 아기 하나가 울면서 기어 나왔습니다. 이쪽저쪽 모두 총 쏘기를 멈추고 그 아기를 지켜 보았다고 합니다. 아기가 총 쏘지 말라고 말했나요? 그 아기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기에게서 나오는 평화의 힘. 그것이 바로 치유의 원형입니다. 누구에게나 내면에 그 어린 아기같은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엄마를 찾는 아기의 힘이 바로 치유의 힘 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하는 나, 그 나를 기억 하십시오. 내게 진정한 도움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건 업계 비밀인데요. 제가 정신과 의사로서 고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정신과 의사 90% 이상이 약물치료에 의존합니다. 지금 정신상태가 어떻냐고 묻고 바로 처방전을 써 주죠. 환자는 그 처방전 받아 약국으로 갑니다. 그게 요즘 정신과 치료의 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환자에겐 상담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상담해줄 정신과 의사가 별로 없는 게 현실입니다."그 분은 전두환 정권 시절에 고문 받아 그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상담하면서 상담치유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쌍용차 해고자 상처난 마음치유를 하면서 몸 보다는 마음치유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교훈, 계몽, 가르침을 멈추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냥 마음에 상처받은 사람들과 친구처럼 만나 아픔을 나누자고 합니다. 그들에겐 우울증 약물 보다는 상담이 필요하고 대화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현장 노동자에서부터 농민, 교사, 문학인 등 다양한 부류의 24인이 모여 치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24인도 삶을 살아 오면서 세상으로부터 또는 주변으로부터 상당한 마음의 상처를 받아 힘들어 했는데 치유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마음이 안정되고 좋아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24인이 각자 지역에 돌아가 다시 같은 치유프로그램으로 진행시켜 보았고, 모두 24인처럼 힘든 마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정혜신 박사는 함께 만든 그 치유프로그램을 전국적으로 활성화 시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날 저는 심리상담과 받았고 정신과 전문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제 마음 상태를 안정 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날 경험해 본 결과 이 세상엔 저 말고도 대부분 힘들게 살고 있어 보입니다. 그것은 어떤 충격적인 일들을 겪게 되었을 때 마음을 어찌 다스려야 할지 몰라 발생하는 거 같습니다. 밥 먹고 나면 몇 시간만 배부르지 또, 몇 시간 지나면 배고파 지듯이 정신치료에 약물치료는 한계가 있을 거 같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성찰과 마음 다스리는 공부를 해나가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런 치유상담 프로그램이 참 유익할 거 같습니다.
그 분 이야기로는 재벌기업 대표도 돈이 없다 하고 불안해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가지는 불안과 저처럼 부당해고 당하고 하루하루 돈 걱정하며 살아가는 이 나라 비정규직 노동자와는 다른 불안이고 두려움 일 것입니다. 늦게나마 민주노총에서 힘들어 하는 노동자를 위한 치유 프로그램 사업을 진행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모쪼록 시작한 거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좋은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는 게 힘든 저부터라도 앞으로 시작될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