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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일) 전북 익산의 아침 공기는 무척 맑고 상큼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인 오전 7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는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이어 버스를 타고 함라면 함열리로 갔다. 이곳은 한옥과 옛 담장이 멋스러운 전통마을이다. 여기는 한국의 일반적인 동족촌과는 달리 성이 다른 3인의 가옥을 중심으로 마을이 번성했다.

한때는 함라마을의 인심이 전라도 인심을 좌우한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곳이었다. 나비가 되어 꿈길을 날듯 나는 멋진 한옥의 담장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한참을 걸었다. 재미있게도 함라마을의 담장은 주택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데도 담장이 높다.

대부분 흙다짐에 돌을 박은 형식인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밖에도 토담, 돌담, 전돌을 사용한 담 등 다양한 형태의 담이 섞여 있다. 담장 일부는 거푸집을 담장의 양편에 대고 황토 흙과 짚을 혼합하여 축조한 판벽으로 되어 있다.
    
함라마을 담장
▲ 익산 함라마을 담장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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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담장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아쉽게도 요즘 보수한 담장은 원형을 잘못 복원해 약간 웃기게(?) 만들어진 곳도 있기도 하다. 아무튼 이곳의 한옥과 담장은 마을 주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세대를 이어가며 만들고 덧붙인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유산임에 틀림없어 보기에 무척 좋다.

특히 차순덕 가옥의 담장은 담장 양편에 거푸집을 대고 황토와 짚을 섞어 쌓은 전통적인 축조 방식으로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한다. 마을을 전체적으로 크게 돌면서 살펴본 다음, 방문한 곳은 '조해영 가옥(趙海英 家屋)'이다.

이곳은 현재는 정말 볼품이 없지만, 마을에서 가장 인심이 좋았던 만석꾼 집으로 예전에 주로 국악인들이 머물면서 연습도 하고 공연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1986년 전북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대문이 수십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안채 1동과 별채 1동, 그리고 변형된 문간채만 한적하게 남아 있다.

안채 상량문에 '대정(大正) 7년'이라 명기되어 있어 1918년에 건축된 것을 알 수 있으며, 별채는 안채보다 조금 늦은 1922년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남향에 가까운 남남서향이다.

국악공연을 자주했지
▲ 조해영 가옥 국악공연을 자주했지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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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와 별채는 모두 남북으로 길게 서로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으나 안채는 남쪽을, 별채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집을 워낙 크게 지어 시기에 따라서 방향을 달리한 관계로 보이며, 대문이 많은 집이라 주로 대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건물을 배치한 듯 보인다.

이 집은 조선이 망한 직후 궁궐 건축을 하던 대목장들이 지방으로 낙향을 하여 지은 건물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궁궐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용 문양과 꽃담 장식 등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현재는 안채 난간은 상당히 훼손되었으며, 모든 건물의 기와가 퇴락했다. 일부 건물은 누수공사가 필요한 곳도 있는 등 보존상태가 매우 나쁘다. 

조헤영 가옥
▲ 꽃담 조헤영 가옥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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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원래 남아있던 많은 대문은 대부분 없어지고 좁은 문이 남아 있는데, 보존상태도 불량하다. 안채와 별채로 둘러싸인 공간을 제외하고는 뒷담이 없이 거의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특이하게 별채 동편 울타리 밖 바로 가까이에는 김육(金堉)의 선정비가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근방에 비석군(碑石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석들은 원래는 집안에 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집이 확장되면서 집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온 듯하다. 집안 전체는 쇠락한 양반가의 모습인데, 후손들은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현실적인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유지 보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되어 있는 듯 보여 안타까울 뿐이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국악인들이 이 집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라도 국악인들이 중심이 되어 주인장에게 양해를 구해 집을 수리하고 유지하면서 국악 관련기관으로 사용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하다면 말이다. 

이어 방문한 곳은 바로 이웃에 있는 '이배원 고가(李培源 古家)'다. 지난 2002년 익산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17년 만석꾼 이배원이 지은 집이다. 안채의 평면은 방과 대청, 부엌으로 평면이 구성되어 있는데, ㄱ자 형태이며, 구조는 장대석 기단위에 치석한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방향 기둥을 세운 다음 도리로 결구하고 있다.

공포는 물익공 양식이고, 창방과 장여 사이에는 소로가 끼여져 있다. 가구는 대청 상부는 1고주 5량가이고, 방과 대청이 접하는 부분에는 2고주 5량가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을 ㄱ자 형태로 꺾어 연결하고 있다. 사랑채는 역시 안채와 같은 구조이나 누마루가 발달되어 있다.

익산 원불교 교당
▲ 이배원 고가 익산 원불교 교당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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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당시에는 안채·사랑채·행랑채·문간채·곳간채 등 여러 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안채는 입식 부엌이 들어선 뒤쪽 공간 외에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는 외부인을 위해 한옥민박을 하고 있어 누구나 방문해 숙박이 가능하다.

사랑채는 주인이 관리하는 것이 힘들었던지 지난 1959년에 원불교가 내부를 완전히 개조해 교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숙박을 하고 원불교 교당으로 쓰고 있어 외부인이 편하게 둘러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는 사이에 내담을 두고 복도를 설치하여 통행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배원의 부친(이석순)이 누룩사업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만석꾼으로 성장하였고, 또한 삼성 농장을 운영하는 한편 전북축산의 대주주였으며, 황등산업의 이사를 역임했다.

그의 장자인 이집천은 교육사업가이자 서예가로 명망이 높았으며, 다른 삼부자의 집과 마찬가지로 만석꾼이면서 자선사업을 펼쳐 주변에 평판이 좋은 집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무튼 현재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가 보존되어 있고 사람이 살면서 한옥민박을 하고 있고, 원불교 교당으로 쓰이고 있어 아쉽지만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이 보기에는 좋았다.

이어 언제나 문이 닫혀 있어 내부를 전혀 볼 수 없는 '김안균 가옥(金晏均家屋)'이다. 1986년 전북 민속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에, 동·서 행랑채는 1930년대에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 전통적인 상류가옥의 변모를 보여주며 조선 말기 양반가옥 형식을 기본으로 구조와 의장에 일본식 수법이 가미되었다.

서양식을 본떠 거실과 침실을 구별하였고, 사랑채와 안채 앞뒤로 복도를 두르고 유리문을 달아 채광을 조절하였다. 사랑채 옆에는 세면대가 딸린 화장실을, 행랑채 끝에는 목욕탕을 배치하였다. 대청은 누마루 형식으로 정교한 아자(亞字) 난간을 둘렀으며, 주춧돌은 정교하게 잘라낸 희고 매끄러운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행랑채 끝에 정문이 있고, 곳간은 정면에 기둥을 세워 지붕을 연결한 포치 형식으로 바닥에 시멘트를 발라서 통로로 이용하였다. 뒤쪽 집들을 사들여 점차 넓힌 탓에 넓은 대지에 비해 건물이 앞쪽으로 몰려 있다.

익산
▲ 김안균 가옥 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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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주인장이 해방 직후 공산주의자인 박헌영을 지원한 이유로 오랜 동안 수난을 당해, 현재 외부와의 소통이 거의 없이 늘 문을 닫고 있어 집안을 살펴보는 일이 쉽지 않다. 하지만 건너편 교회 종탑에 올라 일부를 조망하는 것은 가능한 관계로 바라보면 좋다. 참 너무 정갈하게 유지가 잘 된 한옥이다. 언제 한번 기회를 봐서 방문을 하고 싶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아 아쉬운 곳이다.

이어 다시 버스를 타고 우리가 이동한 곳은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나바위 부락에 있는 유명한 성당인 '화산천주교회'라고도 하고 '나바위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중에 한 곳이다. 이 한옥성당은 1987년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한옥성당
▲ 나바위성당 한옥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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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1845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옛날 선착장이었던 이곳 나바위의 황산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동학농민운동 때 망한 김여산의 집을 개조하여 준공한 목조건물이었다.

그후 1916년 종각을 덧붙여 건립하면서 목조벽체를 헐고 벽돌벽으로 개조하였는데 이 지방 벽돌로 중국인들이 쌓았다고 한다. 1922년에는 요셉 까다르 신부가 바깥기둥 밑부분을 돌기둥으로 바꾸었다. 평면은 장방형으로 네이브와 아일없이 중앙에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들을 세워 보를 받치는데, 본래에는 이 기둥들에 칸막이를 두어 남녀 신도석을 구분하여 출입구도 달리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지금도 이런 전통은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바닥은 장마루이고 천장은 판자로 마감하였다. 제대가 있는 곳은 반원 아취로 천장을 받치고 있다. 정면은 잘 다듬은 석재로 기초부를 이루고, 그 위에 벽돌쌓기의 종탑부를 두었다. 종탑부의 모서리는 후렛버트레스(Flat buttress)가 직교되게 하였다.

본당의 지붕은 합각을 형성한 팔작지붕으로 한식기와를 얹었고, 지붕 아래에는 팔각 채광창을 두었는데 이는 분명 팔괘의 상징이라고 전한다. 특히 양측면에는 개방된 회랑이 있는데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 연등천장을 이루어 도리, 보와 더불어 한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익산
▲ 나바위 성당 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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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볼 때 이 성당은 천주교가 이 땅에 정착하면서 서양식 성당건축을 짓지 않고, 한국 전통적인 목조건축과 조화되도록 한양절충양식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뜻을 가진다. 물론 너무 멋스러운 한옥성당이다. 특히 내부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너무 좋았다. 자! 이제 인근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완주군 삼례읍의 '삼례문화예술촌'으로 간다.


태그:#익산시, #나바위성당, #삼라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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