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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김욱진 시인이 새 시집 <행복 채널>을 발간했다. 2009년에 낸 <비슬산 사계>에 이은 두 번째 시집이다. 시집은 70편 이상의 신작이 수록된 중량감을 보여준다. 시집 끝에 덧붙인 해설을 통해 이태동 문학평론가는 시인에 대해 "자연으로의 회귀와 윤회사상이 시적으로 펼쳐져 있는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행복 채널>에는 물론 이태동 문학평론가의 해설처럼 불교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 많다. 시집 권두의 '시인의 말'을 끝내면서 작가 스스로 '김욱진 손모음'이라는 표현을 쓴 것만 보고도 독자는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형상화한 김욱진의 시 세계

그러나 김욱진의 시 세계는 실로 다양하다. 시인은 권력에 집착하는 세태를 풍자하기도 하고('늦가을 오후'),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가한 회포를 읊기도 하며('닭 잡았다!'), 환경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보여주기도 한다('우포 종합병원'). 그런가 하면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회한도 노래하고('이사'),  교육 현안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가벼운 인간행태를 꼬집기도 한다('교원평가제').

다양한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은 독자를 행복하게 한다. 한 가지의 주제와 소재를 강요하는 시인에게서는, 그가 비록 대시인이라 할지라도 너그러운 인간적 면모를 받기 어렵다. 그러나 간혹 '해석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하더라도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품고 있는 시집이라면 독자는 특별히 자신의 취향에 맞는 시를 발견, 기꺼이 마음에 받아들이는 기회를 누릴 수 있다.  자유를 얻었으니 어찌 독자가 행복하지 않으랴.

나는 <행복 채널>을 읽으며 대구와 경남북 일원으로 여행을 떠나본다. 내가 다녀본 곳들이 여러 시를 통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첫 시집의 제목이 <비슬산 사계>였는데 이번 시집에도 비슬산은 몇 작품에 스며 있다. 김욱진 시인은 비슬산이 있는 달성군의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 회장도 역임했다.

비슬산 고위평탄면의 5월 참꽃
 비슬산 고위평탄면의 5월 참꽃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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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맑은 몸짓으로 거문고 잘 타는
아가씨가 비슬산에 있다는 소문
방방곡곡 파다하지요
아리따운 얼굴을 보려는 군중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을 선다는데
나는 가슴이 답답하거든요
나를 꺾지 말라고 애원해도
심술궂은 손길 다가와
막무가내로 덤벼요
짓밟아놓고 모른 체할 때는
울먹울먹 울음을 터뜨려요
사랑이 소유인 줄 아시나 봐요
입술연지 고운 낭자들은
나랑 사진 찍는 것도
부담스럽다나 어쩐다나
호 호 호
밤하늘 별 헤며
텅 빈 숲 지키는 일 외로워
또다시, 내일을 기다리는
참꽃 아가씨

<참꽃 이야기> 전문이다. '거문고 잘 타는 아가씨가 비슬산에 있다'는 표현에는 신선이 비파를 타는 듯한 모습의 산이라 하여 비슬산 이름이 생겨났다는 지명 유래가 담겨 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이 산에는 엄청난 꽃구경 인파가 몰려온다. 세계적 빙하기 암괴류 유적을 자랑하는 비슬산은 그 정상부가 화강암 지대답게 광활한 고위평탄면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비슬산 참꽃 군락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입술연지가 고운 낭자들이 함께 사진 찍기를 부담스러워 할 만큼 아름다운 참꽃 군락이다. 당연히 사랑이 소유인 줄 아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은 자꾸만 꽃을 꺾으려 한다. 그것이 꽃들은 답답하고 슬프다. 하지만 꽃들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내일을 또 기다린다.

복원되어 있는 삼강주막
 복원되어 있는 삼강주막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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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짓가랑이 쩍 벌리고 문지방 걸터앉아
담뱃재 떨어지는 줄도 모른 채
옹벽에 나붙은 메뉴판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살아생전, 외상값은
그을음 꽉 낀부엌 벽에다 그저
막걸리 한 사발은 짧은 세로 금
한 됫박은 긴 세로 금
외상을 갚으면 가로로 죽 그어버렸다는
사진 속 할머니

막걸리 한 됫박 다섯 냥
메밀묵 한 대접 넉 냥
지짐이 한 두레 석 냥
두부 한 모 두 냥
이럭저럭 해서
한 상에 열두어 냥은 받았을 법한 그 시절

나룻배 타고 분주히 드나든 보부상들
외상값만 제대로 받아 가셨더라도
노잣돈쯤이야 두둑하셨을 터인데

어느샌가 독자는 비슬산을 떠나 경북 북부 지방인 예천의 <삼강 주막>에 닿는다. 시원찮은 인간들이지만 그래도 비슬산의 참꽃이 그들을 기다렸듯이, 삼강주막의 할머니 역시 외상값도 제대로 갚지 않는 보부상들을 기다린다.

흔히 '우리 시대의 마지막 주막'으로 일컬어지는 삼강주막이 문을 닫은 것은 2005년이었다. 아직 10년도 채 되지 않은 지난 날까지 유옥연 할머니가 혼자 운영했고, 할머니의 타계 이후 폐업하였는데 군청과 마을주민들이 옆에 새로 여러 채의 집을 지어 이름난 관광지로 부각시켰다. 하지만 삼강주막은 그들 덕분이 아니라 글자를 모르셨던 할머니, 따스한 인정이 흐르도록 긴 세월 지켜온 유옥연 할머니의 인생에 힘입어 유명해졌을 따름이다. 각박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세상, 현대인들도 내심으로는 모두들 그곳을 그리워하는 까닭이다.   

경북 청송 주산지
 경북 청송 주산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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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의 주산지>

산기슭 한 폭 수채화 속으로
하늘다람쥐와 함께 걸어 들어간다
송기 갉아 먹힌 노송의 등에 업혀
칭얼대던 무당개구리 한 마리
그림 밖으로 마중 나와
연분홍물봉선화 치맛자락 훔쳐보는
내 눈길 잡아당기며 물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제 살아온 빛깔과 무게만큼 얼비친 연못
능수버들가지 사이로
카메라 세례 받는 비단잉어 떼
바깥세상 입질하며 물감 칠을 한다
금세,
내 초상화 한 장 물속에 떠 있다

시인은 독자를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사진애호가들이 한번씩은 다녀갔을 법한 경북 청송의 주산지로 안내한다. 이 시 역시 각박한 인간살이가 아니라 자연과 사람이 물아일체가 되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산지 풍경이 한 폭의 풍경화같기에 시인도 초상화가 되어 물속으로 들어간다. 이곳에서는 사람도, 삼강주막처럼 막걸리 한 잔을 아니 마신 채로도, 주산지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경북 고령의 대가야 고분군을 노래한 아래의 시 또한 마찬가지이다. 계세(繼世)사상을 신봉한 옛날 사람들은 죽은 뒤에 머무는 곳 또한 집으로 여겼다. 그래서 유택(幽宅)이라 불렀고, 비록 '순장'일지라도 '셋방'은 내주었다. 그것이 바로 <지산동 44호분>이 '빈 방이 없다'고 노래하는 까닭이다. 시인은 지금 어린 소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인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살아 숨 쉬는 순장무덤
입장료 몇 푼에
능의 문 스르르 열렸다 잠긴다
왕명 거역할 수 없어
무덤 속으로 산자들이 줄지어 들어간다
대가야 때도 이러했으리
텅 빈 덧널 아가리 떡 벌리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을 터
딸린 돌방 고이 잠든
어린 소녀를 깨워 물어볼까
여태 한 살림 차려놓고 누워있는
으뜸돌방 주인 마음씨 어떠했냐고,
셋방살이란 게 어딘들 다르랴먄
한여름 밤 무덤 속
빈 방이 없다

경북 고령 주산의 대가야 고분군
 경북 고령 주산의 대가야 고분군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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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해인사 가는 길 낙동과 함께 출발하여
나란히 달렸다
고령 다리쯤 다다르자 가물가물 초점 풀어지는 낙동,
강변 딸기밭 때문이 아니었다.
가슴 파헤치고 산발한
강 하나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제 풀에 서러워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칠 백리
젖먹이 자식
놓쳐버린 어미치럼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굽이굽이 흐느끼고 있었다
묵상에 젖은 모래알 틈새로
가야산 골프장 결사반대하는
성철스님의 주장자 내리치는 소리
산은 산, 강은 강

트럭이 오가고 있는 낙동강
 트럭이 오가고 있는 낙동강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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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과 금호강이 마주치는 달성습지에 트럭이 질주하고 있다. 한때 국제자연보호연맹에 등록될 만큼 이름높던 달성습지가 신음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낙동강을 '가슴 파헤치고 산발한' 상태라고 표현한다.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거늘 이른바 개발 이익을 보려는 자들은 오로지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자들일 뿐이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될 줄 알았더라면 낙동강변 인근에 누워계시는 홍의장군도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불과 7일만에 대구가 왜군에 함락되는 것을 본 곽재우는 그 이튿날 나라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다. 그를 비롯한 의병들 덕분에 부랴부랴 압록강까지 도망쳤던 선조는 무사할 수 있었고, 왜의 1차 침입 때 호남지방은 무사했다. 홍의장군은 죽으면서 "나라가 이 모양인데 어찌 무덤에 봉분을 하겠느냐. 납작하게 그냥 두어라"하고  유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강토를 지키고 백성들을 살려내느라 숱한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이 목숨과 가족을 버렸건만, 친일파와 부패한 정치꾼들의 독재는 계속되고, 겨레의 정신세계는 물질만능의 늪속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국민의 '웅성거리는 얘기'를 엿듣는 게 일과이고, 드문드문 '총성을 울려댄다.' 아, 의사와 열사들께서 '잠 못드시겠다.   

<현대판 봉이 김선달>

망우당 할아버지 묘소 옆에 가면
쪼그마한 저수지 몇 있다
그곳에 누군가 양어장 팻말을 박아뒀다
소문은 삽시간에 번져
우포늪 청둥오리 떼 지어 날아들었다
요즘 자연산이 어디 있어
먹고 안 죽으면 다행이지
웅성거리는 얘기 엿들은 양어장 주인
30분 간격으로 총성을 울려댄다
곽재우장군 잠 못드시겠다

봉분이 없는 곽재우 장군의 묘소
 봉분이 없는 곽재우 장군의 묘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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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욱진 시집 <행복 채널>, 문예바다(2013.10.25.), 143쪽, 8천원.



태그:#김욱진, #행복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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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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