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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는 하나의 도구 안에 세 가지 기능을 탑재시킨 인류의 탁월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다. 세 가지 기능이란, 상품과 서비스의 가치(가격)를 계산하는 단위, 물건과 물건을 교환하는 매개체 그리고 구매한 상품 값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사고파는 모든 물건에는 가격이 붙어 있고, 당신은 화폐라는 연결고리(매개수단)를 통해 그 위에 기록된 숫자의 크기(가치척도)에 맞추어 필요한 물건을 구매(지불수단)할 수 있다.

동네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을 사고 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었을 때 주인이 담배 값을 제한 나머지 거스름돈을 당신에게 건네주는 짧은 시간 동안 화폐는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거래를 성사시킨다. 화폐가 지닌 이 세 가지 기능 중 어느 한 개의 조건이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거래는 이루어질 수 없다. 지폐 위에 숫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계산할 수 없을 것이고, 편의점 주인에게 이 종이가 경제적 가치를 지닌 확실한 징표라는 믿음이 없다면 담배를 팔지 않을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화폐에는 종이든, 금이든 형태와 상관없이 그것이 돈임을 증명할 수 있다면 언제든 사용하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기능(가치저장수단)이 한 가지 더 있다. 이 추가기능(옵션)이 있음으로 하여 아무리 오랫동안 쓰지 않고 보관한다 해도 가격(교환가치)이 줄어들거나 훼손되지 않는다. 화폐를 귀한 물건(금이나 은)이나 모방이 쉽지 않은 재질과 형태(지폐)로 만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인류사회가 물물교환 시대를 지나 화폐경제로 접어든 이후 3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씨앗, 조개껍질, 섬유, 돌, 금속, 종이, 플라스틱을 거쳐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디지털화폐(비트코인)에 이르기까지 화폐는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대부분의 금전거래가 실물화폐가 아닌 전자 결재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현대 금융시스템에서 '물질로서의 돈'이 아닌 기록된 내용(기록수단)이 곧 화폐라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온라인 디지털화폐 비트코인(bitcoin) 누리집. www.bitcoin.org
 온라인 디지털화폐 비트코인(bitcoin) 누리집. www.bitcoin.org
ⓒ 비트코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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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는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다. 최근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가상화폐 비트코인(Bitcoin)도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드레스 코드(dress-code)다. 태어난 지 4년밖에 안 되는 이 가상의 네트워크 화폐가 세인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현존하는 화폐 시스템과 상당히 다른 운영원리에 기초해있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은 화폐 발행의 독점적 권한을 가진 각국 중앙은행의 간섭을 받지 않고 개인과 개인이 온라인 선상에서 만나(peer-to-peer) 화폐의 발행과 유통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독립 화폐'라고 할 수 있다.

과도한 화폐 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마치 금본위제처럼) 화폐발행 규모도 일정 수준으로 묶어 두었고 이체 수수료도 없으며 해킹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도 마련되어 있다. 어디든 이 화폐를 받겠다는 곳(가맹점)만 존재한다면 환전할 필요도 없이 즉시 결재가 가능하다. 앞서 정의한 화폐의 기본조건 3가지(매개수단, 가치척도, 지불수단)를 모두 갖추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누구든 또 다른 형태의 비트코인을 만들어 쓸 수 있도록 프로그램 소스(source)도 개방해 둔 상태다. 이쯤 되면 현대 금융자본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현행 화폐제도 및 시스템에게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진배없다.

그러므로 각 나라 정부가 이 화폐의 출연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중국은 법정화폐가 아니라는 이유로 금융기관의 비트코인 사용을 금지시켰고, 노르웨이는 이 화폐를 일반적인 통화(currency)가 아닌 자산(asset)으로 분류, 세금을 물리겠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네덜란드도 비트코인 사용 규제를 담은 법률 개정 작업을 추진하는 등 각국 정부들의 반응은 '금지' 혹은 '규제'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관찰된다. 왜? 이 화폐를 그냥 방치할 경우 자칫하면 자국 내 화폐금융의 기본 질서가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각 나라 정부 및 중앙은행이 비트코인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나친 변동성으로 인한 가치척도 기능 상실 및 투기(혹은 투자) 위험성이고 다른 하나는 해킹, 분실 등으로 인한 거래의 불안정성이다. 실제로 최근 정부의 규제 발표가 이어지면서 비트코인 가격은 널뛰기를 하듯이 심하게 요동을 치고 있으며(최근 최고점에서 거의 반 토막 이하도 추락했다) 만일에 발생할지 모를 거래 위험에 대해서도 특별한 (법․제도적) 안전장치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비트코인이 디지털 시대에 조응하는 제3의 화폐가 될지 네덜란드의 악명 높은 튤립파동(Tulip Mania)처럼 또 다른 투기열풍을 일으키는 거품의 온상이 될지 아직은 단정하기 어렵다. 현재로선 거래의 편의성이라는 측면 외에 기존 화폐를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확고한 명분과 뚜렷한 실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가격 상승이익을 노린 투자(혹은 투기) 대상 상품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더 커 보인다.

가장 큰 아쉬움은 화폐의 공공성(Social value) 부문이다. 개발자(사토시 나카모토, 익명)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비트코인을 만든 이유가 중앙은행을 정점으로 한 기존의 화폐시스템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면, 그래서 사람들에게 '더 나은' 화폐를 선물하고자 했다면, 더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공익적 가치에 충실한 화폐 시스템을 짤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화폐의 기능 중 4번째 특징(옵션)인 '가치저장수단'을 없애거나 줄이는 방법이 그것이다.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돈이 돈을 버는 화폐의 자기증식이 가져오는 폐해를 막고자 했던 시도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안 쓰면 오히려 손해가 나는 이른바 '늙어가는' 돈의 필요성을 주창한 독일 경제학자 실비오 게젤(Silvio Gegell)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창안한 자유화폐(freigeld)는 연초에는 100의 가치였던 것이 연말에는 95로 감가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화폐가 가진 가치저장수단을 거세시킴으로써 돈의 순환성을 극대화하도록 한 것이다. 상품으로 매매되는 돈이 아니라 화폐의 본래적 기능이라 할 수 있는 교환 및 매개수단에 초점을 맞추어 작동되도록 만들어진 지역화폐(local currency) 애호가들이 그의 정신적 후예들이다.

독일 지역화폐 킴가우어 누리집. www.chiemgauer.info
 독일 지역화폐 킴가우어 누리집. www.chiemgauer.info
ⓒ 킴가우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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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 화폐란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경제 사이클 안에서 서둘러 소비되어야 할 대상이다. 돈의 주인이 바뀔수록 구매력은 더 커지며 쌓아두지 않고 신속하게 유통될수록 경제적 가치는 더 많이 생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을 쌓아두고 유통시키지 않는 이에게는 세금(초과보유비용)을 물려야 한다는 것이고, 이 원리에 입각해 만들어진 것이 시간이 갈수록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감가 화폐'다. 대표적으로 현재 독일 뮌헨지역에서 유통되고 있는 킴가우어(Chiemgauer)를 들 수 있다.

만일 비트코인이 지금처럼 고가의 '상품'으로 매매되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숨 가쁘게 돌아다니며 최소한의 수수료(비용)로 화폐의 본원적 기능이라 할 수 있는 지불 및 매개수단으로만 기능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통화를 이용해 돈을 벌어보려는 이들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용상태가 나빠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 본국의 가족에게 돈을 송금하기 위해 살인적인 수수료를 부담해야 하는 가난한 외국인노동자들 수천만 명이 이 화폐를 사용하고 싶어 할 것이다.

제 3세계에 사는 극빈층 가족이 비트코인을 어떻게 수령할 수 있을까? 그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단체를 환전 거래소로 활용하면 된다. 록펠러 재단을 포함해 주로 공익적 활동을 주로 하는 비영리 재단들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안전한 시스템을 깔고 자금을 중개하도록 하면 된다. 사익(매매)을 포기하고 공익적 가치(효과적인 교환수단)에 충실해 투명하게 운영되기만 한다면 국경을 초월한 세계화폐로서의 확장 가능성은 무한할 것이라 여겨진다.

이 '아름다운' 변신을 위해 현재 구축된 알고리즘을 통째로 바꾸는 수고를 해야 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 길이 최초 기존 화폐와 질적으로 다른 화폐를 만들고자 했던 혁신기업가의 이상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시스템 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스템 밖에서 새로운 대안을 만들고자 했으나 내용적으로는 또 다른 탐욕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지금의 화폐구조가 아니라 더 정의롭고 말 그대로 '지속가능한' 화폐로서의 비트코인 말이다.

화폐 없는 사회를 꿈꾸었던 계획경제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고 인류사회에서 교환경제가 유지되는 한 화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화폐의 존치 여부나 구현 형태가 아니라 이 훌륭한 도구를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다. 물어보자. 자연의 법칙처럼 한 평생 사람과 사람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소임을 다한 후 노화되어 죽는 화폐와 끝도 없는 탐욕으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기회만을 노리는 화폐. 이 둘 중 무엇이 양화이고 무엇이 악화일까?

경제학자 케인즈(Keynes)는 화폐란 '현재와 미래를 잇는 다리'라고 말한 바 있다. 화폐는 금융이나 은행보다 훨씬 먼저 만들어진 인류의 오래된 유산이므로 현존하는 금융질서를 반드시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명분이 약한 주장이다. 그러므로 만일 새로운 화폐가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면, 지금보다 더 풍요로운 미래로 가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다면 지금의 화폐시스템과 제대로 '맞장을 떠볼 수 있는' 역사적·도덕적 명분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화폐는 인류의 오래된 미래다.


태그:#화폐, #지역화폐, #비트코인, #실비오 게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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