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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가계부채 1000조 원' 시대입니다. 등록금 때문에, 결혼자금 때문에, 내 집 마련 때문에, 사업자금 때문에…. 빚을 지게 되는 까닭도 각양각색이겠죠. 빚이 많은 사람만 힘든 건 아닙니다. '빚 권하는 사회'에서 빚 없이 살려는 사람도 참 힘듭니다. 이래저래 빚 때문에 달라지는 우리 삶의 모습, 20대·30대·40대·50대 시민기자의 이야기로 직접 한번 들여다봅니다. [편집자말]
2012년 9월 27일 대구시청 앞에서 청년 의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청년실업과 학자금 대출, 고노동 저임금 등의 사슬을 끊는 퍼포먼스를 하고 잇다.
 2012년 9월 27일 대구시청 앞에서 청년 의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청년실업과 학자금 대출, 고노동 저임금 등의 사슬을 끊는 퍼포먼스를 하고 잇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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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이었다. 급여지급일만 되면 상환금이 빠져나가던 학자금 대출 상환 계좌가 이상했다. 수취불가한 이유가 있으니 담당자에게 물어보라는, 무심한 문자만 남았다. 계좌 수취가 안 될 정도로 내가 신용에 금 갈 짓을 했나 싶어 덜컥 겁이 났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번 정부가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국민행복기금 대상자로 선정됐다. 고로 서류심사가 끝나기 전까지 학자금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지 않아도 된다. 한 800만 원 정도 남았는데, 심사에 통과하면 이 중 400만 원 정도를 감면해주는 것이라 하니 거의 로또 수준의 횡재다.

그런데 왜 내가 이 국민행복기금 대상자로 선정됐는지 궁금했다. 일정한 수입이 있고, 그 수입에 맞춰 빚도 꼬박꼬박 갚고 있고, 그렇게 잘 살지도 않지만 그래도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은 아니다. 한국장학재단 직원에게 "왜 제가 국민행복기금 대상자로 선정됐죠?"라고 물어보니 자기는 알 길이 없다고만 했다. 국민행복기금에 물어보긴 해야겠지만 영 귀찮아 그것은 관두었다. 20대의 끝, 어쩌면 서른이 되기 전에 모든 학자금 대출금을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생겼다. 전형적인 포퓰리즘이겠지만, 솔직히, 좋았다.

대학에서 대학 신문 만드는 활동을 했던 나에겐 동기 다섯과 윗 학번 선배 여섯이 있었다. 지금은 소원해졌지만 그때만 해도 꽤 '돈독한' 사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랬나 생각해보니 이유 중 하나가 학자금 대출이었다. 우리는 매 학기 학자금 대출 정보를 공유했고, 매달 상환일이 돌아오면 함께 스트레스 받았다. 한 달 내내 잊고 살다가도 상환일이 다가오면 번뜩 정신이 들고 마음을 묵직하게 만들던, 괜히 가족에게 죄스럽고 어쩐지 미래를 암담하게 느끼도록 만들던 학자금대출은 젊고 싱그럽던 우리들에게 몇 안 되는 고단한 존재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딱히 대학 공부에 관심 없고 이런저런 '활동'에만 관심 있던 나는 시험기간만 되면 온갖 선후배, 동기들의 도움을 받아 밤새 벼락치기 공부를 했다. '올 에이뿔(A+)'을 받겠다는 욕심은 절대 없었다. 최소한 C+, 운 좋으면 B+만 받을 수 있길 바라며 공부했다. 학자금 대출을 받으려면 매 학기 최소 평균 평점 2.5점(C+) 이상은 받아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2006년 여름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내가 받은, 인생 최초의 대학 성적표에는 몇 개의 C와 D를 제외하고 대부분 F라는 성적이 입력돼 있었다. 기분 내킬 때 출석하고, 주제와 상관없이 나 하고 싶은 말만 써서 제출한 과제,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교수님 죄송합니다"로 시작하는 장문의 편지만 남겨놓고 나온 시험 등, 내가 학사 경고를 받을 이유는 충분했다.

나와 같이 대학 신문사에서 활동한, 나의 가장 친한 친구 H 역시 적응 안 되는 대학생활과 남자친구의 군 입대 문제 등으로 방황하다 결국 나와 함께 학사 경고를 받고야 말았다.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했던 우리는 '동시 학사 경고'라는 공동의식으로 더욱 깊은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 학기부터였다. 집안 사정상 둘 다 학자금대출을 받아야 대학에 다닐 수 있었던 우리는 최소 기준 점수인 평균 평점 2.5점이 안 된다는 이유로 학자금대출을 거절당했다. 그 즈음 운 좋게도 얼굴 한번 못 보고 산 막내외삼촌이 "조카 대학 갈 때 아무것도 못해줬다"며 대학등록금을 통 크게 헌납해 나는 그 학기 등록금을 무리 없이 납부할 수 있었다. 문제는 H였다. 부모님께 말 못하고 끙끙대다 결국 분할납부를 신청했다. 한 학기 360만 원가량 하는 등록금을 학기 중 3번에 걸쳐 나눠 낼 수 있도록 한 규정이다.

동생과 동시에 학자금대출 받은 날, 아빠가 사준 '눈물의 삼겹살'

사극 촬영 중 촬영장 바닥에 앉아 기다리는 보조출연자들. 보조출연자들의 일 중 팔 할은 '대기'다. 연기자 위주로 화면을 잡는 바스트샷이 끝나고 다음 신으로 넘어갈 때까지 기다린다.
 사극 촬영 중 촬영장 바닥에 앉아 기다리는 보조출연자들. 보조출연자들의 일 중 팔 할은 '대기'다. 연기자 위주로 화면을 잡는 바스트샷이 끝나고 다음 신으로 넘어갈 때까지 기다린다.
ⓒ 이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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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H가 달라졌다. 갑자기 공부도 열심히 했고(원래부터 공부를 잘 하는 친구였으니 마음만 잡는다면 문제가 없었다) 매주 토요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학교 신문 조판과 각종 외부행사들을 다 책임지고 참석하면서도, 일정이 끝나자마자 지하철 첫차를 타고 보조출연자 알바를 하러 갔다. '거리녀 1', '타로점녀 1', '불륜녀 2' 같은 역할을 했다. 새벽에 출발하면, 한 장면을 찍을 때까지 하루 종일 밖에서 떨어야 했다. 육체적으로 고된 일은 아니었다만, 하루 종일 추운 바닥에서 촬영을 기다리는 일은 꽤 피곤한 일임이 분명했다.

그뿐 아니다. 커피 값 천 원을 아끼기 위해 H는 투명한 비닐봉지에 집에서 먹는 커피 가루를 싸서 가지고 다녔고, 밥도 공금으로 시켜먹는 밥 외엔 잘 먹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바깥 밥을 사먹어야 할 때면 700원짜리 삼각김밥으로 하루를 버텼다. H는 결국 그 학기 등록금을 모두 냈고, 그때부터 절대 학사경고를 받을 만할 행동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학교에 다니는 내내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그래도 나는 이런저런 다행스런 이유로 세 학기 정도'밖에' 학자금대출을 받지 않았는데, H는 학사경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그 한 학기를 뺀 일곱 학기를 모두 학자금대출을 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20대 끝자락에서 H는 지금도 학자금대출을 갚고 있다. 한 달 월급의 3분의 1 정도를 낸다고 한다.

한 달 상환액이 워낙 많으니 얼마 걸리지 않아 H의 학자금대출 상환은 모두 끝날 것이다. H는 다만 앞으로 결혼을 하고 신혼집을 꾸리면 더 큰 빚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중압감과, 빚이 줬던 무게감에 덜컥 겁이 나더라고 말한다. H와 나, 그리고 내 주변 친구들 대부분 꽤 나쁘지 않은 연애를 하고 있음에도 쉽게 결혼을 선택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득 2007년 어느 날이 떠오른다. 나는 2학년 2학기 학자금대출을, 동생은 1학년 2학기 학자금대출을 신청한 날이었다. 뜬금없이 아빠가 갑자기 우리를 집 앞 삼겹살집으로 불러 삼겹살을 사주더니 "학자금대출을 받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별로 속상하지도, 섭섭하지도 않았는데 아빠는 괜히 그런 말을 해서 사람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때 나와 동생, 엄마와 아빠가 마주 앉아 먹던 삼겹살의 묵직한 맛이 떠오른다. 입 안에서 상추며 마늘이며 고기가 버석하게 말라 겉도는 느낌이었다고 기억한다. 아주 질 좋은 제주도산 흑돼지였지만 그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 즈음 아빠는 사업에 실패해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차라리 이 비행기가 사고 나, 나는 자연스럽게 죽고 그 보상금으로 애들 등록금이며 생활비며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당시 아빠가 꽤 심한 우울증과 외로움을 겪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생각이었겠지만, 우리 집에, 우리 가족에게, 그리고 내게 닥친 빚의 무게가 우리들의 삶을 아주 고단하고 힘겹게 만들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 견디기 힘든 삶의 무게를 무엇으로 걷어낼 수 있을까.


태그:#빚, #가계부채, #학자금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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