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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 국제공항에서 맨 먼저 눈에 띄는 글귀가 '멘소레(めんそれ)'다. '어서 오세요'라는 뜻의 오키나와어다. 마치 제주 공항 입구의 'ᄒ·ㄴ저옵서예'처럼. 다만, 멘소레라는 인사말은 관광지는 물론 여행 중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다. 제주어가 빠르게 잊혀져가는 현실에서, 일상 속에서 자신들의 언어를 꿋꿋이 지켜내려는 오키나와인들의 살뜰함이 느껴진다.

굳이 국적을 묻지 않는 다음에야 오키나와인들은 자신들을 일본인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과거 중계무역을 통해 번성했던 류큐 왕국을 강제 병합하고, 태평양전쟁 당시 옥쇄를 강요한 일본에 대한 역사적 상흔이 깊이 각인된 탓이다. 더욱이 전쟁 후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미국의 신탁통치령으로 내팽개쳐졌고, 1972년 반환된 후 지금까지도 주일 미군의 넷 중 셋이 주둔하는 군사기지로 생활 터전을 떼어준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예나 지금이나 오키나와는 내지(內地, 일본 본토)에 있어서 '입술'과 같은 존재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전시엔 전략적 요충지이자 최후의 방어선으로, 평시엔 사회적 갈등의 완충 장치로서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주민들을 상대로 한 주일 미군의 범죄 등 각종 사고가 빈번해 폐쇄와 이전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음에도,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의 교두보로 기꺼이 터를 제공하고 되레 항의하는 주민들을 다그치는 것은 그래서다.

한편,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졌을 때, 소개된 피해 주민들의 대체 거주지로 오키나와가 지목된 것도 일본의 오키나와에 대한 시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시마우타에서 노래한 것처럼 '저녁의 고요함 같은 사소한 행복'을 꿈꾸던 류큐 왕국을 무력으로 병합한 이래, 내지의 필요에 의해 '감탄고토(甘呑苦吐)'의 대상이 된 곳이 곧 오키나와다.

오키나와에 대한 일본의 남다른 '구애'

겉으로 보기에 오키나와에 대한 일본의 '구애'는 남다른 구석이 있다. 일제강점기 일선동조(日鮮同祖)의 억지를 부리듯, 오키나와인들과 내지인들의 역사적,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주장과 정책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것은 중국이 대국굴기와 중화민족을 부르짖으며 변방의 소수민족들을 동화시키려는 것과도 퍽 유사하다.

예컨대, 일본 전체 인구의 1/100도 안 되는 변방의 현에 불과한 오키나와의 '슈레이몬(守禮之門)'이 2천 엔짜리 화폐의 도안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도 태평양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무너진 것을 1958년에 새뜻하게 복원해 놓은 궁성의 작은 문에 불과하다. 다른 지폐가 모두 인물을 도안으로 삼고 있는 것에 견주면 낯설기까지 하다.

일본 화폐 2천 엔짜리의 도안으로 사용되고 있다.
▲ 슈리성의 정문, 슈레이몬 일본 화폐 2천 엔짜리의 도안으로 사용되고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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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최근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내부는 일본 가옥 구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해 어색하다.
▲ 슈리성의 정전 태평양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최근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내부는 일본 가옥 구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해 어색하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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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지난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슈리성(首里城)' 유적에서도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치 중국이 발해의 궁성 유적을 발굴해 복원한답시고 북경의 자금성과 흡사하게 꾸며 놓은 듯한 모습이다. 성곽과 건물 외벽 등 겉모습은 류큐 왕국인데, 속은 전형적인 일본식으로 다듬어진 모습이라고나 할까.

궁성의 정전 내 방마다 다다미를 깐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서화와 꽃병 등 장식물을 놓기 위해 바닥을 한 단 높인 '토코노마(床の間)'까지 갖춰놓은 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일본의 여느 가옥 내부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토코노마는 14세기 중엽 무로마치 막부가 번성한 시기에 무사들의 가옥에서 기원한 것인데, 류큐 왕국의 궁성에 그대로 대입해놓은 건 누가 봐도 억지스럽다.

태평양전쟁 당시 폐허가 됐던 슈리성의 내부가 일본 가옥처럼 복원돼 있는 것은 류큐 왕국과 내지 문명이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오키나와를 찾은 외국인들에게는 설령 낯선 모습으로 비칠지언정, 관광객들 중 태반인 일본인들은 슈리성에서 류큐 왕국의 자취를 느끼는 게 아니라 그들 내지 문명의 확산과 번성에 감동하게 될 것이다.

일본보다는 중국의 성곽과 유사한 모습으로, 현재도 복원 중에 있다.
▲ 슈리성 성곽과 나하 시내의 모습 일본보다는 중국의 성곽과 유사한 모습으로, 현재도 복원 중에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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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오키나와에서 류큐 왕국의 옛 모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1879년 일본에 강제병합되기 전까지 450여 년간 주민들의 역사적 근간이자 터전이었던 류큐 왕국은 일제가 저지른 태평양전쟁으로 마지막 숨통마저 끊기고, 또 그렇게 일본에 의해 박제된 관광상품으로 전락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몇 군데의 성터 유적만이 옛 영화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참혹했던 태평양전쟁의 상흔을 서둘러 '세탁'해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일본 정부와 자본들의 거침없는 행보는, 그렇듯 류큐 왕국의 본 모습을 지워내고 오키나와 특유의 전통 문화를 송두리째 흔들어놓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오키나와 곳곳은 굴삭기와 대형 트럭이 종일 굉음을 내는 공사장이다. 오로지 도로를 넓히거나 해안에 리조트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도시의 콘크리트도 과거를 덮기에 급급한 모양새다.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한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이른바 '슈가로프(Sugar Loaf, 사탕 언덕)'는 도시의 건물 숲에 포위되어 이름조차 잊힐 위기다. 수천 발의 폭탄 세례로 폐허가 됐다가 지금은 나하 최고의 번화가로 변모하여 '기적의 1마일'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국제거리는 관광객들로 연일 흥청거리고 있다.

그러한 망각의 변화 속에 오키나와의 전통 문화도, 주민들의 삶도 시나브로 고립되고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류큐무라(琉球村)'다. 우리나라로 치면 민속촌이라 할 수 있는데, 도시화와 개발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몰린 오키나와 각지의 전통 가옥들을 한데 옮겨놓았다. 집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모아놓고 보니 흡사 영화의 세트장 같다.

오키나와 각지에 있던 원주민 가옥들을 한데 모아놓았는데, 현재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지는 않다.
▲ 류큐무라의 원주민 가옥 오키나와 각지에 있던 원주민 가옥들을 한데 모아놓았는데, 현재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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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을 막고 복을 가져다준다는 류큐의 영물로, 전통 가옥마다 지붕 위에 세워져 있다. 현재 오키나와에서 판매하는 대표적인 기념품이기도 하다.
▲ 류큐의 영물, 시사 재앙을 막고 복을 가져다준다는 류큐의 영물로, 전통 가옥마다 지붕 위에 세워져 있다. 현재 오키나와에서 판매하는 대표적인 기념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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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로 지정된 집집마다 주민들이 나와서, 술과 도자기, 손수건 등을 관광객들을 상대로 팔고 있는데, 직접 살지 않아 온기가 빠져나간 을씨년스러운 공간에 종일 홀로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질 정도다. 마치 이주민들에게 터전을 빼앗긴 채 쫓겨나 그들이 그어놓은 보호구역에 고립되어 살아가는 아메리카 인디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의 생활모습이 볼거리가 되고, 그들의 일용품이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으로 팔리는 그곳에서 오키나와인들의 가까운 미래를 짐작해보게 된다. 집집마다 지붕 위에서 찾는 이들에게 인사하듯 서 있는 도깨비 모양의 '시사(シーサー)'도 지붕 위에서 내려올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류큐무라 인근에 미군 부대와 '아메리칸 빌리지'라는 놀이공원이 자리한 것이 차라리 얄궂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류큐 왕실의 정원 '시키나엔(識名園)'을 산책한 후 저녁식사를 했다. 시키나엔은 류큐 왕국의 영화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몇 남지 않은 유적이다. 낯선 먹거리도 여행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보탬이 된다는 생각에, 어느 관광지 안내 팸플릿에서나 소개돼 있는 오키나와 전통의 가정식 백반을 주문했다.

그릇 등 상차림은 일본식이되, 음식의 재료와 맛은 대만이나 중국에 훨씬 가까웠다. 단맛이 훨씬 덜한 반면, 반찬이 전반적으로 느끼해서 입맛에 닿지는 않았다. 이전의 일본 여행 중 맛본 음식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맛이다. 깔끔하다며 일본 음식을 나름 좋아했던 아내도, 아이들도 내켜하지 않았다. 심지어 따로 주문한 스시조차도 일본에서 맛본 것과는 달랐다.

역사도 전통 문화도 빠른 속도로 일본에 동화되어가고 있지만, 사람들의 입맛만큼은 아직도 그대로인 것 같다. 오키나와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 중 다수가 대만인들이고, 그들은 음식에서 오키나와와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할 정도라고 한다. 하긴 지리적으로 바로 이웃한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듯하다.

류큐로 남으려는 오키나와는 과연 온전한 일본이 될 수 있을까. 류큐 왕국이 과거 중국과 일본, 조선, 그리고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중립적이고 평화롭게 지내온 것처럼, 지금의 오키나와도 그런 미래를 꿈꾸고 있지 않을까. 주민들 네다섯 중 한 명은 여전히 일본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으니.

아무튼 태평양전쟁의 한복판에서 미국과 일본에 의해 분탕질 당했던 쓰라린 기억을 잊지 않고 '류큐'라는 이름과 그들의 전통 문화가 굳건하길 바란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이곳 오키나와를 찾아올 때에도 그들과 환한 얼굴로 '멘소레'라는 인사말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태그:#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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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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