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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년 7월 23일 태풍 '페이'로 인해 여천군 남면 소리도 해상에서 14만 톤급 호남정유 소속 유조선 '씨프린스호'가 좌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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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9년 전, 내 고향 바로 옆 섬마을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옆 섬마을 인근에서 '국내 최대 해양오염사고'로 기억되는 '씨프린스호 침몰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사고가 발생한 섬은 내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한 소리도(일명 연도)다. 지금도 여객선을 타고 외삼촌댁에 놀러갔던 어릴 적 기억이 생생하다. 먼 바다에 속하는 소리도는 옛날부터 유명한 어장터였다. 암초가 발달해 어종이 풍성했고 철따라 돌돔, 광어, 대형 볼락 등의 어종이 군무를 이뤘다. 그래서 섬을 버리고 육지로 떠난 섬 주민들이 얼마 못 가 다시 귀향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고기를 많이 잡는 탓에 손에 돈 마를 날이 없었다. 말하자면 소리도는 조상대대로 내려온 '천혜의 보고'였던 셈이다.

소리도를 삼켜버린 '씨프린스호' 대재앙

하지만 1995년 여름, 섬은 삽시간에 검은 그림자에 휩싸였다. 그해 7월 23일 태풍 '페이'가 들이닥쳤고 여천군 남면 소리도 해상에서 14만 톤급 호남정유 소속 유조선 씨프린스호가 좌초됐다. 이 배는 당시 호남정유(현 GS칼텍스) 원유부두에 원유하역을 위해 입항했다가 심한 파도 때문에 하역을 못했다. 이후 태풍을 피하기 위해 소리도 밖 해상으로 나가던 중 기관고장을 일으켜 암초에 얹혀 결국 대형 참사를 일으켰다.

유출된 원유는 태풍의 진로에 따라 급속히 번져 나갔다. 기름띠는 여수반도는 물론 멀리 경상북도 동해까지 오염시켰다. 천문학적인 피해를 기록했다. 회사 측은 벙커C유 700톤이 방출되었다고 발표했지만 나중에 5035톤이 유출된 것으로 최종확인 되었다.

이 같은 내용은 1996년 여수YMCA 이상훈 총장(당시 해양오염 여수여천시민대책본부 홍보부장)이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에 기고한 '연이은 기름유출사고로 죽어가는 여수바다'에 잘 나와 있다.

당시 씨프린스호 사고 발생 뒤 "천재지변이냐 인재냐"는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후자가 설득력을 얻었다. 그 근거는 유조선이 심한 태풍 속에서 늑장을 부렸다는 것이었다. 물론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태풍도 원인 중 하나이긴 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정박하는 비용을 아끼려 무리해서 하역을 하려다가 피신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데이터로도 확인됐다. 실제 태풍의 시간대별 이동경로와 씨프린스호의 이동시간을 비교한 결과, 이미 태풍의 규모와 진행시간을 감지할 수 있었던 시각에 배가 원유항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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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년 7월 23일 태풍 '페이'로 인해 14만 톤급 호남정유 소속 유조선 '씨프린스호'가 좌초됐다. 주민들이 안도 이야포 해안에서 기름방제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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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에 따르면, 해양에 유출된 기름은 사고 발생 48시간 이내에 90% 이상 회수하지 못하면 그 피해(경제·환경)가 엄청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씨프린스호 사고 발생 다음날 오후 어민들은 배 513척을 동원해 방제활동에 나섰으나 호남정유해운 측이 비용문제로 이리저리 미루다 결국 사고 발생 48시간이 지나서야 방제작업이 시작됐다.

기름띠는 조류를 따라 나의 고향인 안도는 물론 금오도와 남해바다로 떠내려갔다. 시커먼 기름띠는 온 섬의 해변으로 밀려들었다. 서고지 마을 가두리 양식장을 둘러싼 오일펜스는 수면 위로 20~30cm 밖에 올라오지 않아 파도와 함께 기름이 넘쳤다. 그나마 확보된 오일펜스가 부족해 어민들은 확산되어가는 기름덩어리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유화제 과다사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남겼다. 당시 방제선은 여론과 국민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엄청난 양의 유화제를 무차별 살포했다. 이로 인해 해마다 유례없는 적조가 남해안을 뒤덮었다. 몸살을 앓던 바다가 적조를 통해 아픔을 호소했다.

특히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은 사고 수습에 나섰던 관계기관이 사고 회사로부터 뇌물을 챙기다 적발된 일이다. 당시 사고수습대책본부장인 군수를 비롯해 기관장(여수·통영해양경찰서장, 여수해운항만청장, 여수경찰서장 등)과 지역 모국회의원이 줄줄이 사법처리 되었다. 심지어 마을 주민들도 감옥에 잡혀갔다. 씨프린스호 사고가 남긴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업체 측은 사고 직후 유조선이 4000여억 원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보험에 들어 있으므로 보상관계는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씨프린스호 사고의 경우 어민 피해보상 청구액이 약 735억 원임에도 불구하고 보상액은 154억원, 즉 보상율 20%에 그쳤다. 피해입증을 바다만 믿고 살아온 어민들에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해양오염 상습범 불명예 오명 벗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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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덕마을에서 방제작업을 벌이고 있는 자원봉사자와 주민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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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 사건이 터진 지 100일 정도 지난 11월 17일, 제2의 사고가 터졌다. 이 회사 소속 유조선 '호남사파이어호'가 원유부두에 기름 하역을 위해 접안하던 중 조타수 실수로 배가 부두 돌출부에 부딪쳐 선체가 찢어지는 바람에 1200톤의 원유가 유출됐다(관련기사 : 여수 기름유출, 19년전 사파이어호 사고와 '판박이'). 끔찍했다.

당시 이상훈 총장은 한 기고문에서 "업체 측과 여수해양경찰서는 사고 다음날인 11월 18일, 사고로 인해 1200톤의 원유가 유출되었다고 발표했다"며 "그런데 다음날 느닷없이 유출량이 30톤으로 줄어 수정 발표되었다, 또 다음날은 80톤으로 약간 올렸다, 대책본부 등 시민들의 안면이 거의 굳어질 즈음인 다음날 다시 200톤이라고 조금 더 올려 발표했다"고 밝혔다.

결국 기업의 안하무인은 시민단체의 강한 반발을 샀다. 사고 발생 2주 후 'LG규탄 및 제품불매운동 선포식'을 시작으로 12월 '범시군민 결의대회'가 열렸다. 시위는 들불처럼 번졌고 기업은 '해양오염 상습범'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후 회사의 태도는 달라졌다.

지금껏 발생한 해양오염사고 중 가장 모범적인 수습 사례는 25년 전인 1989년 미 알래스카 해상에서 발생한 유조선 엑손발데스호 좌초사고다. 당시 사고 회사는 유조선이 좌초하자  즉각 '책임지고 방제를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정부로부터 방제의 전권을 자청한 뒤 사고 현장에 종합방제기구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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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달 31일 여수에서 기름유출 사고가 발생한 가운데, 유조선이 들이받은 원유2부두가 처참히 부서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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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사고 회사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제계획을 수립해 기름 묻은 새의 깃털까지 일일이 닦아 날려 보냈다. 또 새로운 새들이 날아들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루 종일 경비행기를 비행시키는 등 치밀하게 방제활동을 벌여 결국은 사고 해역의 생태계를 거의 완전히 복원한 사례는 유명하다.

하지만 세계 메이저급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여수산단은 환경오염 사고가 나면 아직도 제대로 수습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씨프린스호 사고를 시작으로 호남사파이어호와 이번에 발생한 우이산호 사고는 판박이다.

지난 달 31일 전남 여수시 GS칼텍스 원유2두부에서 발생한 우이산호 사고로 164㎘의 원유가 유출된 것으로 밝혀졌다. 당초 사고 직후 GS칼텍스는 800ℓ의 원유가 유출됐다고 주장했으나, 불과 며칠만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특히 화가 나는 건 사고를 낸 업체 등이 수습과정 초기에 사고유형과 유출량을 속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고를 축소하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이런 대형 환경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아쉬운 것은 사고대응센터의 부재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해양사고, 정부 차원의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