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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태실 주변의 인문지리

퇴계의 흔적
 퇴계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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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년)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溫溪里)에서 태어났다. 온계라는 이름은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 명칭에서 나왔다. 온계라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물이 따뜻했고, 예로부터 온천이 있었다고 한다. 온계리의 현재 명칭은 온혜리(溫惠里)다. 온혜리는 도산면소재지가 있는 곳으로, 안동과 춘양을 잇는 35번 국도변에 위치한다.

마을 앞을 흐르는 온혜천은 용두산(664m)에서 발원해 운곡리와 온혜리를 지나 토계천(兎溪川)과 합류한다. 토계를 퇴계(退溪)라고도 부르는데, 이황의 호 퇴계는 바로 이 하천 이름에서 따 왔다. 토계천은 분천리((汾川里)에 이르러 동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토계리를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분천은 분강촌(汾江村), 부내로도 불리며, 영천이씨 집성촌이다. 분천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이 <어부가>를 지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다.

토계리의 퇴계 종택
 토계리의 퇴계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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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나이 50세 되던 1550년 토계리에 한서암(寒栖庵)을 짓고 새로운 거처로 삼았다. 그 후 퇴계는 한양과 퇴계를 오가며 벼슬을 했다. 성균관 대사성, 양관 대제학, 예조판서,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이들 벼슬자리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그것은 퇴계가 정치보다는 학문에 좀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60세 되던 1560년에 그는 낙동강변에 도산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한다.

그리고 1569년 3월 도산으로 돌아온 퇴계는 인생의 마지막 정리를 한다. 4월 <성학십도(聖學十圖)을 간행하고, 이듬 해 11월까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심성정(心性情)에 대한 편지를 계속 주고받는다. 그리고는 12월 8일 세상을 떠난다. 선조는 퇴계를 영의정에 추증했고, 이듬해인 1571년 3월 집에서 멀지 않은 건지산(搴芝山) 남쪽 기슭에 장사지낸다. 1574년 낙동강변에 도산서원이 지어졌고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1576년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600년 문집이 간행되었다. 

퇴계 이황은 어떤 사람인가?

퇴계 표준영정
 퇴계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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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은 진사를 지낸 진보이씨 이식(李埴)의 일곱째 아들이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이우(李堣)로부터『논어』를 배웠다고 한다. 열 네 살부터 도연명의 시와 주자학에 심취했고, 늦은 나이인 스물한 살 때 진사 허찬(許瓚)의 딸과 결혼했다. 스물일곱 살이 되는 1527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11월 아내 허씨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맞이한다.

1530년 봉사(奉事) 권질(權礩)의 딸과 재혼했고, 1532년 문과 별시 초시에 합격한다. 그래서 성균관에 유학해 공부했고, 1534년 3월 식년 문과에 급제한다. 4월에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올라, 1569년 우찬성에 이르게 된다. 그는 산수를 좋아해서 유람을 많이 했고, 지방관도 강원도 고성, 충청도 단양, 경상도 풍기 등을 선호했다.

단양의 도담삼봉
 단양의 도담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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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단양산수가유자속기(丹陽山水可遊者續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 등을 통해 그의 자연관을 알 수 있고, 『계몽전의』,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인심경석의』, 『사단칠정분리기서』, 『성학십도』 등을 통해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다. <단양산수기>에 보면 퇴계는 1548년 6월 상진 나루에서 도담삼봉을 지나 석문으로 유람한다. 도담삼봉과 석문은 단양팔경 중 두 가지 절경이다.

"나루를 건너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큰 바위 봉우리 세 개가 홀연 나타난다. 물 가운데 높이 솟아 있어 이를 도담이라 부른다. 또 서쪽 벼랑으로는 멋진 풍경이 보이는데 기이한 모습의 석문이다. 이곳은 벌써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고 구경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아온 곳이어서 굳이 내 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풍기의 백운동 서원
 풍기의 백운동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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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년 11월 풍기군수가 된 퇴계는 평생의 소원이던 소백산 유람을 계획한다. 그런데 겨울을 지나 봄이 될 때까지 일이 많아 산에 오르질 못한다. 1549년 4월 봄기운이 온 산에 퍼질 때에야 비로소 그는 소백산문으로 들어간다.

"지난해 겨울에 인부(印符)를 차고 풍기에 부임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주인이 되니, 속으로 기쁘고 다행스러워하며 오랜 소원을 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난 겨울과 봄 이래로 일이 있어서 백운동에 갔다가 그때마다 산문(山門)도 엿보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세 차례나 되었다. 4월 신유일에 며칠째 내리던 비가 막 개니 산빛이 목욕한 것 같았다. 이에 백운동서원에 가서 유생들을 만나보고 그대로 유숙하였다. 이튿날 드디어 산에 들어갔는데, 진사 민서경(閔筮卿)과 그의 아들 응기(應祺)가 따라나섰다. 죽계(竹溪)를 따라 10여 리를 올라가니, 골짜기는 그윽하고 깊으며 숲 속은 아늑하고 아름다웠다. 때로 물이 돌 위로 흐르며 부딪히는 소리가 골짜기 사이로 울려 퍼졌다."

심학과 경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남긴

심학과 경학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심학과 경학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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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전의 유학에 있어 가장 많이 읽힌 책은 소학이었다. 소학에서는 천도(天道)를 이루기 위해 착한 성품을 지켜나갈 것을 말하고 있다. 천도를 상징하는 원형리정(元亨利貞)과 인성을 대변하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근본을 깨닫고 이를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소학에 대한 퇴계의 입장은 <성학십도> '제3소학도'에 도표로 표현되어 있다.

도표에서 반복되는 개념이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이다. 이를 풀이하면 가르침을 받고, 인륜을 밝힌 다음, 공경을 실천하자는 것이 된다. 그리고 퇴계는 이러한 토대 위에 대학을 논의하고 심학을 논의한다. '제4대학도'에서 퇴계는 본체(本體)인 명명덕(明明德)과 말용(末用)인 신민(新民)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체와 용을 통해 얻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는 지극한 선(至善)에 이르는 것이다.

심통성정도
 심통성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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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심통성정도(第六心統性情圖)'에서 퇴계는 '성과 정을 거느리는 것이 마음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성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상태(寂然)를 말한다. 그러므로 성은 마음의 본체(體)다. 정은 마음으로 느껴서 서로 통하는(感通)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정은 마음의 드러남(用)이다. 마음이 성을 거느리기 때문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성이 되고, 마음이 정을 거느리기 때문에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정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자주 쓰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사단은 이(理)가 발(發)하고 기(氣)가 따르는(隨) 형태로 나타나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말한다. 칠정은 기가 발하고 이가 탄(乘) 형태로 나타나는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을 말한다. 그리고 퇴계는 배우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내용을 알아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성을 기르고, 정을 절제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노송정 고택에서 퇴계의 흔적 찾기

노송정 고택
 노송정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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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삶과 사상에 대해 생각하면서 퇴계 태실로 가다 보니 입구에 멋진 소나무가 보인다. 소나무를 지나 바깥마당에 이르면, 문간채가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고 가운데 출입문이 있다. 출입문 위에는 성림문(聖臨門)이라는 편액이 보인다. 이것은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이 퇴계 사후 써 붙였다고 한다. 성인이 태어난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문을 들어가면 사랑채가 보인다. 사랑채에는 노송정(老松亭)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노송정은 이 집을 지은 이계양(李繼陽)의 호로 퇴계의 조부가 된다. 이계양은 이 집을 1454년에 지었다고 한다. 노송정 고택으로도 불리는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그런데 두 칸짜리 방 앞으로 한 칸짜리 툇마루를 만들고 3면에 헌함(軒檻)을 둘렀다. 지붕은 본채와 달리 맞배지붕이다. 나는 계단을 올라 대청마루로 들어간다.

해동추로 편액
 해동추로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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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에는 두 개의 편액과 두 개의 기문(記文)이 걸려 있다. 편액에는 해동추로(海東鄒魯)와 산남낙민(山南洛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해동추로는 바다 건너 동쪽의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곳이라는 뜻으로, 퇴계선생의 고향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산남낙민은 산 남쪽에 낙읍과 민을 말한다. 낙읍은 정호 정이 형제가 태어난 곳이고, 민은 주자가 태어난 곳이다. 그러므로 이들 현판은 퇴계 선생이 동방 유학의 최고봉임을 표현하고 있다.

두 개의 기문 중 하나는 노송정 이계양이 청량산 용수사에서 공부하고 있는 두 아들 식과 우에게 보낸 권학시다. 공부는 힘든 일이지만, 충효의 바탕이 됨을 가르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퇴계 선생이 벼슬에 나갔다 고향 온계(溫溪)로 돌아와 가족을 만난 감회를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이 '온계서족운(溫溪敍族韻)'이다.

권학시 기문
 권학시 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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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빠르게 흘러 세모에 가까워졌구나,                    節序駸駸歲暮天
깊은 산 절 문 앞에는 눈이 켜켜이 쌓여 있겠지.             雪山深擁寺門前
찬바람 들어오는 창문 아래서 어려운 공부를 생각하며    念渠苦業寒窓下
때때로 벼슬길에 오르는 희망찬 꿈을 꾸어라.                淸夢時時到榻邊
  […]
너희들이 지금 애써 공부하는 것을 한탄하지 마라.         莫嘆汝今勤苦業
훗날 부모에게 무한한 효를 행하게 됨을 알지니.            定知他日孝無疆

안채 장독대와 소나무
 안채 장독대와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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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왼쪽으로 안채가 있는데, 문이 닫혀 있다. 대문을 통해 들여다보니 ㅁ자형 건물이다. 이곳 안채에서 퇴계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안채를 퇴계선생 태실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현재 퇴계 후손인 이창건 최정숙씨 부부가 살고 있다. 나는 건물 밖을 한 바퀴 돌아본다. 집 뒤로 장독대와 울창한 소나무숲이 보인다. 노송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앞으로 노송정이라는 당호와 잘 어울릴 것 같다.


태그:#퇴계 태실, #퇴계 이황, #<성학십도>, #노송정 고택, #해동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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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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