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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와 대만)를 공부하는 의미는 아편전쟁 이후의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로 알고, 같은 일제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던 지역의 역사적 성격을 연구하게 됨으로써, 앞으로 우리가 무엇에 대해 누구와 함께 싸워야 하는가... 그리고 전략이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이번 오키나와 여행에서 길잡이를 해 주신 서승 교수님은 여행에 앞서 우리가 오키나와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오키나와 여행의 기회가 왔다. 오키나와에 대해 잘 모르는 필자는 단순히 3.11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부터 '안전한 일본', '동양의 하와이'라는 수식어가 여행 결정에 큰 몫을 했다. 그리고 '평화감성여행'이라는 테마는 의미 있는 역사현장 답사를 좋아하는 필자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일본어를 전공한 필자는 일본의 역사와 정치, 한일 관계에도 관심이 많다. 최근 오키나와에서 일어나고 있는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에 대해 눈 여겨 보고 있던 차에 직접 현장에 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번 여행의 화룡점정은 동아시아 인권·평화 운동가 '서승 교수님'이 길잡이를 해 주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난 1월 25일부터 28일 오키나와 평화감성여행을 다녀왔다.

오키나와는 관광뿐 아니라 전지훈련 장소로도 사랑받는 곳이다. 나하 공항주차장에 한국 프로야구 팀 로고가 쭉 걸려있다.(좌) 우리는 관광 대신 평화를 찾아 오키나와에 왔다.(우)
 오키나와는 관광뿐 아니라 전지훈련 장소로도 사랑받는 곳이다. 나하 공항주차장에 한국 프로야구 팀 로고가 쭉 걸려있다.(좌) 우리는 관광 대신 평화를 찾아 오키나와에 왔다.(우)
ⓒ 김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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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나하 공항에서 만난 서승 선생님은 본격적인 출발에 앞서 여행단에게 오키나와 방문 경험을 물으셨다. 17명의 동행 중 손을 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오키나와 초짜였던 것이다.

"제일 처음 방문했을 때 제대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오키나와를 '제.대.로 본다'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조금이나마 뇌리를 맴돌던 달콤한 오키나와의 영상은 일시 정지 버튼이 작동했다. 이어지는 교수님의 오키나와 역사에 대한 설명은 긴장과 함께 새로운 기대감으로 코드전환을 시켰다. 미리 이야기 하자면, 관광 책자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코스를 주로 다니는 여행이었다.

아픔까지도 닮아 있는 오키나와와 한국

오키나와는 본섬과 사키시마, 미야코지마 세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에는 '아마미'라는 섬까지를 포함해 류큐열도를 이루었지만, 현재 아마미는 규슈의 가고시마 현에 편입되어 있다. 오키나와 본섬만 하면 제주도와 크기가 거의 비슷하다. 오키나와와 제주도의 유사점은 이 외에도 많다. 온후한 기후 조건, 돼지고기 문화, 그리고 섬 지역 특유의 여성 중심 사회와 샤머니즘 신앙을 갖고 있는 오키나와는 첫 방문임에도 매우 익숙한 인상을 준다.

지리·문화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면에서도 우리와 많은 유사점이 있다. '류큐 왕국'이라고 하는 독립국을 이루고 있던 과거의 오키나와는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또한, 태평양 전쟁 마지막 단계에서 '오키나와 전쟁'이라는 일본에서 유일한 지상전이 벌어져 큰 희생자를 낳은 비참한 전쟁을 겪었던 역사가 있다. 그리고 세계 2차 대전 후 냉전 시대에는 오랜 기간 동안 미군에 의한 점령기를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역사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전쟁에 대한 인식, 반전 의식이 일본 본토 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높은 이유의 전제가 된다. 한국과 비슷한 전쟁의 역사, 미군정의 역사, 그리고 미군 기지 문제들로 인한 현재도 이어지는 여러 문제들까지… 오키나와가 좀 더 가깝게 다가오는 듯했다.

'구 해군사령부참호', 오키나와의 역사에 첫 발을 내딛다

인천 공항을 출발해 2시간 15분 정도 지나 오키나와 나하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수은주가 영하에 머무르는 1월. 서울에서 날아간 우리는 따뜻한 오키나와의 날씨에 두꺼운 외투를 일제히 벗어 던졌다. 시차가 아닌 25도 이상의 기온 차, 따뜻한 해풍은 일상을 벗어난 상쾌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오키나와 여행을 시작했다. 첫 번째 목적지를 향해 15분 정도 달린 버스는 오키나와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높은 언덕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일본 가옥들, 높지 않은 건물들 너머 멀리 보이는 바다는 여행자의 감각을 되살아나게 해주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구 해군사령부참호'였다.

'구 해군사령부 참호'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오키나와 시내와 바다. 이곳은 미군의 방어와 공격을 위해 전략적으로 선택한 곳이다.
 '구 해군사령부 참호'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오키나와 시내와 바다. 이곳은 미군의 방어와 공격을 위해 전략적으로 선택한 곳이다.
ⓒ 김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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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해군사령부참호'는 1945년 4월에 일어난 '오키나와 전쟁' 당시 일본 해군 사령부로 사용됐던 참호다. 이 참호는 오키나와 전쟁 때 사용된 다른 참호들과는 달리 직접 산 중턱을 파서 만들었다.

오키나와는 수만 년 전에 산호가 융기되어 만들어진 섬이다. 거대한 산호로 이루어진 섬에는 오랜 기간 빗물에 녹아 만들어진 천연 동굴이 많이 있다고 한다. 다른 참호들은 이런 천연 동굴을 주로 활용했다면, 해군사령부참호는 유리한 입지 조건을 선택해 전략적으로 만든 참호인 것이다.

이 장소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오로쿠(小禄)비행장(현재의 나하공항)에서 가까운 높은 언덕에 위치해 주변을 둘러볼 수 있어서 미군의 함포사격에도 견딜 수 있고 지구전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해군사령부참호 전시실 정면에는 오키나와 전쟁의 참상을 알린 오타 소장의 전보문과 사진을 크게 세워두었다.
 해군사령부참호 전시실 정면에는 오키나와 전쟁의 참상을 알린 오타 소장의 전보문과 사진을 크게 세워두었다.
ⓒ 김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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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로 들어가는 입구에 작은 전시관이 있다. 이곳에는 오키나와 전쟁 개요 설명과 자료 사진들, 전쟁 당시 사용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 정면에는 당시 해군사령부의 사령관이었던 오타 미노루 소장의 사진과 그가 쓴 전보문을 새겨놓은 벽이 세워져 있다. 오키나와 전쟁 발발 후 현민들의 처참한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정작 일본 본토에는 전혀 보고되지 않고 있었다. 오타 소장은 오키나와 현민들의 피해 상황과 헌신적인 작전 협력 내용을 상세히 적어 해군 차관 앞으로 전보를 발송한다. 그리고 일 주일 후, 미군의 맹공으로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갈 수 없게 되자 오타 소장은 1945년 6월 13일 밤 간부 6명과 함께 권총으로 자결한다.

"……현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볼 수 만은 없기에 (현 지사를) 대신하여 긴급히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오키나와에 적의 공격이 시작된 이래 육해군 모두 방위를 위한 전투에 전력을 다하느라 정작 현민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현민들은 청년이나 장년 할 것 없이 모두 방위에 동원되었으며, 남은 노인과 아이들과 여자들만이 쉴새 없이 이어지는 포격으로 집과 재산이 불타버려 간신히 남은 맨몸 하나로 군의 작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장소에서 궁핍한 생활을 감내해 왔습니다…………… <중략>

오키나와에 온 이래로 현민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근로 봉사와 물자 절약을 강요당하고 나라를 위해 봉사를 한다는 일념을 가슴에 간직하면서도 결국 보답 받지 못한 채 이 전투의 마지막을 맞이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키나와의 실정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 한 포기의 풀조차도 모조리 타버려서 먹을 식량도 겨우 한 달만 버틸 것만 있습니다. 오키나와 현민은 이와 같이 싸웠습니다. 현민에 대해서는 후세에 특별히 배려해 주시기를 부탁 드리는 바입니다. "      
<해군 차관에게 보내는 오타 소장의 전보문 발췌 내용>


오키나와 전쟁에서 민간인의 피해가 막대했음을 이 전보문은 보여주고 있다. 전쟁이 발발 한 지 두 달이 지나고서야 그 참상이 전해진 것이다. 오키나와 현민들은 당시 상황을 본토에 최초로 알리고자 한 오타 소장을 높이 평가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타 소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현민에 대해 특별한 배려의 부탁'은 오늘날 실현이 되었을까? 이번 여정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해군사령부참호 내부 모습. 사령관실(좌), 막료가 수류탄으로 자결한 당시의 파편 흔적(우상), 의료실(우하)
 해군사령부참호 내부 모습. 사령관실(좌), 막료가 수류탄으로 자결한 당시의 파편 흔적(우상), 의료실(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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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로 들어가는 입구로 갔다. 길게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면 깊은 지하로 연결되어 동그란 통로가 나온다. 참호의 전체 길이는 450m로 만들어져 있지만, 현재 일반에 공개된 곳은 300m에 불과하다. 지하 통로는 여러 명이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꽤 여유 있는 공간이다. 계단 끝 참호가 시작 되는 곳에는 작전실이 있다. 그리고 통로 중간중간에 막료실, 사령관실, 암호실, 의료실 등이 이어진다.

참호 내에 의료실이 있다고는 하지만 전쟁 당시 부상자의 수는 수용 불가능할 정도였기 때문에 치료는 고사하고 통로 여기저기에 시신과 부상자가 널부러진 채 아수라장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3개월간의 전쟁에서 군인 전사자만 10만에 달하기 때문이다.

지상전으로 치러진 오키나와 전쟁에 해군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이곳 해군사령부참호는 상당히 잘 만들어졌으며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는 참호 중 하나이다.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듯 잘 정리되어 있는 참호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고 있다 보니 치열한 전투를 하는 해군 참호의 영상이 뇌리를 스쳐갔다. 그리고 부상병들의 신음 소리가 환청마저 들려오는 듯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300m의 참호를 돌고 출구를 빠져 나오자 쾌청한 오키나와의 하늘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오키나와 전쟁이 언제 있었던 일이냐는 듯이 잔잔한 구름과 함께….

오늘의 오키나와를 이해하는 단초 '오키나와 전쟁'

첫 번째 답사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번 여행에서는 오키나와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전쟁과 평화', '미군'이라는 키워드를 되짚어 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본격적인 답사에 앞서 오키나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 '오키나와 전쟁'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오키나와는 1945년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오키나와 전투'라는 처참한 전쟁을 겪는다. 일본 영토 내에서 일어난 유일한 지상전으로 미군과 일본군의 전면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2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희생자를 낳았다. 막강한 화력으로 몰아붙인 미군의 희생자도 4만 명에 달하는 등 미군으로서도 예상 외의 피해를 본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던 것이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막바지 패색이 짙어지자 미군의 일본 본토 침공을 우려해 이들의 상륙을 막기 위한 작전을 준비한다. 미국의 맥아더 장군의 상륙 예상지(제주, 대만, 오키나와, 대마도, 도쿄 인근, 규슈 등 12곳)를 정하고 병력을 집중 배치한다. 맥아더는 일본 공격을 위한 상륙지로 오키나와를 선택한다.

미군은 일본 공격을 위해 1945년 3월 26일 오키나와 바로 앞 게라마 섬에 상륙, 4월 1일에는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한다. 막강한 화력과 전세를 몰고 온 미군을 일본군은 막아낼 재량이 없었다.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미군은 쉽게 오키나와에 발을 들였다. 전쟁 초반에 수도 슈리에 있는 육군 진지를 무너뜨림으로써 전투다운 전투는 끝이 났다. 그 후로는 저항하는 군과 민간인을 소탕하는 소탕전으로 이어졌다.

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사진 자료. 오키나와 전쟁으로 일본군 10만, 민간인 12만, 미군 4만 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사진은 대부분 미군이 촬영한 것이다.
 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사진 자료. 오키나와 전쟁으로 일본군 10만, 민간인 12만, 미군 4만 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사진은 대부분 미군이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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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쟁은 승리를 위한 전쟁이 아닌 '소모전'으로 치러졌다고 볼 수 있다. 미군의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해 미군을 최대한 오키나와에 잡아두는 방패막이 전쟁이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은 패배가 명백했음에도 항복 하지 않은 채 전쟁 지속하게 함으로써 막대한 군인과 민간인 피해를 낳았다. 

일본군, 민간인, 미군 사망자를 다 합쳐 26만 명에 이르는 시신은 오키나와를 뒤덮었다. "밤에는 모두들 지팡이를 가지고 걸었다. 시체를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라고 하는 오키나와 전쟁 생존자의 증언은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엄청난 피해를 입은 일본군 사령부는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해 오키나와 최남단의 해안지역까지 밀리게 된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일본군 사령부 사령관 우시지마 중장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 할 수 없게 되자 마부니(摩文仁) 언덕 끝자락에 올라 할복 자살을 한다.  1945년 6월 23일 새벽 4시 반경이었다. 사령관의 자결로 오키나와 전쟁은 공식적으로 전쟁은 끝이 났다. 개전 3개월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우시지마 사령관은 전쟁 중단 지시를 내리지 않은 채 자결했다. 사령관의 지시를 받지 못한 잔존 부대들은 어찌 할 바를 몰라 계속 도망 다니다 미군과 조우해 많은 목숨을 잃었다. 이런 필요 없는 전쟁이 9월까지 이어졌다. 그 기간 사람들이 덤으로 죽어간 것이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세계 2차대전은 끝이 났다. 미국의 원폭투하로 일본 본토에 속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폐허가 되었다. 오키나와는 일본과 미국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전망 없는 전투로 무수한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을 만큼 섬은 망가져 버렸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오키나와는 이후 '30년' 동안 미군에 의해 점령 통치를 받게 된다. 1972년 일본에 반환되지만 동서 냉전의 결과로 섬의 상당 부분이 미군기지화되어 버린 상태로였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일본에 반환된 후 더욱 더 오키나와의 미군기지화는 공고해 졌다. 오키나와의 일본 본토에 대한 불신, 평화에 대한 염원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오키나와', '휴양과 관광의 섬 오키나와'의 민낯에 직면하게 되자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아름다움의 이면에 피로 물든 아픔 역사를 지니고 있는 섬 오키나와. 우리나라 제주를 떠올리게 하고, 평택을 생각하게 했다. 이번 여정은 서두에서 언급했듯 같은 아픔을 가진 지역의 역사적 성격을 공유하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여행이 될 것이다. 이 여행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덧붙이는 글 | 이번 오키나와 답사는 1월 25일~28일까지 겨레하나 여행사업단 '더하기 휴'의 '서승 교수와 떠나는 오키나와 평화감성여행'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태그:#오키나와, #오키나와 전쟁, #평화, #구해군사령부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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