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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유라시아 횡단여행을 떠났습니다. 변변한 외국어 실력 없이 오롯이 패기 하나로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낯선 땅을 돌며 보낸 4개월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10여 개 국가를 여행했고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늦었지만 서랍 속에 간직했던 묵혀둔 일기장을 공개합니다. -편집자주-

러시아의 추위는 바닷물도 얼 정도입니다. 블라디보스톡 항구에 정박한 배와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얼음조각 모습
▲ 얼어버린 바다, 그리고 배 러시아의 추위는 바닷물도 얼 정도입니다. 블라디보스톡 항구에 정박한 배와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얼음조각 모습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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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14일.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은 한산했다. 인기척이 없으니 화창한 날씨가 되레 을씨년스럽다. 여객터미널 안으로 들어가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깥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곳곳에 하얀 피부의 코 큰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소리에 실내가 어수선하다. 

막상 홀로 떠난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이 몰려온다. 오만 가지 잡생각들이 머리에 가득하다. 초조한 나와 달리 배웅하러 쫓아온 가족들은 신이 났다. 조카들은 터미널 안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뛰어다니기 바쁘다.

조카들뿐만 아니다. 누나들과 매형들, 남동생은 오랜만에 나선 가족여행에 들떠 있다. 아까부터 날 배웅한 뒤 찾아갈 밥집을 결정하느라 한참 토론중이다. 스무 명 남짓한 대가족 출연에 외국인들도 구경거리가 생긴 듯 자꾸 흘끔거리며 쳐다본다. 나 홀로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잡는다.

인터넷으로 예약한 승선권을 발급받았다. 매표소로 가서 예약확인서와 여권을 제출하자 매표소 직원이 선박용 보딩 패스를 건네주었다.

배를 타고 러시아행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비용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산 가격에 러시아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배를 타기로 결정했다. 동해항에서 출발한 배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할 예정이다.

여행계획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가로질러 유럽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점이다. 유럽에서의 일정은 차츰 계획하기로 하고 일단 여행을 떠났다.

당차게 내딛은 첫발, 검색대 거치며 '멘붕'

동해항 국제터미널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크루즈의 승선권
▲ 러시아행 승선권 동해항 국제터미널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크루즈의 승선권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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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선권을 받아들자 환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터미널 건물을 빠져 나와 바로 옆 건물에 위치한 환전소로 향했다. "러시아 돈으로 환전 좀 해주세요"라고 말하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중년의 사내가 호주머니에서 두툼한 지폐 뭉치를 꺼냈다.

"얼마나 바꿔 줄까요?"

그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얼마나 환전을 해야 하는 것인지 도통 가늠할 수 없었다. 일단 한화로 10만 원을 남기고 나머지 40만 원을 중년 사내에게 건넸다. 능숙하게 지폐를 세던 그는 또 다른 호주머니서 동전을 꺼내며 말했다.

"1000원에 38루블이니까..."

이 말을 듣고야 나서 러시아 화폐단위가 '루블'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기본적인 정보도 알아오지 않는 허술한 여행준비가 들통 나는 순간이다. 어처구니없는 나의 용기에 피식 헛웃음이 절로 났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환전한 루블 뭉치와 동전을 받아들고 다시 터미널 건물로 향했다.

두려움과 설렘 사이를 오가는 복잡 미묘한 기분에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지 못했다. 괜스레 터미널 곳곳을 서성이다 마침내 배낭을 짊어졌다. 어깨에 와 닿는 무게감이 커 순간 움찔했다. 80리터 크기의 배낭을 짊어진 모습에 이목이 집중됐다.

오후 2시, 출발에 맞춰 승선하기 위해 가족들과 작별의 인사를 하고 출국심사대로 향했다. 드디어 나 홀로 떠나는 여행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떨리는 감정을 숨기고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가족들에게 이별을 고했다.

당차게 출국심사대 걸음을 옮겼지만 곧바로 위축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가방이 검색대를 지나자 보안검색요원이 짐을 풀어보란다. 걱정스런 얼굴로 서둘러 가방을 풀어헤쳤다. 문제는 흔히들 '맥가이버 칼'이라고 부르는 다용도 칼이 원인이었다. 보안검색요원은 휴대가 불가능하니 배 안의 안내 데스크에 맡기고 하선할 때 찾아가란다. 첫발부터 삐걱된다.

다시 짐을 싸고 가방을 짊어지고 터미널을 빠져나오자 항구에 크루즈가 보인다. 생각했던 것보다 실물이 훨씬 크다. 다소 불안해 보이는 사다리를 엉거주춤 지려밟으며, 크루즈에 승선한다.

안내에 따라 실내에 들어서자 예상과 달리 배 안이 넓다.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좌석을 찾아갔다. 2층 침대들이 즐비한 선실에 들어서자 외국인들이 가득하다. 문 앞, 침대칸에 짐을 풀었다. 바로 밑 침대칸에는 외국인이 누워 있다. 눈인사를 하고 대충 짐을 풀었다. 그리고 곧장 갑판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몸에 찌릿한 전류가 흐른다.

멀미에 '죽을 맛'...호된 신고식

배 안에는 면세점과 식당, 편의점, 안내데스크, 샤워장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 선실 풍경 배 안에는 면세점과 식당, 편의점, 안내데스크, 샤워장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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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할 게 없다. 할 수 있다."

갑판에 서서 멀어져 가는 항구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의지를 다진다. 한참을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차디찬 날씨에 이내 실내로 다시 돌아갔다.

실내는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마다 객실이 있으며, 2층에는 안내데스크와 면세점 서너 개가 들어서 있다. 2층 편의점 옆으로는 바와 레스토랑도 있다. 1층과 3층에 있는 휴게실과 샤워장도 눈에 띈다.

실내구경을 거의 마칠 즈음, 갑자기 속이 메스껍기 시작했다. 머리도 어지럽다. 순간, '아차' 싶다. 그제야 가방에 고이 넣어둔 멀미약이 떠올랐다. 동해항 출발 5시간, 멀미가 찾아왔다.

서둘러 약을 찾아 먹었지만 이미 발발한 멀미 증상에 몸이 축 늘어지고 헛구역질까지 나왔다. 샤워를 하면 괜찮아질 것 같아 몸을 씻어보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바람을 쐬기 위해 다시 갑판으로 향했다.

시나브로 약 기운이 몸에 퍼지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아. 그때, 반대방향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청년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한국인 맞으시죠. 반갑네요."
"네, 반갑습니다. 배타고 러시아 가는 한국 사람이 저 말고 또 있네요."
"저도 저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전 바이칼 호수까지 갑니다. 어디까지 가세요?"
"러시아를 횡단해 유럽으로 갈 예정입니다. 알혼섬도 가 볼 예정이고요."

여행객이란 공통점 때문인지 그와 금방 친해졌다. 통성명을 통해 그의 이름이 '전동환'이라는 사실과 개명을 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우린 그렇게 서로의 여행계획을 공유하고 일상적인 대화도 나누면서 무료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중에 스물다섯 살의 '조항근'이라는 친구를 만나 셋이서 수다를 떨며, 러시아로 향했다.

이튿날 오후 5시가 다 되어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27시간 배를 타고 오면서 동환이와 항근이 차례대로 배 멀미로 고생을 했다. 나와 똑같이 그들도 멀미약 먹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씁쓸한 일도 있었다. 동환과 갑판에서 대화를 하는 도중 2명의 러시아인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러시아인들이 동환의 핸드폰을 빼앗듯 가져갔다. 그리고는 천연덕스럽게 국제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둘 다 어이가 없어 제대로 응수도 못했다. 또 한 차례 러시아인이 누군가와 통화를 시도하려는 찰나, 나는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채 동환에게 돌려주었다.

순탄치 않은 입국,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톡의 국제여객터미널 전경.
 블라디보스톡의 국제여객터미널 전경.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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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항구에 도착했지만 하선하기까지는 약 2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우리 셋은 갑판으로 나와 배가 접안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바다 위에는 얼음조각이 둥둥 떠있다. 항구에는 수많은 배와 컨테이너들이 뒤엉켜 있고 그 뒤로는 눈 덮인 도시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말로만 전해 듣던 러시아의 추위는 잠시 노출했을 뿐인데 뺨이 아플 정도로 춥다. 서둘러 다시 실내로 들어갔다.

하선을 하기 위해 기다리던 중 한 외국인 탑승객이 즉석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셋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의 연주에 맞춰 박수를 쳤다. 자연스럽고 자유스런 분위기에 심장이 요동쳤다.

출국할 때도 순탄치 않더니 입국하기도 힘들다. 나만 입국 심사대에서 걸렸다. 이번에는 입국 신고서가 문제였다. 아는 러시아말이라고는 배에서 공부한 "쯔드라스부이쩨(안녕하세요)", "스바씨바(감사합니다)"가 전부였다.

호기롭게 입국 심사를 하던 중년의 러시아 여성에게 입국 신고서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내게 입국 신고서를 돌려주었다. 눈치를 보니 다시 써오라는 것 같다. 작성요령을 재차 확인했지만 러시아어로 설명이 돼 있어 도통 알아볼 수가 없다. 세 번째 그에게 다시 입국 신고서를 내밀자 끝내 그는 내 여권을 받아들고 직접 작성해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출국 심사를 마쳤지만 검색대에서 또 다시 가방을 풀어헤쳤다. 이번엔 '핫팩'이 문제였다. 몸 이곳저곳에 핫팩을 갖다가대며 할 수 있는 뜨거운 표정을 죄다 지어보였다. 다행히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짓는다.

산 너머 산이라고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또 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영문 표기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사방에 온통 러시아어뿐이다. 우리 셋은 굳어진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곧 다시 돌아가야 하는 참극이 벌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동해-러시아 크루즈 이용정보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러시아로 떠나는 크루즈는 동절기과 하절기로 나뉘어 운행을 하고 있습니다. 동절기는 매주 월요일 오후 2시 출발이며, 하절기는 일요일 오후 2시 출발입니다.

항공탑승과 마찬가지로 출발 2시간 전에 도착해 출국수속을 밟아야 하며, 시차는 블라디보스토크가 2시간 더 빠릅니다. 두 나라를 오가는 선박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해당 크루즈를 운행하는 업체의 누리집을 방문하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동해고속버스터미널에서 여객터미널까지의 거리는 약 7킬로미터입니다. 



태그:#유리시아 횡단여행, #배낭여행, #러시아, #동해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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