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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방송통신위원장으로 내정된 최성준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지난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제1별관 건물을 나서고 있다.
▲ 새 방통위원장에 최성준 서울고법 부장판사 내정 신임 방송통신위원장으로 내정된 최성준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지난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제1별관 건물을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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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방송과 통신, 미디어 정책을 총괄하는 방송통신위원장 자리에 의외의 인물이 낙점됐다. 최성준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바로 주인공이다. 지난 14일 청와대가 방송통신 분야의 비전문가이자 현직 판사를 방통위원장에 내정하자 언론은 '깜짝 인사'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단순히 깜짝 놀랄 정도로 그칠 사안이 아니다. 전문성보다 방점을 찍어야 할 점이 있다. 현직 고위 법관의 행정부행이라는 사실이다.

최 내정자는 올해 초까지 춘천지방법원장으로 있다가, 지난 2월 인사로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른바 '평생법관제' 때문이다. 과거에는 법원장을 맡은 뒤에는 대법관, 헌법재판관 등으로 임명되지 않는 한 재판을 하지 않고 법원장으로 퇴직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2012년 2월부터는 법원장도 순환보직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법원은 고위법관들이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고 판단되면 사직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법원장이 재판부로 복귀하고, 다시 법원장으로 가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정착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법원장에서 재판장 발령 한 달만에 방통위원장으로

그런데 최 내정자는 서울고법 행정1부 재판장으로 발령받은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방통위원장에 내정됐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신뢰를 위해 도입한 평생법관제의 취지를 무색케한다.

최 내정자는 14일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 기자가 "평생법관을 하겠다고 왔다가 금세 떠나게 되었다"고 질문을 던지자 "법관으로 정년까지 근무하는 것도 의미가 있으나 사법부에서 닦아온 지식이 다른 업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서 "기회가 왔을 때 평생법관을 고집하는 것보다 (가는 쪽이) 나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재판을 해왔듯 방송통신 이용자의 눈높이를 잘 헤아려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최 내정자는 "기회가 왔을 때 (가는 쪽이) 나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 문제를 개인의 직업선택의 자유로 보면 너그러워질 수 있다. 하지만 3권 분립 차원에서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사법부의 고위 법관이 행정부의 관료로 가는 일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입법, 행정, 사법권을 나누고 각자 상호 견제와 균형을 갖추도록 했다. 어느 한쪽으로 힘이 쏠리지 못하게 한 이유는 국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다. 특히 법원은 행정부의 공권력 행사가 적절했는지 판단하는 기관이다. 정부의 정책이 적법한지,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는지 판단하여 잘못된 정책에 제동을 걸 수도 있다.  

수십 년 동안 재판을 하던 현직 판사가 어느날 갑자기 청와대 고위직으로 가게 됐다. 이것을 '국민의 눈높이'로 이해할 수 있을까. 국민들은 판사가 방송통신 정책을 잘 추진하는 것보다 정부의 방송정책으로 법적 분쟁과 권리침해가 생겼을 때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냉철한 판단을 내리기를 바라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청와대의 판사 '차출'은 3권 분립을 흔들리게 한다.  

고위법관의 청와대행, 최근 너무 잦다


고위법관의 청와대행이나 행정부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표 참조>. 특히 최근 들어서는 너무 잦다. 1993년 2월 당시 대법관이던 이회창씨가 임기 5개월을 남기고 감사원장으로 간 사례가 있다. 이때만 해도 아주 이례적인 일 정도로 비춰졌다.

하지만 2008년 7월, 김황식 당시 대법관이 임기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임기 6년 중  2년 8개월만에) 감사원장으로 내정되자 3권분립 훼손 논란이 벌어졌다. 당시 감사원장 적임자를 찾지 못해 고심하던 이명박 정부는 사법부의 최고법관에게 감사원장 자리를 제안했고 그는 수락했다. 김황식 전 대법관은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거쳐 최근에는 서울시장 유력 후보로 거론되면서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현 정부 들어서는 두 명의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 행정부의 관료가 되었다. 2012년 12월에는 이성보 법원장이 국민권익위원장으로, 2013년 10월에는 황찬현 법원장이 감사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되자 법원 내부에서는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 행정부 요직으로 가는 자리냐"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이렇게 정부 요직으로 가는 고위 법관이 느는 까닭은 무엇일까. 청와대와 당사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이리라.

청와대로서는 판사를 고위직에 임명하는 것이 비교적 무난하다. 고위 법관들은 오랫동안 재판만 해왔기 때문에 정치인들에 비해 '때'가 덜 묻었고 구설수에 오를 일도 없고 인사청문회 통과도 수월하다.

고위 법관들로서도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고위 법관들은 헌법재판관이나 대법관 외에는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감사원장, 방통위원장을 비롯하여 행정부의 각종 고위직 제안이 들어오니 굳이 거부할 명분을 못 느끼는 것이다.

"법관 차출은 사법부 독립 훼손"

김황식 전 대법관은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거쳐 최근에는 서울시장 유력 후보로 거론되면서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사진은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중앙당사에서 출마선언 도중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
 김황식 전 대법관은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거쳐 최근에는 서울시장 유력 후보로 거론되면서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사진은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중앙당사에서 출마선언 도중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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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문제는 청와대와 법원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기에 현직에서 바로 자리를 옮길 수 있느냐다. 사법부는 행정부와 별개의 조직이고 별개의 인사를 실시한다. 청와대가 의사타진을 위해 개별 법관과 접촉하는 방식은 많은 위험부담이 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간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통로'가 있을 수밖에 없다.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청와대가 법관들의 성향을 파악한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법원이 청와대의 의중을 살피는 구조가 되면 사법부의 독립은 먼 이야기가 되고, 사법부의 존재이유가 사라진다.

민주당은 14일 대변인 논평을 통해 "현직 법관을 방송통신위원장으로 내정한 것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인사"라고 평가하며 "박근혜 정부 들어 이어지고 있는 사법부 현직 법관의 행정부 차출은 법관들이 대통령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트위터 이용자(@hy2o**)도 15일 의미심장한 지적을 했다. 그는 "현직 법관을 행정부 고위직으로 뽑아가는 것, 정말 문제다! (출세지향적) 판사들에게 '법원 바깥의 좋은 자리가 당신 것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재판시 자발적으로 청와대 눈치를 보는 효과를 (노린다)"고 꼬집었다.

행정부와 사법부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견제해야 한다. 더 이상 청와대와 법원이 인사교류를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고위법관들도 현직에 있으면서 정치권에 기웃거려서는 안된다. 만일 청와대나 정치권으로 가고 싶다면, 일단 나가라. 그게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개인의 영광을 위해서 사법부의 지위를 이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판사가 행정부의 고위 관료보다 덜 중요한, 혹은 하찮은 자리인가. 만일 '그렇다'는 생각으로 현직에 남아 있는 판사가 있다면 그건 법원이 불행한 일이다. 아니 그런 판사에게 재판을 받는 국민이 불행한 일이다.


태그:#방송통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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