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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전, 이맘 때 즈음 유라시아 횡단여행을 떠났습니다. 변변한 외국어 실력 없이 오롯이 패기 하나로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낯선 땅을 돌며 보낸 4개월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10여개 국가를 여행했고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늦었지만 서랍 속에 간직했던 묵혀둔 일기장을 공개합니다.... 기자주

철길 위에 세워진 시베리아 횡단열차
▲ 멈춰 선 횡단열차 철길 위에 세워진 시베리아 횡단열차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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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만 하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랐다. 열차가 어둠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한다. 가속도가 붙자 차창 밖 풍경이 빠르게 변한다.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가 요란한 마찰음을 일으킨다. 침대형 좌석에 누워 열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현실이 꿈만 같다. 흔들리는 객차에 익숙해지고 기차소리에 무뎌질 때 즈음, 눈꺼풀이 스르륵 감겨왔다. 곧 깊은 잠에 빠졌다.

과거로 향하는 기차, 오래된 시설에 "뜨악"

17일, 시끌벅적한 소리에 눈을 떴다. 기차는 여전히 굉음을 내며, 달리고 있다. 차창 넘어 이름 모를 곳의 풍경이 펼쳐진다. 부산스러운 기차 안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맞은편 좌석의 가족은 식사준비로 바쁘다. 어젯밤, 가벼운 눈인사로 안면을 텄지만 아직은 데면데면하다.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었다. 하지만 정확한 시간인지는 모르겠다. 몸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는데 반해 시계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기차는 시간을 거슬러 계속 서쪽을 향해 달린다. 타임머신에 승차한 기분이다. 과거로 향하는 기차의 아침, 흐린 날씨마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창문에 뺨을 갔다댔다. 시원하다. 열차 안은 생각보다 덥다. 밤새 땀을 흘리다 새벽녘, 자다 말고 일어나 졸린 눈으로 꼼지락 거리며 내복을 벗었다. 추운 나라여서 그런지 실내 온도가 후끈후끈하다.

반대로 화장실은 싸늘한 표정을 짓게 한다. 좌변기를 보자 남자로 태어난 게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세면대는 이름이 무색하다. "뜨악" 소리가 입 밖으로 저절로 새어 나온다. 순간, 어제 만난 파벨의 말이 생각났다.

"기차번호가 클수록 시설이 안 좋아."

더 곤욕스러운 것은 화장실 앞에 전기 콘셉트가 설치된 것. 핸드폰과 노트북을 충전하기 위해선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야리꾸리한 냄새를 견디며, 장시간 서 있어야 한다. 배터리 충전 수치가 낮아질수록 근심이 쌓이는 이유다. 짐 가방에 챙겨온 인스턴트 커피로 마음을 달래본다. 객차 안 온수기가 고마운 순간이다.

허나 '뭐니 뭐니 해도' 마음에 쏙 든 건, 달리는 기차 안에서 흡연이 가능하단 거다. 객차와 객차 사이 공간은 자유롭게 담배를 필 수 있는 열차내 유일한 장소다. 덤으로 이따금 새로운 만남의 기회를 갖게 되니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공간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열악한 시설. 블라디보스토크서 만난 러시아인의 조언에 따르면 기차번호의 숫자가 클수록 시설이 열악하다고 한다. (사진 왼쪽부터 온수기, 세면대, 좌변기)
▲ "뜨악"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열악한 시설. 블라디보스토크서 만난 러시아인의 조언에 따르면 기차번호의 숫자가 클수록 시설이 열악하다고 한다. (사진 왼쪽부터 온수기, 세면대, 좌변기)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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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서 우즈베키스탄 가족을 만나다

기차에서 보낼 66시간을 생각하니 막막하다. 밥 먹고 자는 것 이외 마땅히 할 일이 없다. 지루한 일상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러기엔 그동안 너무 바삐 살아왔다. 오히려 남아도는 시간이 부담이다. 가만히 창밖만 쳐다보고 있으니 시간도 더디게 간다.

메모장을 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시간이 남는데 도리어 마음이 초조하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든다. 열차생활은 바쁘게 산 삶이 오히려 독이 되는 시간이다."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중년의 외국인이 다가와 앉는다. 내 침대칸 밑 좌석의 남자다. 알리세이 우숩, 그의 이름이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인 그는 아내, 딸과 함께 어제 밤 열차를 탔다. 모스크바 인근 도시 '우파'까지 간단다. 부피가 큰 트렁크를 4개나 가지고 올라탄 이유가 있었다. 끼니 때마다 지켜보니 가방 하나는 오로지 음식으로 가득하다. 세 식구가 며칠은 먹을 양이다.

우솝은 내 소지품에 관심을 보였다. 핸드폰과 노트북은 물론 입고 온 복장과 각종 주전부리까지 이것저것 물어온다. 심지어 러시아 회화책을 보고는 한국어 발음까지 묻는다. 호기심이 많은 어른이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그에게 '바디랭귀지'로 설명하느라 진땀을 뺀다.

우솝과 달리 아내와 딸은 묵묵히 내 얼굴만 쳐다본다. 객차 안에 유일한 동양인이어서 그런지 신기한 듯 바라본다.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반가운 마음을 표시코자 꼬마 숙녀 사브리나에게 초코바를 하나 건넸다. 부끄러운지 몸을 배배 꼬며, 엄마 품에 안긴다. 그 모습에 어른들은 웃음을 짓는다.

"뚜리스트(여행가)."

'학생이냐'고 묻는 우솝에게 대답한 말이다.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어 에둘러 내뱉은 말이다. 우솝은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우즈베키스탄도 여행지로 좋다는 뜻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빙판 길, 구형 오토바이를 타는 러시아인의 모습이 이색적이다.
▲ 빙판 길 오토바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빙판 길, 구형 오토바이를 타는 러시아인의 모습이 이색적이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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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꾼 주정쟁이, 한밤중 러시아 군인에게 끌려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깨졌다. 방해꾼이 나타났다. 어제 밤부터 술을 마시던 러시아인이다. 방금 전까지 술에 절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봤는데, 어느 틈에 일어나 술병을 손에 쥐고 있다. 그가 나와 우솝에게 술을 권한다. 둘 다 거절했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우솝과 나를 번갈아 가며 붙잡고 혀 꼬인 말을 해댄다. 취객은 어디가나 상대하기 힘들다.

그가 떠난 뒤 우솝을 향해 귀가 따갑다는 동작을 취한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우솝도 비슷한 몸짓을 보인다. 공감대가 생기자 더 가까워진 듯하다.

이틀간 지켜 본 술꾼 3명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밤낮 술을 마셨다. 취기가 오르면 이사람저사람 할 것 없이 다가가 친한 척을 하며 귀찮게 했다. 그들의 원래 좌석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객차 안을 휘젓고 다녔다. 난 흡연실에서 몇 차례 그들과 마주쳤다. 그때마다 그들은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을 걸어왔다. 그럴 때면 대꾸보다 얼굴에 싫은 내색을 비치지 않는 게 더 어렵다. 불편한 추억이 된 장면이다.

다음날(18일) 새벽녘, 주정뱅이 한 명에게 불행이 닥쳤다. 군인들이 객차에 올라 주정뱅이 중 한 명을 기차서 끌고 내렸다. 상황을 지켜보니 술에 취해 내릴 역이 됐는데도 잠만 자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차장이 신고한 듯했다.

객차에 오른 두 명의 군인은 주정뱅이를 강제로 깨워 객차에서 하차시켰다. 어둠이 짙은 새벽, 차창 밖으로 비틀거리며 걷는 취객과 군인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서 만난 우즈베키스탄 친구들. 맨 왼쪽이 '까삐단(선장)' 우솝, 그리고 오른쪽이 털보이다. 털보 옆은 그의 아버지. 수염이 덥수룩했던 털보는 내가 하차 하기 직전, 내게 면도크림을 빌려 수염을 깎았다.
▲ 기념촬영 시베리아 횡단열차서 만난 우즈베키스탄 친구들. 맨 왼쪽이 '까삐단(선장)' 우솝, 그리고 오른쪽이 털보이다. 털보 옆은 그의 아버지. 수염이 덥수룩했던 털보는 내가 하차 하기 직전, 내게 면도크림을 빌려 수염을 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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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식 앓던 털보 아들, 한국어로 "감사합니다"

17일, 점심 무렵이 지나서 친구가 늘었다. 바로 옆 좌석에 또 다른 우즈베키스탄 가족이 짐을 풀었다. 동포를 만난 우솝이 반갑게 그들을 맞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날 소개한다. 난 두 가족과 테이블 위 러시아 회화책을 올려놓고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흘러 늦은 밤 한 차례, 기차가 간이역에 멈추어 섰다. 으레 정차하는 구간이라 생각해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순간, 구급통을 손에 든 간호사가 열차에 올랐다. 영문 모를 상황에 궁금증이 높아진다. 간호사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쫓으니 바로 옆 좌석에 멈추어서 무릎을 꿇고 앉는다.

수염이 덥수룩한 우즈베키스탄인의 가족이 있는 곳이다. 간호사는 초등학교 고학년쯤으로 보이는 털보의 아들에게 주사를 놨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우솝은 간호사의 말을 받아 메모지에 적었다. 이윽고 간호사는 우솝에게 주사기와 작은 액체용기를 건네고 기차에서 내렸다. 털보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이튿날(18일) 털보에게 물으니 아들이 천식을 심하게 앓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 몸도 약해 건강상태가 좋지 않단다. 삐쩍 마른 몸의 아이를 보니 안쓰럽다. 아이는 멀미까지 했다. 털보에게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러시아 회화책을 들고 다가가 '멀미약'이란 낱말을 찾아 보여줬다. 고개를 끄덕이는 털보에게 짐 가방에 남아 있던 멀미약을 건네줬다. 털보가 고맙다며, 악수를 청한다. 이 일로 털보와 친구가 됐다. 그의 가족과도 한층 더 가까워졌다.

노트북을 들고 아이 곁에 앉았다. 기분 전환에 도움을 주기 위해 노트북에 저장된 영화를 보여줬다. 영상만 볼 수 있는 할리우드 영화와 한국 영화뿐인데도 좋아한다. 곁에 있던 털보가 아들이 한국에 한 달 동안 머물렀다고 귀띔했다. 부끄러워하는 아이를 졸라 한국어를 시켜본다.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지만 딱 세 마디를 했다.

"안녕하세요. 좋아요. 감사합니다."

아이의 말끝에 러시아어로 하라쇼(хорошо, 좋다)라고 반복해 말했다. 털보네 가족 4명이 모두 탄성을 지른다. 어깨를 으쓱하며, 거만한 표정을 짓자 이번엔 깔깔대며 웃는다.

가장 저렴한 가격의 객차 칸 쁠라츠카르타의 모습. 침대형 좌석이다.
▲ 횡단열차 내부모습 가장 저렴한 가격의 객차 칸 쁠라츠카르타의 모습. 침대형 좌석이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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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가는 러시아어, 알아가는 기차생활

까삐단(Капитан). 내 러시아회화책을 보고 있던 털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단어다. 우솝의 직업을 뜻하는 낱말이다. 열차에 오르고 삼일(18일)이 지나서야 우솝이 '선장'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새삼 언어를 배운다는 게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단어 이외 유일하게 암기하는 긴 문장은 생겼다. '나는 러시아말을 잘 못해요'란 뜻의 '야 니므노거 빠니마유 빠루스끼(Я Немного понимаю порусски)'란 말이다. 만나는 이들에게 주야장천 내뱉다 보니 어느새 능숙할 정도가 됐다. 한 러시아인이 "발음이 좋다"며 칭찬을 하기도 했다.

18일 오후에는 열차에서 잠시 벗어났다. 우즈베키스탄 친구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려 기차역 간이매점으로 가 간식거리를 샀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좋아진다. 갇힌 공간에서만 생활했더니 잠깐 허락된 외출에 기분이 좋아진다. 털보의 도움으로 객차 안 한편에 붙은 포스터가 정차역과 정차시간이 적힌 시간표란 것을 알게 됐다.

2박 3일간의 기차생활을 통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기 전 먹을거리를 많이 사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파벨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인터넷서 찾은 '간이역마다 요깃거리를 파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란 정보는 겨울을 제외한 계절에만 해당되는 거였다.

또, 음료인 줄 알고 샀던 병에는 술이 담겨 있어 들이키다 입 밖으로 뿜기도 했다. 더욱이 평범한 물을 산다는 게 톡톡 쏘는 소다수여서 처치를 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생활, 그야말로 한 가지도 쉬운 게 없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2박 3일간을 달려 도착한 울란우데 기차역.
▲ 울란우데 역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2박 3일간을 달려 도착한 울란우데 기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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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망한 볼 뽀뽀... 울란우데에 도착하다

19일 정오 무렵, 마침내 울란우데에 도착했다. 2박 3일간의 열차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다. 열차는 정확한 시간에 울란우데역에 정차했다. 순간, 시종일관 묵묵히 날 지켜보던 군복을 입은, 머리가 희끗한 러시아인이 "울란우데"라고 소리쳤다.

짐 가방을 챙겨, 우솝의 가족과 인사를 나누었다. 털보네 가족과도 작별인사를 했다. 우솝은 짐 가방을 짊어진 내게 다가와 볼 뽀뽀를 했다. 뒤이어 털보와 털보의 아들도 헤어짐이 아쉽다며 양쪽 뺨에 번갈아 가며, 뺨을 갖다가 댔다. 난생 처음 하는 볼 뽀뽀, 당황했다. 남자끼리여서 주춤하며, 뺨을 내밀었다. 설레면서 한편으로는 소름이 돋는 순간이었다.

열차에 오를 때만 해도 우즈베키스탄 가족들과 데면데면한 관계였는데 어느새 뜨거운(?) 사이로 발전했다. 그간 그들과 보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열차서 내려 곧바로 역으로 향한다.

짐 가방에서 제본을 꺼냈다. 스마트폰을 켜 구글맵도 실행한다. 숙소로 향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다. 역 앞 광장에서 제본과 구글맵을 보고 걸어갈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두리번거린다. 그때, 중년의 러시아인이 한국말로 "한국 사람?"이라고 물으며, 말을 건넨다. 당황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와 비슷한 생김새의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울란우데가 궁금해졌다.

덧붙이는 글 | 여행과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오블(http://blog.ohmynews.com/kaos80)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태그:#시베리아 횡단열차, #블라디보스토크, #울란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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