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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열린 국정원시국회의 촛불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관권부정선거 특검 실시 및 남재준 국정원장, 황교안 법무부장관, 김관진 국방부장관 해임'을 촉구하고 있다.
 1월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열린 국정원시국회의 촛불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관권부정선거 특검 실시 및 남재준 국정원장, 황교안 법무부장관, 김관진 국방부장관 해임'을 촉구하고 있다.
ⓒ 양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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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현장에 가면 <아침이슬>과 함께 약방의 감초처럼 들리는 노래가 있다. 바로 <헌법 제1조>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반복)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너무도 당연한 내용이지만, 한편으로 너무도 쉽게 무시당해온 구절이기도 하다. 21세기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은, 몰상식한 집권자들이 이 구절을 유린할 때마다 촛불을 들어 그 의미를 환기시켰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현행헌법 제1조는 촛불시민들에게 '든든한 지원군'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 지원군은 식민지 시기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며 민족해방투쟁에 나섰던 독립투사들의 유산이다.

1919년 봄, 식민지 조선은 혁명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계급, 성별, 지역, 연령을 가리지 않고 전국의 사람들이 동시에 떨쳐 일어났다. 단순한 독립 '요구'가 아니었다. 수평적 연대 속에서 '인민'이 주인이 되는 새 나라를 세우려는 혁명의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이 기간 서울에서는 각종 정부 수립 전단이 나돌고, 관련 회합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런 현상은 같은 시기 신해혁명, 러시아혁명, 독일혁명 등의 세계사적 흐름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 결과 마침내 4월 13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정부 수립 선포 이틀 전에는 임시의정원 의결을 거쳐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이 공표됐다.

독립투사들의 유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전체 10조인 임시헌장의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다. 오늘날 헌법 제1조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명백히 대한'제국'의 회복이 아닌 인민주권·인민평등의 공화정체 건설을 지향한 것이다. 수천 년 동안 군주제·신분제가 지속된 나라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황제의 주권 포기는 이제 "우리 국민 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로(1917년 대동단결선언) 이해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음"(제5조)을 명시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아울러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에서 일체 평등한 존재이자(제3조) 자유와 기본권을 누리며(제4조) 국가에 대한 의무를 지는(제6조) 존재로 규정되었다. '신민(臣民)'에서 '인민'으로, '제국(帝國)'에서 '민국'으로의 전환이었다. 뒷날 임시정부 건국강령에선 이때를 두고 "우리 민족의 힘으로써 이족(異族, 이민족) 전제(專制)를 전복하고 5천년 군주정치의 허울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없애는 제일보의 착수였다"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이후 임시정부가 통합 망명정부로 거듭나면서 그해 9월에는 임시헌장을 구체화한 8장 58개조의 임시헌법을 공표했다. 그 전문에선 사회구성 원리와 정부의 정체성은 '헌법이 부여'함을 명백히 하였다. 식민지시기 만주와 북중국에서 전개된 항일투쟁은 임시정부보다 월등히 격렬했지만, 그럼에도 임시정부가 임시정부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헌정체제'를 지속한 점에 있을 것이다. 이후 임시정부는 총 4차례의 개헌을 더 하였다. 임시정부의 마지막 개헌결과는 1944년 4월 공표된 대한민국임시헌장이었다. 다음은 그 전문의 일부이다.

삼일대혁명에 이르러 전민족의 요구와 시대의 추향(대세)에 순응하여 정치 경제 문화 기타 일체 제도에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한 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건립되었고 아울러 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 이에 본원(임시정부)은 (줄임) 25년의 경험을 쌓아 제36회 의회에서 대한민국임시헌장을 7장 62조로 개수하였다.

자유, 평등, 진보가 대한민국의 기본정신 즉 정체성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것은 3·1대혁명 당시 분출된 전민족적 요구 및 세계사적 대세와 상통하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 이 임시헌장의 제1장 제1조 역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이었다. 제2장에선 인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했다. 여기서 인민은 "민주정치를 보위하는 의무"를 지닌다고 명시한 점이 눈길을 끈다. 민주정치는 인민에 의해 유지된다는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이어 제3장∼제5장에서는 입법·행정·사법부에 해당하는 임시의정원,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심판원의 권한과 구성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대한민국 인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임시의정원 의원은 국무위원회의 주석·부주석과 국무위원을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경제민주화의 원조, 건국강령

2011년 2월 11일 복지포퓰리즘추방국민운동본부 소속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전면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 청구를 위한 거리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2011년 2월 11일 복지포퓰리즘추방국민운동본부 소속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전면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 청구를 위한 거리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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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이후 좌익진영이 중경 임시정부에 합류하면서 임시정부는 좌우통일전선체로 도약했다. 이 무렵 임시정부는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태항산 지구에서 활약하던 조선독립동맹과도 연대를 추진했다. 이런 속에서 임시정부는 건국구상을 구체화해 1941년 11월 건국강령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건국강령은 헌법은 아니었으나 새 국가건설의 원칙을 규정한 것으로, 그 이론적 기초는 조소앙의 삼균주의였다.

건국강령에 묘사된 삼균주의는 정치·경제·교육의 권리를 균등하게 하여 국내적으로는 특권계급의 소멸을 지향하고, 대외적으로는 민족과 민족 간의 불평등을 제거해 민족자결권이 보장될 수 있게 하는 방략이었다. 그 구체적 방법으로는 보통선거, 국유제도, 공비(公費, 무상)교육을 제시했다. 건국강령 제1장에선 삼균제도 발양을 피력하였고, 제2장에는 나라를 되찾는(復國) 방략을 담았다. 제3장에는 단계적 건국 구상을 담았다. 건국의 제2기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삼균제도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실시하여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민주적 시설로 실제상 균형을 도모하며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가 완성되고 전국 학령아동의 전부와 고급교육의 면비(免費) 수학이 완성되고 보통선거제도가 구속 없이 완전히 실시되어 전국 각리·동·촌과 면·읍과 군·도(島)·부(府)·도(道)의 자치조직과 행정조직과 민중단체와 민중조직이 완비되어 삼균제도와 배합 실시되고 경향 각층의 극빈(極貧)계급의 물질 및 정신상 생활정도와 문화수준이 제고 보장되는 과정을 건국 제2기라 함.

이처럼 새 나라의 최대 과제는 민족구성원의 '실제상 균형'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건국강령은 헌법상 경제체계의 기본원칙으로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함과 민족전체의 발전 및 국가를 건립 보위함에 연환(連環, 순환)관계"를 가지게 함을 천명했고, 이를 위해 중소기업을 제외한 대생산기관과 토지 및 교통·전기·수도 등의 국가 인프라, 은행의 국유화 방침을 채택했다.

아울러 일본인 및 친일파의 재산을 몰수해 국유로 삼고, 그것을 일체 무산자의 이익을 위한 국영 혹은 공영의 집단 생산기관에 충당하며, 두레농장·국영공장·생산소비와 무역의 합작기구를 조직해 농공대중(농민·노동자)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또 노동자의 불합리한 노동을 금지하고, 노동자·농민에 대한 무상의료 시행을 명기했다.

이처럼 독립투사들이 구상한 국가·사회는 '민주주의'와 '혼합경제'를 조합한 사회민주주의의 형태였다. 땀 흘리는 노동자·농민의 삶이 존중받고, 대기업·특권계급을 소멸시켜 누구나 고르게 살자는 것이었다. 이는 식민지 자본주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이기도 하였다. 해방 후 몇몇 우파 정치인들이 이를 '민족사회주의'라 부르며 동조했던 것도 이 점 때문이었다. 일본인과 몇몇 친일파가 자본을 독점한 상황의 타파야말로 진정한 민족해방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기본정신이 자유, 평등, 진보에 있다는 임시헌장 전문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균평(均平)주의를 건국강령에선 우리의 전통으로 설명하고 있는 점이다. 예컨대 토지국유제를 우리나라의 전통적 토지제도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이론에 따라 국유화를 주장했다면, 임시정부 인사들은 한국사에 내재된 평등 지향의 흐름에서 그 근거를 찾았던 셈이다.

정치적 자유와 사회경제적 평등의 조화를 위하여

이러한 임시정부의 헌법과 건국구상은 뒷날 제헌헌법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최근 연구에서 지적되듯 제헌헌법은 구성과 체계, 내용 면에서 임시헌장 및 건국강령을 빼닮았다. 제헌헌법 전문은 대한민국 건립의 계기를 기미 삼일운동에서 찾은 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는 점에 헌법의 목표를 부여하고 있다. 이는 건국강령의 목표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제헌헌법 제1조 역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였다. 제2조에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못 박았다. 또 제5조에선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다"라고 명시해,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이 모든 영역에서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공공복리에 있음을 환기시켰다. 국가의 의무는 그것의 보장과 조정이었다.

이와 함께 제헌헌법의 최대 특징은 경제면에서 두드러진다. 제헌헌법은 대한민국 경제질서의 대원칙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제84조)

2012년 11월 16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경제민주화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2012년 11월 16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경제민주화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 조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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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재산권(소유권)의 행사 역시 '공공복리'에 적합한 선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명시하였고(제15조), 사기업의 근로자는 이익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음을 규정했다(제18조). 또 생활유지 능력이 없는 자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제19조), 지하자원, 수산자원 및 수력 등의 자연력은 국유로 하고(제85조), 운수, 통신, 전기,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며(제87조),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할 것임을 천명하였다(제86조). 건국강령의 기본 구상과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제헌헌법의 지향점은 '정치적 자유는 무제한으로 보장받아야 하지만, 경제적 자유는 공공복리의 선을 넘어서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회정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서였다. 이에 대해 당시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에서는 "자유주의를 극복하고 자본주의를 수정하여 국민경제의 안정과 발전에 지향케 한 것은 적의한 조치"였으며 이는 "민생경제 내지 균등경제건설에 지향하는 국민의 열망을 집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평가하였다.

또 제헌헌법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이었던 유진오는 1952년에 펴낸 <헌법해의>에서 "우리나라는 경제문제에 있어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하였다고 밝힌 뒤 "일면 개인주의적 자본주의의 장점인 각인의 자유와 평등 및 창의의 가치를 존중하여,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사회적 민주주의라는 일견 대립되는 두 주의가 한층 높은 단계에서 조화되고 융합되는 새로운 국가형태를 실현함을 목표"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제헌헌법의 정신은 현행헌법의 전문에까지 계승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원초적 정체성은 자유 평등 진보

이처럼 임시정부의 헌법과 건국강령, 그리고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원초적 정체성'과 '역사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후의 한국현대사는 이 원초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입장과 그것을 뒤엎으려 한 세력의 대결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말해 한국 현대의 사상적 지형이 좌와 우, 진보와 보수가 아닌 '독립운동 계승세력'과 '친일 세력'의 대결이었음을 의미한다.

최근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 신우익, 수구언론은 친일의 논리를 '문명'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원형으로 변호하고 있다. 이민족을 압제하며 침략전쟁을 도모해 자국민과 아시아 전 민중을 도탄에 빠트리고 파시즘의 길로 나아한 일제의 경로가 문명이었다는 논리는, 그 자체 사회적 논의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황당한 주장이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점은 이들이 대한민국 '국민' 여부를 국가보안법적 잣대로만 판가름하며, 재벌 옹호와 민영화 사업을 열렬하게 주장하는 점이다. 이러한 행위야말로 대한민국의 기본정신을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대한민국의 원초적 정체성은 정치적 자유와 각인의 사회경제적 평등 그리고 평화의 정신에 있었다. 국가보안법이 '헌법 위의 법'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진정한 헌법적 가치에 입각한 사회적 논의가 절실히 요청되는 때다.

덧붙이는 글 | 1.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과 건국강령은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한국독립운동사 자료2(임정편 2)->대한민국임시정부헌장 법률 및 명령->임시정부 헌장 순으로 클릭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2. 제헌헌법은 국가법령정보센터(http://www.law.go.kr/lsInfoP.do?lsiSeq=53081#0000)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서희경, <대한민국 건국헌법의 역사적 기원>, <<한국정치학회보>>40, 2006.
서희경·박명림, <민주공화주의와 대한민국 헌법 이념의 형성>, <<정신문화연구>>106, 2007.
박태균, <상처받은 건국이념 : 공공성>, <<황해문화>>60, 2008년 가을호.
한홍구, <대한민국, 1948년과 2008년>, <<황해문화>>60, 2008년 가을호.
정병준, <1940년대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건국 구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61, 2009.
박찬승, <대한민국 헌법의 임시정부 계승성>, <<한국독립운동사연구>>43, 2012.



태그:#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 #건국강령, #제헌헌법, #대한민국의 원초적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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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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