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1세기 주요 연구분야로 떠오른 인지과학에서는 철학·언어학·심리학·신경과학 등의 연구자들이 협동해 다양한 견해와 연구성과를 내놓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도, 그들 대다수가 공유하는 최소한은 '언어와 생각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사실, 한국인은 이미 일상생활 속에서 이 밀접성을 세심하고 꾸준하게 반영해왔다. 우리말은 높임말이 존재하는 언어 중 하나다. 친구, 연인, 직장 동료, 부모와 자식, 대학 선후배, 스승과 제자 사이 등, 관계에 따라 높임말의 사용 여부와 그 맥락도 다양하며 높일 때 쓰는 호칭도 다양하다.

이러한 세심함에는 예의와 사회적 관계를 중요시 해온 전통적인 동아시아적 공동체 의식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적인 언어를 통해 우리 사회 자체의 문제점을 포착하는 것은 결코 지나치지 않을 뿐더러, 권장돼야 할 일일 것이다. 나는 이 기사를 통해 두 가지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자 한다.

"대통령께서는..." 정치권의 이상한 언어습성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 2월 6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잠시 전 정홍원 국무총리로부터 해임 건의를 받고 윤 장관을 해임 조치했다"고 발표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기자들 질문에 답변하는 민경욱 대변인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 2월 6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잠시 전 정홍원 국무총리로부터 해임 건의를 받고 윤 장관을 해임 조치했다"고 발표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첫 번째는 국민과 대통령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정치권의 언어 습성이다. 국민과 대통령 중 누구를 높여야 할까? 어떻게 보면, 이런 질문을 오늘날 해야 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대통령은 국민의 권력을 일시적으로 위임 받은 사람이다. 헌법 상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이들 앞에서 봉사할 것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선서했다면, 당연히 대통령보다 높여야 할 것은 바로 국민이다.

하지만 정치권의 일련의 공식적 발언들을 볼 때, 국민이 높은 것인지 대통령이 높은 것인지 분간이 쉬이 가지는 않는다. 지난 5월 18일 치 브리핑에서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하실 예정입니다" "~을 중요시 하시고" "~을 결정하신 것 입니다" 등의 높임말을 썼다.

그런데 청와대의 브리핑이란 것은 국민들께 공식적으로 밝히는 메시지다. 브리핑이 청와대의 입장과 대통령의 뜻과 행보 등을 국민 앞에서 밝히는 것이라면, 응당 압존법을 썼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비단 이는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 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무총리, 여당 대표와 소속 의원들부터 심지어는 제1야당의 김한길 대표까지 자주 대통령을 공공연한 자리에서 높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외에 거론하지 않은 다른 정치인과 관료들 대부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압존법이란, '문장의 주체가 화자보다는 높지만 청자보다는 낮아, 그 주체를 높이지 못하는 어법'이다. 물론, 이 압존법은 부모 등 혈연관계, 사제 간에만 적용된다(국립국어원, <표준언어예절>, 2011).

많은 사람들이 압존법을 비단 부모 등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꽤 포괄적으로 사용해왔다. 하지만 이 때문에 언어생활이 지나치게 경직되거나 전통적인 언어 현실과 맞지 않는 폐해가 있어 적용 범위를 좁혀 놓은 것이다.

공식 브리핑에서 높여야 할 대상은 국민이다

하지만 생각해본다. 압존법의 범위를 한정해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지나친 경직성을 없애고 전통적인 언어현실과의 조화로 요약할 수 있다면 당연히 한정해야 할 것은 한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가?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서도 압존법을 배제해야 할까.

오히려 실익을 생각한다면,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는 오히려 이런 경직성이 존재해야 할지 모른다. 왜 그러한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은 대통령보다 높여야 하고 우선해야 할 존재라는 것은 분명히 해둬야 할 필요성이 남아있다.

특히, 세월호 사건과 관련하여 '나라의 참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회의가 정치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권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아무런 당도 지지하지 않는 계층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국민들에 회의에 대하여 정치권이 초심으로 돌아가,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도 압존법이 존재해야 한다는 명시적인 선을 그을 수 있다면. 그러한 경직성은 오히려 지향해야할 바가 아닐까?

박근혜 대통령도 유지해야 할 규제는 유지하고, 완화해야 할 규제는 완화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위해 직장에서 압존법을 폐지하는 것은, 좋은 선택일 것이다. 반대로, 국민은 대통령보다 높여야할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는 압존법이 존재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다.

또한, 전통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여 이를 바탕으로 미래 재생산을 도모할 때 유의미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서는 압존법을 쓰는 게 낫다. 이미 대한민국 건국이래 줄곧, 주권은 국민에게 있었고 대통령은 이들이 맡겨준 권력으로 이들에게 헌신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물론,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하거나 헌정질서를 어지럽힌 본분을 망각한 대통령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국민들은 4·19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민이 대통령보다 높여야 할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해왔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이렇다면, 오늘날 이 이념을 재확인하고 미래에도 지속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한 국가 원수다. '국민 개개인'은 대통령을 직접 대할 때, 그에 맞는 존칭과 예우를 해줘야 할 것이다. 더욱이 대통령을 보좌해야 할 관료들이 대통령을 대할 때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 일반' 앞에서는 다르다. 공식적인 브리핑, 기자회견, 공식 인터뷰 등에서는 당연히 높여야 할 것은 대통령이 아닌 국민이다.

'노동'이라는 말 속에는 정의와 평등이 담겨 있다

지난 4월 30일 국립국어원은 '노동자'라는 단어를 '근로자'로 다듬어 써야 바람직하다고 공식 트위터를 통해 밝혔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지난 4월 30일 국립국어원은 '노동자'라는 단어를 '근로자'로 다듬어 써야 바람직하다고 공식 트위터를 통해 밝혔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 국립국어원 트위터 갈무리

관련사진보기


다음으로, 고민해볼 문제는 '노동'과 '근로'라는 언어의 현재적 의미다. 지난 5월 1일은 '노동자의 날' 124주년이었다. 물론, 현재 국가적인 공식 명칭은 노동자의 날이 아닌, '근로자의 날'이다. 이 명칭은 1962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만들어진 것이며, 이후 노동자의 날 행사들은 근로자의 날 관제행사로 대체됐다.

이 근로자의 날을 맞아, 지난 4월 30일 국립국어원은 '노동자'라는 단어를 '근로자'로 다듬어 써야 바람직하다고 공식 트위터를 통해 밝혔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나중에 이 주장은 <국어순화자료집>에 1993년, 노동자가 순화 대상어에서 제외된 사실을 국어원 측이 확인하고 정정함으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오늘날 새삼 고민해봐야 할 것은 '노동' 과 '근로'의 차이일 것이다. 노동이란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이며, 노동자는 '자본가와 대등한 입장에서 노동계약을 맺는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임금노동자들 입장에서는 '대등한 입장'이라는 설명이 눈에 쏙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고용돼 일하는 사람들로서 마땅한 대가를 요구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본가와 대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계약이란 것은 이를 보장하는 장치다. 이렇게 보면, 노동과 노동자라는 말에는 평등과 정의라는 중요한 가치가 함의돼 있다.

하지만, '근로'라는 말이 '노동'으로 대체될 때 이러한 가치들은 이내 탈색되고 만다. 단지 '부지런히 일함'이란 의미의 근로가 노동의 자리를 대신함으로서, 수많은 노동자들은 근로자가 된다. 그리고 그들을 지칭하는 말에는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의 의미만 남는다. 이 말에서는 정의도 평등도 느낄 수 없다.

그리고 정부나 기업에서는 근로라는 말을 훨씬 더 공공연히 써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일부 누리꾼들은 "기업 입장에서는, 부지런히 일이나 하길 바라겠지" "도대체 뭘 다듬어 내겠다는 것이지? 노동자의 권리?" 등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언어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민보다 높은 대통령'... 위험하다

같은 업무를 하고 능력에 별다른 차이가 없어도, 훨씬 낮은 임금과 직업 불안정성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수백만에 이르는 시대다. 대기업 공장에서 일하다 암에 걸려도 산업재해 인정을 받기 위해 몇 년의 지루한 싸움을 해야 하고, 몇몇 노조원들은 외로운 싸움 끝에 번개탄을 피우고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결국, 우리 시대는 정의와 평등이 더더욱 요청되는 시대다.

나는 누군가가 대통령을 국민보다 높여 부르고 노동을 근로로 바꿔서 쓴다면 우리의 생각도 그렇게 변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생각이 그래서 대통령을 국민보다 높이고, 노동을 근로로 바꿔쓰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국민보다 높은 대통령'과 '근로'라는 말을 쓴다면, 꽤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때로는 이렇게 무심코 주고 받던 언어들과 거리두기 하고 검토해보자. 가끔은 그 현실이 씁쓸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우리 한 명 한 명이 '근로'를 '노동'이라고 부르고 '국민보다 높은 대통령'보다는 '대통령보다 높은 국민'을 말하는 데서 시작할 것이다.


태그:#박근혜, #대통령, #압존법, #노동, #근로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