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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키나와(沖繩) 나하(那覇)에서 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5km 정도 떨어진 도미구스쿠시(豊見城市)에는 일본의 구해군사령부호(海軍司令部壕)가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미군의 함포공격에 대비해 지하 깊숙이 파놓은 구 일본 해군 오키나와 사령부의 비밀 지하벙커다. 나는 아침의 쏟아지는 빗속을 지나 차를 타고 구해군사령부호를 찾아갔다. 출근시간이 겹쳐서 빗속의 도로 위에는 수많은 승용차들이 엉켜 있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차에서 내려 구해군사령부호의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차에서 입구까지는 아주 짧은 거리였지만 잠깐 뛰어가는 동안에 상의가 흠뻑 젖을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렸다. 비가 많이 내리는 오키나와. 오키나와에서의 여행은 이틀에 한 번씩은 비를 만났다. 오늘 내가 이 지하 사령부를 찾은 이유 중의 하나도 이곳이 지하에 파 놓은 시설이라서 비가 오는 날에도 편안히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군'에만 집중하는 자료관... 분노가 치민다

나무줄기에 단검을 장착한 무기가 너무나 무모해 보인다.
▲ 자료관 일본군 유품 나무줄기에 단검을 장착한 무기가 너무나 무모해 보인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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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부터 구해군사령부호 자료관이 이어진다. 당시 사용되던 방독면, 수통, 군복 등 군용물품들과 함께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미군이 상륙 후에 치른 전투와 관련된 흑백 기록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그중에는 긴 나무줄기에 단검을 붙여 총검같이 사용한 전시물도 있다. 이토록 단순한 무기로 미군에 덤벼들 생각을 했던 당시 일본군의 실상이 너무나 무모해 보인다.

자료관 앞에는 일본이 자랑하던 전함 야마토(大和) 모형과 미군의 공격으로 침몰되는 야마토 전함의 액자 그림이 함께 전시돼 있다. 1945년 초 미군이 오키나와 문턱까지 이르자 일본해군은 야마토를 460mm포의 지상포대로 역할을 맡기도록 결정하고, 함대를 이끌고 오키나와로 출발한다. 그러나 미군은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132대의 전투기와 50기의 폭격기 등으로 야마토를 집중 공격해 침몰시켰다.

미군의 집중폭격으로 승무원 3천명이 수장된 일본의 전함이다.
▲ 야마토 전함 모형 미군의 집중폭격으로 승무원 3천명이 수장된 일본의 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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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야마토 전함은 완전히 두 조각이 나버렸고, 함대사령관을 포함해 3000명에 달하는 승무원 대부분이 수장됐다. 내 옆에서 전적지 답사를 나선 것으로 보이는 일본인들은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전함에 애도를 표했다. 자신들이 입은 전함 피해만 부각시키고 수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죽어나간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자료관에서 나는 분노를 느꼈다.

이곳은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지하요새였기 때문에 지금은 여행자들의 관심을 모으는 전적지가 돼 있다. 1970년부터 전적지 관광코스로 개발된 이곳은 미군에 항전해 자결했던 일본군에 대한 찬사만을 늘어놓고 있는 곳이라는 비판이 오키나와 주민들로부터 끊이지 않고 있다.

전쟁 당시의 흔적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지는 지하사령부 갱도가 음침하다.
▲ 지하 갱도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지는 지하사령부 갱도가 음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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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지하 사령부의 총길이는 450m. 현재 관람이 가능한 곳은 275m이지만 지하 사령부의 중요한 부분은 다 공개돼 있다. 지하 갱도 입구에서 보니 좁은 계단이 뱀이 똬리를 틀듯이 상당히 깊게 아래로 펼쳐져 있다.

갱도를 약 20m 내려가서 지하 사령부의 지도를 보니 입구에서 자동차 P턴 하듯이 돌아보고 출구로 나가게 돼 있다. 조명이 어둡고 음침해서 마치 어두운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듯하다. 혼자 내려가라고 하면 두려움을 느낄만한 곳이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단체로 답사했던 우리나라 비무장지대의 땅굴의 모습이 겹쳐진다.

마치 땅굴처럼 지하에 파놓은 갱도 안에는 작전실, 막료실, 사령관실, 하사관실, 암호실, 의료실, 발전실, 비상통로 등 전쟁 당시의 공간이 있다. 각 방마다 일본어와 영어로 간략하게 각 방에 대한 설명이 돼 있어서 각 방의 용도를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구해군사령부호는 70∼80cm 폭에 높이 2m 정도의 좁은 갱도가 구불구불 연결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제주도에 있는 가마오름 일제 동굴진지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방공호 내부에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젊은 일본인 방문객 몇 명이 숙연한 표정으로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다. 여러 방을 들고 나오면서 그들과 몇 번 얼굴을 부딪쳤다. 그들은 전혀 떠들지도 않고 아주 경건한 태도로 속삭이듯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지하사령부를 둘러보고 있다.

일본해군 사령관과 장교들이 오키나와 전투의 작전을 짜던 곳이다.
▲ 작전실 일본해군 사령관과 장교들이 오키나와 전투의 작전을 짜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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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실은 지하사령부 내에서 가장 넓은 공간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 잘 정돈된 모습은 전쟁 후 일부 복원된 것으로 보인다. 벽의 한 면에는 당시 사령관과 장교들의 작전회의 모습을 삽화로 남겨놓았다. 지하의 백열등 아래에서 작전지도를 펼쳐들고 작전을 짜고 있는 모습이 처량해 보인다. 전투력에서 절대 열세이고 곧 죽음을 맞아들여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승산 없는 작전을 짜고 있었다.

당시 지하사령부 내에 있던 일본 해군은 연인원 4000명에 달한다. 그들은 이곳에서 대부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당시 지하사령부 각 방의 처참했던 잔해들은 모두 치워지고 없지만 주변에는 전쟁 당시의 중요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하여 이 지하사령부까지 공격해오자 최후까지 저항하던 흔적들. 막료실(幕僚室)에는 지하사령부호 내에서 수류탄으로 일본 해군 지휘부가 자결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수류탄이 터지면서 튀었던 파편 자국들이 벽면에 선명하게 박혀있다. 극한 상황에 몰린 인간들이 최후를 마친 처절했던 현장이다.

일본 지휘관들이 자결을 했던 수류탄 파편 자국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 막료실 일본 지휘관들이 자결을 했던 수류탄 파편 자국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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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방과 갱도의 벽면에는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전해주는 그림들이 걸려있다. 그중에는 병사들이 갱도를 파면서 나온 흙을 서로 등에 메고 지하사령부 밖으로 이동하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의문이 들게 한다. 일본 군인들만이 이 갱도를 파는 노역에 동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징용에 끌려온 수많은 오키나와 주민들과 함께 당시 한국에서 끌려온 징용자들도 이 갱도파기에 강제로 동원돼 마치 노예처럼 땅을 팠을 것이다.

일본군 외에도 오키나와 주민, 징용 한국인들이 동원되어 갱도를 팠을 것이다.
▲ 갱도 공사 일본군 외에도 오키나와 주민, 징용 한국인들이 동원되어 갱도를 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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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8월부터 많은 식민지 한국인들이 오키나와의 비행장 건설과 군부대 지원을 위해 강제로 동원되었으며 그 수는 1~2만 명으로 추정된다. 또한 오키나와의 일본군을 위해 한반도 출신의 종군위안부 피해자 1000명가 이곳에 끌려왔다고 전해진다.

그중 얼마나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 오키나와에서 죽어갔는지는 집계조차 돼 있지 않다. 한반도에서 끌려온 사람들의 수는 일본군에 의해 감춰지고 폐기됨으로써 추정 가능할 뿐이고, 오키나와에서의 한국인 피해는 앞으로 규명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 지하사령부를 돌아보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수없이 많은 오키나와인들과 한국인들이 이 지하 갱도를 파면서 희생되거나 오키나와 전투 와중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 현장에 서 있으니 마음이 숙연해 진다.

지하갱도 여기 저기에는 여러 용도의 작은 방들이 만들어져 있다. 의료실, 발전실, 신호실 등은 발전기나 통신기 등의 기계가 방 안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저 토굴 같은 공간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깊은 땅 속, 방과 방 사이는 갱도를 따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지하를 흐르는 지하수가 고이지 않고 흘러나가도록 통로 옆에는 작은 수로 같은 홈이 파여 있다.

서 있는 상태로 잠 청하는 사람들

갱도 곳곳의 곡괭이 자국이 역사의 상흔같이 남아있다.
▲ 공사에 사용된 곡괭이 갱도 곳곳의 곡괭이 자국이 역사의 상흔같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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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실제로 지하사령부를 만드는 공사에 사용되었던 곡괭이가 전쟁의 역사를 실감나게 보여주려는 듯이 세워져 있다. 곡괭이 뒤쪽에는 일본 군인들이 곡괭이로 굴을 파나가던 그림이 걸려 있다. 갱도와 각 방의 벽면을 자세히 보면 이 지하시설을 뚫으면서 생긴 곡괭이 자국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갱도를 지날 때마다 조명 아래를 보면 이 곡괭이 자국이 아주 잘 드러난다. 마치 당시 역사의 상처인 듯 곡괭이 자국은 아주 날카롭게 파여 있다. 곡괭이 자국 하나하나가 모두 당시의 상처인 것 같이 파여 있다. 

하사관들이 휴식을 취하던 하사관실은 연달아 두 개가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는 가장 충격적인 그림이 당시의 상황을 증명하고 있다. 전쟁 도중에 도저히 발을 뻗고 누워서 잘 자리가 없었던 병사들이 일렬로 서서 잠을 자고 있는 그림.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서서 잠을 청하는 불쌍한 인간들의 모습들이다. 매일 같이 저렇게 서서 자야 한다면 일반 사람들은 제정신으로 살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사관실의 일본군들은 잠을 청할 곳이 없어 서서 잠을 청하고 있다.
▲ 서서 자기 하사관실의 일본군들은 잠을 청할 곳이 없어 서서 잠을 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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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사령부 통로의 지하 사령부 구조도를 보면 사령관과 막료, 하사관을 제외한 일반 병사의 방은 아예 있지도 않다. 일반 병사들은 방도 없이 갱도의 통로에서 마치 가축이 사육돼듯 휴식을 취했다. 참으로 잔인한 전쟁범죄의 현장이다. 이런 죽음의 지하에 젊은 군인들을 몰아넣고 자살을 강요한 일본의 역사에서 무책임한 정치인과 군인들의 광기가 느껴진다.

사령관실은 지하 사령부의 한 중앙에 있다. 자세히 보니 입구 쪽에서도 사령관실을 들어올 수 있어서 이미 한 번 본 방이다. 하사관실을 둘러보고 출구로 연결되는 갱도를 나가다 보니 또 다른 출입구가 사령관실과 연결돼 있다. 분명히 봤던 방이라는 생각에 방을 나섰다가 다시 확인해 보니 아까 봤던 사령관실이 맞았다. 지하사령부를 지휘하는 사령관실은 연락체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앞뒤로 통하게 만들어뒀던 것이다.

구슬프다, 오키나와

벽면에 사령관의 마지막 항전결의가 적혀 있다.
▲ 사령관실 벽면에 사령관의 마지막 항전결의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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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실은 다른 방보다 넓고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 지하사령부 각 방에는 당시에 실제로 사용됐던 물건들이 전시돼 있는데, 사령관의 방에는 전투회의 때 사용되었던 나무탁자가 전시돼 있다. 벽면에는 사령관이 미군에 항전하는 전투 결의의 글귀가 희미하게 전쟁의 상흔처럼 남아있다. 사령관의 이 마지막 항전 결의가 수많은 부하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출구 쪽으로 나오다 보니 오키나와 전투 당시의 상황도가 있고, 그 안에는 전쟁 당시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경로와 구일본 해군의 지하사령부가 표시돼 있다. 미군을 표시한 빨간 화살표가 일본군의 지하사령부를 포위하며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1945년 3월 26일 미군이 오키나와에 대한 공략에 들어간 이후 6월 23일까지 약 3개월간 오키나와를 무대로 한 미군과 일본군 최후의 지상전이 눈앞에 그려지고 있었다.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 중 일본 본토에서 미군 상륙으로 유일하게 전투가 일어난 격전지이다. 당시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군의 일본 본토 결전의 시간 벌기로 전개됐다. 지하사령부의 전투 상황도를 보니 전쟁 막바지인 6월 4일부터 6월 13일까지의 전투상황도이다. 미군과 일본군의 전투로 인하여 오키나와 주민, 일본군, 미군, 한국인 등 모두 24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전쟁놀이같이 간략하게 묘사된 전투 상황도이지만 그 안에는 24만 명의 원혼이 서려 있는 것 같다.

분명히 지하의 아래쪽으로 계속 내려왔는데 저 멀리 외부에서 희망의 빛이 들어왔다. 지하사령부 자체가 평지에서 지하로 파고 내려간 것이 아니라 산 정상에 있는 갱도였기 때문에 그 높낮이로 인해서 출구가 바로 외부와 연결된 것이다. 외부로 통하는 그 빛은 전쟁 당시에는 이 안에 갇혀 있던 병사들이 그토록 나가고 싶어 했던 외부세계와 연결되는 빛이었을 것이다.

왜 그들은 자결을 했을까? 포로로 잡히는 것보다 실제로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땅 속 폐쇄공간에서 미쳐간 지휘관들의 강압 속에서 병사들도 어쩔 수 없이 자결 수류탄을 들었을 것이다. 적군과 전투를 하다가 전사하는 것도 아니고 명예롭게 자결하라는 강요. 이런 사이비 종교에 이런 미친 전쟁도 없다.

슬픈 역사를 알리려는 듯 오키나와에는 구슬픈 비가 많이 온다.
▲ 폭우 속의 오키나와 슬픈 역사를 알리려는 듯 오키나와에는 구슬픈 비가 많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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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 밖에는 억수같이 강렬한 빗줄기가 내려붓고 있었다.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폭우에 조금씩 잠겨가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오키나와의 하늘에서는 무서운 빗줄기가 퍼붓고 있었다.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 때문인지 오키나와에는 참 구슬프고 강렬한 비가 참 많이 온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300편이 있습니다.



태그:#일본여행, #오키나와, #나하, #구해군사령부호,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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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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