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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3일. 시신 1구 수습, 여자 293번째. 신장 165~170cm, 상의: 긴팔 라운드티, 상표 joff, 하의: 검은색 청바지, 상표 에드윈.

68일 만에 바다 속에서 건져진 시신은 얼굴도 아니고, 이름도 아닌 입고 있던 옷의 상표로 존재를 알렸다. 수학여행 간다고 쫑알쫑알 하하호호 친구들과 쇼핑을 하고, 이게 예쁜지 저게 맞는지 조잘거리며 입어보고 앞뒤 재보고 그렇게 산 새옷을 수의처럼 입고 떠난 아이.

부모가 맞벌이를 하느라 아이가 무슨 옷을 입고 여행을 갔는지 몰랐던 부모님은 단 하루도 팽목항을 떠나지 않고 바다를 향해 딸의 이름을 부르며 뼈만이라도 보고 싶으니 제발 돌아와 달라고 빌었다. 그 부모는 이제라도 돌아와 다행이라며 딸의 시신을 안고 안산으로 돌아갔다.

난생처음 아빠가 사준 지갑이 아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징표가 되고, 나이키니 아디다스니 하는 상표들로 아이들의 신원이 확인될 때, 비싼 브랜드 옷을 한 번도 못 사준 엄마는 아이를 못 찾을까봐 아예 팽목항 시신이 들어오는 입구에서 24시간 불침번을 선다 했다.

제발 살아있기만을 빌고 또 빌었던 며칠의 시간을 지나, 얼굴만이라도 알아볼 수 있을 때 꺼내달라는 절규를 지나, 마지막 한 번만이라도 안아보고 보낼 수 있게 해달라는 애원을 지나, 이제 제발 꺼내주기만이라도 해달라는 하소연에 이르러 있다.

세월호침몰사고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들이 25일 오전 경기 안산 단원고에서 치료 뒤 첫 등굣길에 오른 2학년 학생들을 안아 주고 있다.
▲ '사랑한다, 힘내라' 세월호침몰사고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들이 25일 오전 경기 안산 단원고에서 치료 뒤 첫 등굣길에 오른 2학년 학생들을 안아 주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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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시신으로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11명. 이마저도 확실하지 않은 숫자. 살아난 아이들은 우리가 단원고 학생이라는 게 알려지더라도 이상하게 보지 말아 달라고, 길에서 웃더라도,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더라도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71일이라는 긴 수학여행을 끝내고 친구들이 사라진 학교로 돌아가는 아이들과 그들을 안아주는 자식 잃은 부모의 모습에 온종일 가슴이 아린다.

많은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남긴 세월호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앉자마자 허겁지겁 세월호 얘기부터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인 딸내미가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그 날짜가 단원고 아이들이 사고를 당한 다음날이었단다. 딱 하루의 시차였다.

세월호가 4월 16일이 아닌 하루 뒤에 사고가 났다면 자기 딸내미가 당했을 거 아니냐며, 평소 느긋하던 성격의 친구는 충혈된 눈으로 같은 얘기를 목청 높여 몇 번이고 반복했다. 자식과 관련된 일 앞에서 느긋하고 나긋한 부모는 없다. 더군다나 그 일이 불행과 관련된 일임에야.

자다 말고 깨서 울기도 하고 악몽에 시달리는 딸내미 앞에서는 뉴스를 보는 것도 조심스럽고 세월호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단다. 사춘기도 없이 지나간 무던한 아이였는데 이제 사춘기를 호되게 겪는다며 친구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가족들, 노동자 밀집 도시인 안산이라는 도시 전체가 겪는 깊은 슬픔을 넘어, 세월호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부산역 신축공사장 벽에 빼곡하게 글을 쓰며 울던 여고생을 잊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미안하다고 말할 때, 그 학생은 왜 안 구해줬냐고, 왜 죽어가는 친구들을 지켜 보기만 했냐고 벽에 쓰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주말마다 부산역에서 열리는 세월호 추모집회에는 낯선 얼굴들이 많다.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은데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아이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나왔다는 아주머니. 아이들을 마주보는 일이 이토록 죄스럽고 미안한 적이 없었다는 20년차 경력의 교사. 집안에서도 차안에서도 틈만 나면 눈물이 흐른다는 아이엄마.

그런 이들이 모여 주말마다 촛불을 든다. 지지난 주말엔 단원고 2학년 8반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멀리 부산까지 오셨다. 해경이 세월호에서 선원들을 구해낼 때 기울어가는 배 유리창에 비쳤던 아이들이 2학년 8반 아이들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부모님들의 얼굴을 보는 일이 참 힘겨웠다.

자신들에게 닥친 위험을 가장 먼저 느꼈을 아이들. 해경이 오고 헬기가 뜬 걸 보며 가장 먼지 희망을 품었을 아이들. 누구든 다가가 창문을 깨주기만 했어도 살았을 아이들을 수장한 부모들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오그라들고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비극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우리가 국민소득에 걸맞은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면 참사 이후의 과정들은 온 사회가 나서서 희생자들을 위로하며 상처를 보듬고 아물게 하는 시간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참사 이후 더 많은, 그리고 더 깊은 상처를 입어야 했다.

5월 8일 그날, 대통령은 유가족을 만나야만 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가져온 영정사진을 품은 채 5월 9일 새벽 박근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가져온 영정사진을 품은 채 5월 9일 새벽 박근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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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어린 자식의 영정을 가슴에 품고 새벽길을 걸어 대통령을 만나겠다며 길을 걷는 풍경. 그건 슬픔이 참담함으로 바뀌는 광경이었다. 배가 전복됐다는 사고 자체보다 단 한 사람도 구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내 나라가 이것밖에 안 됐었나 하는 자괴감이 컸다면, 그 이후 정부를 비롯한 이 사회가 보여준 모습들은 이게 나라인가 하는 참담함이 들게 했다.

슬픔조차 정파가 나뉘는 시대. 같은 편이 아니라면 극한의 고통과 슬픔조차 정부를 부정하는 반역이 되고 음모가 되는 시대. 세월호는 그동안 색색의 페인트칠로 겨우 유지하며 붕괴를 숨기고 있던 우리 사회의 추악한 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5월 8일 그날. 대통령은 유가족들을 만나러 나왔어야 했다. 나와서 아이들의 영정사진을 든 부모들을 안고 함께 울어야 했다. 아니, 유가족들이 자신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그 길로 차를 타든 걷든 절절한 마음으로 뛰쳐나와 유가족들이 한걸음이라도 덜 걷게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함께 울며 세월호의 고통에서 조금씩 벗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아니, 그렇게 할줄 몰랐고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갇혔다.

오히려 단죄와 엄단의 대상이 된 슬픔. 그 결과 수많은 이들이 연행되고 갇혔다. 그중에 정진우가 있고, 같은 날 같은 현장에서 구속된 김창건이 있고, 그 며칠 전에는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구속된 박선아 학생이 있다. 늘 순박한 마음을 보여주던 민주노총 유기수 사무총장이 있다. 전국공무원노조가 운영하는 '공무원U신문' 안현호 기자가 있다.

그중 정진우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주동했다는 죄로 구속되었다가 현재 보석 상태이다. 당시 희망버스 사건까지 병합될 전망이라 나오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걱정들이 많다. 그는 2011년 희망버스 당시에도 나와 우리 조합원들, 나아가서는 우리 시대 정리해고자들을 함께 지키겠다고 맨 앞에 섰다가, 두 번이나 연행을 당했던 가슴 따뜻한 이였다.

굴하지 않고 싸우다 수배생활을 해야 했고, 한진중공업 정리해고가 철회된 후 자진출두해서 결국 그해 겨울을 부산구치소에서 보내면서도 언제나 당당했던 이다. 이번 청와대 만민공동회, 만인대회 관련해서도 두 번이나 연행을 당했고, 결국 구속까지 당했지만 그는 늘 진지하고 물러서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실로 존경스럽다

희망버스 송경동.정진우씨가 구속 87일만인 지난 2012년 2월 9일 오후 부산구치소에서 출소했다. 사진은 두 사람이 꽃다발을 받은 뒤 들어 보이는 모습(오른쪽이 정진우 노동당 부대표)
 희망버스 송경동.정진우씨가 구속 87일만인 지난 2012년 2월 9일 오후 부산구치소에서 출소했다. 사진은 두 사람이 꽃다발을 받은 뒤 들어 보이는 모습(오른쪽이 정진우 노동당 부대표)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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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크레인 농성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나는, 이후 최강서 열사 장례투쟁 과정에서 끝없이 자기검열의 과정을 거쳐야 했고 내 스스로가 많이 위축됐음을 느꼈다. 잡히면 몇 년을 살아야 하는 기정사실 앞에서 담대하고 의연한 사람이야말로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는 그런 용기있는 자들에게 혹독했다. 구속된 정진우와 함께 희망버스 건으로 보석 중인 송경동 시인 역시 청와대 앞에서 추모집회를 하다 경찰들에 의해 차 위에서 폭력적으로 끌어내려지며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당시엔 구속을 보류했다가, 뒤늦게 경찰을 폭행했다는 혐의 등 2건을 추가하고 현재 3차 소환장까지를 발부하며 그마저 구속시키기 위해 혈안이다.

하지만 그 또한 물러서지 않고, 뼈도 붙지 않은 몸으로 다시 6월 28일, 민주노총 총궐기 날에 맞춰 '2014년 대한민국 세월호버스'를 타자고 한다. 그날은 쌀시장 추가개방반대를 위해 전국의 농민들이 함께 하고, 의료민영화, 철도민영화, 전교조 법외노조화에 분노한 모든 이들이 함께 한다고 한다.

벅차고 눈물겹다. 밀양 송전탑 건설반대 버스가 출발하고, 팽목항에서 추모와 기다림의 버스가 출발하고, 전주에서 진기승 열사버스가, 이정훈 유성기업 영동지회장이 250여일째 고공농성 중인 충북 옥천나들목 광고탑에서 민주노조 파괴에 맞선 버스가 출발한다고 한다.

우리가 분노로 나아갈 테니 그날 내려오자고 온몸이 무너져 있는 이정훈 동지를 설득했다고 한다.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염호석 열사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분노하는 자리를 갖겠다고 한다. 그 또한 거기 어디엔가 함께 서 있겠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잊지 말자고 무수히 외쳤다.
잊지 않아야 이런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는다고 피를 토했다.
잊지 않아야 내가 당하지 않는다고 거듭 다짐했다.
이 사회엔 말이 부족한 건 아니다.
무슨 사건이 생길 때마다 말들은 쏟아져 나왔고, 다짐들 또한 난무했다.
그러나 말은 오래가지 않았고 분노 또한 집요하지 않았다.
세월호 이후로도 이 나라에선 대서특필할만한 사건들이 이어졌고, 분노조차 일상화된 사회에선 분노마저 파편화되고 마침내 무력해지고 굳어진다.
세월호 추모를 이유로 구속되고 처벌받는 이들이야말로 말을 실천으로 옮기는 이들이다.
그들의 입이 틀어막힌 사회에 언론의 자유가 있는가.
그들의 사상과 생각이 구속당한 사회에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있는가.
세월호의 교훈이 이 사회의 개조라고 생각한다면 갇힌 자들부터 풀어주라.
진정으로 이 사회의 적폐를 해소하겠다면 억울한 자들의 목소리부터 들으라.

☞ 잊지 않기 위해, 6월 28일 '세월호 버스'를 탑시다

'세월호 버스' 웹자보
 '세월호 버스' 웹자보
ⓒ 세월호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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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김진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본부 지도위원(한진중공업 해고자) 입니다.



태그:#김진숙,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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