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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국제연합 헌장 제51조의 집단적 자위권을 향한 일본의 움직임이 매우 빨라지고 있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견제하는 한국·중국의 움직임에 맞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호주를 우군으로 끌어들일 목적으로 지난 6일부터 뉴질랜드·호주·파푸아뉴기니 순방 길에 나섰다.

또 아베 총리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필요한 법률 정비를 담당할 장관직까지 신설하려 하고 있다. 집단적 자위권을 향한 일본의 행보가 매우 신속하면서도 전 방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미국을 주시하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 5월 15일 오후 도쿄의 총리관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집단 자위권 행사 용인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 5월 15일 오후 도쿄의 총리관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집단 자위권 행사 용인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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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적 자위권은 이웃나라에서 분쟁이 발생했을 경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보다 더 빨리 군대를 출동시킬 수 있는 권리다. 즉, 주변 지역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일본인 보호나 일본의 안전을 빌미로 언제 어디든지 일본군이 출동할 수 있다는 게 이 권리의 본질이다.

그런데 집단적 자위권을 향해 달려가는 일본 못지않게 미국도 함께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랬듯이 일본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대외전략이 상호 보조를 맞추면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일본과 손잡고 있는 미국의 움직임도 함께 주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국이 주일미군을 통해 일본을 통제하고 있으므로 일본의 대외전략을 볼 때는 미국의 태도를 반드시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같은 미국·일본의 숙명적 관계를 반영하는 발언이 지난 1일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추진을 환영한다"면서 "(이것을 계기로) 미·일 동맹관계를 효과적으로 만들고 일본의 자위권 행사 범위를 넓힐 수 있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미일동맹은 아시아·태평양 전략에 매우 중요하다"는 말도 남겼다.

이처럼 미국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이 자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위안부(일본군 성노예) 문제 같은 비(非)군사적 문제에서는 한국의 기분을 '살짝' 맞춰준 미국이, 이 같은 군사적 문제에서는 여전히 일본의 편을 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흥미로운 것은, 과거에도 이 같은 미·일 유착이 있었고 그것이 결국 일본의 미국 침공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미래가 과거와 똑같은 양상으로 되풀이되지는 않지만, 지금 눈앞에서 과거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이치적으로 타당하다.

남의 땅 넘보지 않는 착한 미국, 이유가 있었네

<조선책략>. 경복궁 안의 고궁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조선책략>. 경복궁 안의 고궁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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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은 미국을 선량한 나라로 인식했다.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은 조선 관리 김홍집에게 선사한 <조선책략>이란 자필 논문에서 "(미국은) 예외로써 나라를 세우고 남의 영토를 탐내지 않고 남의 백성을 탐내지 않으며 남의 내정에 간여하지 않았다"면서 "(미국은) 항상 약소국을 돕고 공의를 유지하며 유럽인들이 악을 행하지 못하게 했다"고 극찬했다.

19세기의 중국인들은 영국·프랑스·러시아 같은 나라들을 야만적인 침략자로 인식했다. 그러면서도, 유독 미국은 위와 같이 좋게 생각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9세기에 중국에서 활동한 미국 상인들은 영국·프랑스 상인들처럼 아편무역에 크게 가담하지 않았다. 또 당시 중국을 방문한 미국인 선교사들은 영국·프랑스 선교사들처럼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지 않았다.

또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은 남북 갈등과 인디언 정복 문제 때문에 지금의 미국 땅 외부를 침략할 여유가 없었다. 당시 미국의 목표는 지금의 미국 땅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1867년에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구입하여 태평양 북쪽에 거점을 마련하고 같은 해에 미드웨이섬을 점령하여 태평양 중앙에 거점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이때만 해도 미국의 일차적 관심은 지금의 미국 땅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1871년 미국이 조선을 침공하는 신미양요를 일으킨 것은 다소 예외적인 행동이었다. 외국을 침략할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무리한 원정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부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1880년 이전만 해도 중국인들이 보기에 미국은 외부세계를 침략하지 않는 나라였다.

미국이 지금의 미국 땅에 대한 지배권을 굳힌 것은 1886년이었다. 1886년이면,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발생하고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한 지 2년 뒤였다. 이미 1865년에 남북전쟁을 종결하고 남북 갈등 해결의 토대를 구축한 미국은 1886년에 애리조나주(미국 서남부) 및 멕시코에 기반을 둔 아파치족을 약화시키고 추장 제로니모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미국은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최종적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황준헌이 김홍집에게 <조선책략>을 건넨 때는 1880년. 이때만 해도 미국은 앞서 설명한 대로 대외침략을 본격화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침략주의 활동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이 때문에 황준헌이 미국을 그처럼 아름다운 나라로 묘사했던 것이다.

미국은 어떻게 일본과의 파트너십에 성공했을까

그런데 1886년에 인디언과의 전쟁을 끝낸 뒤부터 미국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식민지 개척을 위해 제국주의 국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이미 1867년에 알래스카와 미드웨이섬을 확보한 미국은 1898년에 하와이왕국·필리핀·괌을 차지하고 1899년에 태평양 남부의 사모아섬과 괌 동북쪽의 웨이크섬까지 점령했다. 이로써 미국은 광대한 태평양의 주요 거점들을 차지했다. 남의 땅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던 미국은 이로써 동아시아에 바짝 접근하게 되었다. 

동아시아에 바짝 접근하기는 했지만 미국 혼자서 동아시아 진출을 추진하기는 힘들었다. 동아시아에 대한 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 등의 지배력이 이미 막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파트너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그 파트너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이미 1854년에 미국과 수교한 나라다. 미국은 그런 일본을 동맹국으로 격상시키기로 결심했다.

미국이 일본과의 동맹을 가시화시킨 때는 1905년이다. 1905년이면, 이미 청일전쟁(1894년)에서 아시아 최강 청나라를 꺾은 일본이 러일전쟁(1904년~1905년)의 승리를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날 게 분명해지자,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러·일 강화협정을 중재하겠다며 나섰다.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이 포츠머스 강화조약이라 불린 것은, 이 조약이 미국의 중재로 뉴욕 동북쪽인 포츠머스에서 체결됐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이 조약을 중재하면서 러시아가 일본의 조선 지배에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은 일본과 별도의 비밀동맹도 체결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에 의해 체결된 비밀동맹의 핵심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위해 양국이 협력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미국은 아시아의 신흥 강국인 일본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정책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힘입어 1905년 겨울에 을사늑약(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기 23년 전인 1882년에 미국은 조선과 체결한 수호통상조약 제1조에서, 제3국이 조선을 위협할 경우에는 미국이 적극 나서서 중재하기로 약속했다. 그랬던 미국이 1905년에는 제3국(일본)과 밀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안전을 위협했다. 거기다가 루스벨트 대통령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의 중재를 통해 러시아마저 일본의 조선 지배에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참고로, 루스벨트 대통령은 포츠머스 강화조약과 모로코 분쟁 등을 해결한 공로로 2년 뒤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제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1901~1909년)은 뉴딜정책을 펼친 제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1933~1945년)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가쓰라 다로와 밀약을 체결한 윌리엄 태프트는 4년 뒤인 1909년 제27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처럼 일본을 이용하는 미국의 전략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이후에 한층 더 강화되었다. 제1차 대전의 본질은 기존의 챔피언인 영국과 신흥 강대국인 독일의 '타이틀 매치'였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영국 편에 가담했다. 독일의 적인 영국에 가담한 것은 당시 독일이 중국 산동반도에 대해 갖고 있는 이권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중국 무대에서 일본 자신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려면 독일의 힘을 약화시켜야 했기 때문에 영국 편에 가담한 것이다.

전쟁 막판인 1917년에 참전한 미국도 영국 편에 섰다. 그것은 미국의 대외무역이 독일 쪽 국가들보다는 영국 쪽 국가들 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가세를 계기로 영국 진영은 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국제적 스타로 급부상하고, 미국은 적어도 경제 분야에서만큼은 세계적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과 사이가 안 좋은 미국 의회가 베르사유 평화조약(제1차 대전 강화조약)과 국제연맹 가입을 거부했기 때문에, 미국은 제1차 대전 승전으로 인한 정치적 이익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미국이 정치적 손실을 어느 정도 만회한 것은 1921년에 열린 워싱턴 회의다. 세계 주요 국가들의 참가로 열린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은 태평양에서의 우월권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 회의에서 일본은 미국이 자국보다 더 많은 권익을 갖는 것에 동의했다. 이 같은 일본과의 파트너십에 힘입어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에서 강대국의 위상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1905년 및 1921년에 일본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에서 한층 더 강력한 위상을 갖게 되었다. 지난 1일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이 말한 것처럼 당시에도 "미일동맹은 아시아·태평양 전략에 매우 중요했다".

도 넘은 일본의 배신에 흔들린 우정... 결과는?

그런데 미국과 일본의 우정은 30년도 못 가서 흔들렸다. 1931년에 일본은 중국 침략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목적으로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것은 누구보다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는 일이었다. 중국 시장에 눈독을 들이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단독으로 중국 무대를 석권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이 미일동맹을 깬 것은 미국과의 협력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중국을 정복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뒤이어 만주국을 세우자, 미국은 격렬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런데 예전 같으면 미국 말을 잘 들었을 일본이 이때는 미국 말을 듣지 않았다. 미국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이 이미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이 반대하는 상황 속에서 일본은 1937년에 한 술 더 뜨는 행보를 내디뎠다. 중국 본토를 정복할 목적으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 대한 미국의 이익을 한층 더 침해하는 것이었다. 3년 뒤인 1940년에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동맹을 체결했다. 미국과의 동맹을 발판으로 성장한 일본이 새로운 파트너들과의 관계를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

일본의 배신이 도를 넘었다고 판단한 미국은 본격적인 견제에 나섰다. 미국은 일본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항공유와 고철의 대일 수출을 금지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해버리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해버렸다. 그러자 미국은 미국 내에 있는 일본의 자산을 동결해버렸다.

미국의 태도에 당황한 일본은 최고위급 회담을 제안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 땅에서 떠나라"는 원론적인 입장만 밝힐 뿐이었다. 그러자 일본은 미국의 기를 꺾을 목적으로 1941년에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했다. 이로써 미국과 일본은 본격적인 전면전에 돌입했다. 1905년에 본격화된 미·일 간의 파트너십이 1941년에는 전쟁 관계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일본의 화려한 배신으로 미일동맹이 파탄 나고 말았던 것이다.

미일관계가 파탄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두 나라의 꿈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두 나라 모두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꿈꾸었다. 그래서 두 나라의 파트너십은 언젠가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동상이몽이 아니라 동상동몽을 꿈꾸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생긴 것이다.

오늘날 미국은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에 대한 미국의 의존도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미국은 일본의 힘을 빌려서라도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대일 의존도는 점차 커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이 꿈꾸는 것은 여전히 동일하다. 두 나라 모두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힘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몽을 꾸는 이들의 파트너십이 결국 어떻게 될 가능성이 높은지는 1941년 진주사변이 잘 웅변하고 있다. 일본이 행사하고자 하는 집단적 자위권의 칼끝이 언젠가는 미국을 향하게 되지 않을 거라고 미국은 과연 확신할 수 있을까.


태그:#집단적 자위권, #일본 군국주의, #미일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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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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