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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 카를 슈미트는 누구나 이름은 들어봤을 법한 아주 유명한 독일 철학자다. 이 둘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나치 독일에 부역한 철학자라는 사실이다. 처음 이 사실을 접했을 때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나치부역자들이었다니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은 <히틀러의 철학자들>이란 제목의 책에서 처음 접하게 됐다. 이 책은 이본 셰라트라는 영국인 학자가 쓴 것으로, 나치 시대에 히틀러에게 동조했던 지식인이 아무런 내적 청산이 없었음에도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저자는 이를 파헤치기 위해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고 검토한 후 다큐멘터리 기법을 활용해 정치와 철학의 빗나간 만남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천재적인 철학 바텐더 히틀러

<히틀러의 철학자들>, 책 표지
 <히틀러의 철학자들>, 책 표지
ⓒ 여름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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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라고 지칭되는 유대인 집단 학살은 제노사이드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자행된 이 재앙은 지금까지 회자되면서, 인간의 폭력성과 잔혹성의 극단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반면교사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을 실행할 수 있었을까.

600만 명에 달하는 한 인종을 몰살시키겠다는 마음을 먹기 위해서는 살인에서 오는 죄책감을 초월할 수 있는 신념 체계가 필요하다. 더군다나 그것이 집단 학살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신념 체계에 대한 광신(狂信)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히틀러가 동원한 신념 체계는 바로 반유대주의였다. 반유대주의는 당시 유럽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반유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라는 굴레에서 기원했다고 보고 있다. 예수의 죽음에서 비롯된 반유대주의는 수천 년간 지속적으로 쌓여 있었는데, 히틀러가 그것이 극단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구멍을 뚫어낸 것이다.

히틀러가 자신만의 반유대주의를 구성하게 된 것은 독일 바이에른 주에 있는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면서부터다. 히틀러는 시간만 넘치는 교도소 독방에서 독서에 매진했다. 거기서 다양한 독일 철학자들을 접했다.

지금까지도 추앙받는 여러 독일 철학자들, 예컨대 임마누엘 칸트, 게오르크 헤겔, 프리드리히 실러, 요한 피히테, 프리드리히 니체, 리하르트 바그너 등에게서 히틀러는 그들의 철학적 영감 대신 반유대주의의 영감을 얻었다.

"극소수의 '계몽된 유대인'을 제외하면 대다수 유대인은 도덕적, 정치적으로 게르만인과 동등하지 않다. 따라서 그들은 배제되어야 마땅하다.(임마누엘 칸트)"

"나는 유대인들에게 시민의 권리를 부여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본다. 만약 그들의 머리를 잘라낸 다음 유대인적 사고가 단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새로운 머리를 갖다 붙인다면 그들에게도 시민의 권리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요한 피히테)"

"유대인은 그들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생존해 있다. 사실상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 역사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본질은 사라지고 단지 송장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게오르크 헤겔)"

"히틀러가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이 증명된 것 같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반유대주의 사상은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까지, 민족주의에서 과학까지 독일 사상의 모든 분야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본문 102쪽)"

히틀러는 천재적인 바텐더 기질을 발휘해 독일 사상의 모든 문야 속에 스며들어 있는 반유대주의를 뽑아내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라는 칵테일을 만들어냈다. 란츠베르크 교도소 수감시절의 왜곡된 독서가 만들어낸,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재앙을 일으킨 시작점이었다.

히틀러의 철학자들

히틀러가 바텐더로서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해 자신만의 반유대주의를 구축했다면,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독일인들에게 소위 '먹히도록' 뒷받침한 철학자들이 있다. 바로 앞서 언급한 카를 슈미트와 마르틴 하이데거다. 저자는 슈미트와 하이데거를 각각 히틀러의 법률가, 히틀러의 슈퍼맨으로 칭한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때 히틀러 총통과 동료 투사들이 명예로운 나치의 표지 아래에서 했던 연설은 유대인과의 이념 투쟁에서 현재의 전투를 감동적이고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거짓말에서 독일 정신을 해방시켜야 합니다."(카를 슈미트, 본문 153~154쪽)

국가라는 실체를 보호하고 정부의 가장 핵심적인 힘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용기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십시오……. 오직 총통 한 사람만이 독일의 현실이며 독일의 오늘, 독일의 미래입니다. 그리고 독일의 법입니다……. 히틀러 만세!(마르틴 하이데거, 본문 181쪽)

현재 실존주의 철학 및 현상학의 대표주자로 알려져 있는 하이데거, 조르조 아감벤과 같이 현대에 인기 있는 철학자들에게 끊임없이 호명되고 있는 슈미트. 이들은 사실 나치에게 부역하고 히틀러를 미화하는데 앞장섰다. 그들이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홀로코스트로 귀결되리라는 것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치에 부역했고,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당시 슈미트와 하이데거처럼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발터 벤야민, 테오도어 아도르노, 한나 아렌트, 쿠르트 후버 등의 철학자를 언급하면서 이들을 히틀러의 적들이라고 표현한다. 슈미트와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하고도 처벌받지 않고 지금까지 위명을 떨치고 있는 것과 달리 히틀러의 적들은 불운한 삶을 살게 된다.

발터 벤야민은 유대인으로 히틀러의 나치 치하에서 나치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파리로 망명했다. 이후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면서 스페인으로 다시 망명을 시도했지만 망명 도중 국경에서 나치의 추격에 버티지 못하고 자살한다.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한나 아렌트는 나치가 집권하자 독일에서 추방되었고, 나치가 패망하기 전까지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쿠르트 후버의 경우에는 독일 내에서 나치에 반하는 운동을 펼치다 죽기까지 한다.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와 나치에 반대한 철학자의 생애는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보인다. 절대적인 악을 추종했던 철학자는 지금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과 달리 나치에 불복한 철학자는 자살하거나 죽거나, 다른 나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왜 이런 사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일까.

공과(功過)의 딜레마

철학 분야에서는 많은 쟁점이 잠을 자고 있다. 가장 강렬하게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널리 보급된 사상 가운데 일부는 하이데거처럼 단 한 번도 유대인 대학살을 비난한 적이 없는 철학자들의 사상이다. 우리는 그들의 사상을 가르쳐야 하는가? 우리는 그들이 쓴 언어의 맥락을 무시한 채 거리낌 없이 학생들에게 <존재와 시간>을 읽으라고 권하고 슈미트의 저작과 논리학자 프레게의 책을 읽으라고 권해야 하는가? (중략) 방금 한 질문들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본문 378~379쪽)

저자가 <히틀러의 철학자들>과 같은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배워야하는가 또는 나치의 생체실험을 통해 얻은 의술로 사람을 치료해야하는가 등과 같은 딜레마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도 이런 딜레마의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다.

박정희는 16여 년 동안 독재자로서 민주주의를 가장할 뿐 부정하고, 자신의 권력을 수호하려했다. 때문에 대통령이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유신을 단행하고, 계엄령과 긴급조치 등을 통해 국민들을 탄압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오에도 박정희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도 많다. 당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의 경제를 성장시켰다는 공(功)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대한민국 국민의 힘으로 이뤄낸 것임이 분명하지만, 당시 대통령이 박정희였기 때문에 박정희가 경제성장을 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이렇듯 공과 과가 공존하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어렵다. 옹호하는 사람은 과를 공으로 덮으려고 하고, 비판하는 사람은 과로 공을 덮으려고 한다. 슈미트와 하이데거 그리고 박정희 역시 이런 딜레마가 존재한다. 하지만 공으로 과를 덮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과로 공을 덮을 수도 없다. 공과(功過)라는 것은 한 인물의 인생에서 배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슈미트와 하이데거가 나치 부역자라면(그들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처벌받지 않은 것은 분명 잘못이다) 그들의 사상을 공부할 때 그들이 나치 부역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들의 사상을 반유대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지양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박정희에 대해 배운다면 아무리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이뤄냈더라도 그가 독재자였던 것을 알고 있으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인물의 인생은 공이나 과라는 한 단면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인생에 있어서 공과(功過)란 공존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히틀러의 철학자들>(이본 셰라트 씀/ 여름산책/ 2014. 5/ 정가 2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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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본 기자의 블로그 http://picturewriter.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여름언덕(2014)


태그:#하이데거, #히틀러, #나치부역자, #벤야민, #칼 슈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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