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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3일 밤에 내려가 24일부터 28일까지 세월호 유가족 도보순례단과 함께 걸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 단원고 고 김웅기군,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그리고 이승현군의 누나 등이 포함된 순례단은 지난 8일 안산 단원고를 출발해 28일 진도 팽목항에 도착했습니다. - 기자 말

무안 성당에서 쉬는 사람들에게 찾아와 인사를 건네준 아버님
▲ 팽목으로 가는 길목에서 무안 성당에서 쉬는 사람들에게 찾아와 인사를 건네준 아버님
ⓒ 강봉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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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지난 24일 낮.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십자가를 지고 도보순례를 하는 웅기 아버님이 우리를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젖은 땀을 식히고 마른 담배를 태운 뒤였다. 양말은 벗어 말린 채 맨발로 마루 위에 걸터 앉았다.

"아유, 다들 생업은 어떻게 하고 이렇게 와주셨습니까? 정말 고맙습니다."

뭔가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들

앉은 사람들도 그날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다들 아무 말없이 쉬다가 열린 귀는 어쩔 수 없었는지 말이 들려오면 같이 웃어 버렸다. 그렇게 말문이 트였다.

'오늘 무안 성당에서 차려준 귀한 밥이 너무 맛있었다. 아버님이 힘드신데 우리가 짐을 대신 들어주는 게 어떻겠나' '어디서 왔느냐' '뭘 하는 사람이냐' '거기 분위기는 어떠냐' '언제까지 걸을 거냐' '오늘 어디서 잘 거냐'... 모두들 뭐라도 하나 해주려고 작정하고 왔다는 걸 알았다.

혼자 온 교사 분은 하루라도 십자가를 대신 들어드리고 싶어서 왔고, 장구 선생님은 다시 살아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장구라도 힘차게 쳐 드리려고 '마른 잎 다시 살아나'란 글귀가 쓰인 손수건까지 준비해 왔다. 풍암지구 두 여자 분은 맛있는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모자까지 나눠드리러 왔고, 광주 시민상주 모임을 만드신 분은 여기에는 오지 못했지만 도움 줄 분들과의 연락통을 자처하고 왔다.

벌써 하루를 함께한 서울서 온 여자 분은 아무 말 없이 함께 걸어드리러 왔다 했고, 혼자 온 스물 일곱의 광주 청년은 세월호 유족들뿐 아닌 지금 우리 나라의 이 상황이 너무 속상해서 왔다고 했다. 크로키로 열심히 우리의 모습을 그림에 담던 청년은 신부님이 함께 가자고 해서 왔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기사를 전하는 나는 천둥 벼락 소리에 놀라 가만히 있다간 곱게 죽지 못할 것 같아서 왔다고 말했다.

뭔가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함께 했다.
▲ 함께 걷는 사람들 뭔가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함께 했다.
ⓒ 강봉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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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마구 솟구칠 즈음에 웅기 아버님이 찾아왔다. 슬쩍 바라보 승현 아버님의 얼굴은 오기와 고통이 어려있어 말은커녕 눈 마주치는 것조차 죄송할 정도였다.

"고마워요. 내가 사람들 앞에서 말을 먼저 건네는 사람은 아니어서."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나야 뭐… 편하려고 시작한 게 아니라 고통 받으려고 걷기 시작한 거니까…"
"이렇게 말을 걸어주시니 너무 좋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아버님, 이것 좀 드세요. 저희가 여기 온다 했더니 여기저기서 많이 챙겨주셨어요. 꼭 드세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근데 정말 여기저기서 많이 주셔서 많이 먹었습니다."
"그래도 몸에 좋은 걸로 특별히 가져왔어요. 약이라 생각하고 드세요."
"그럼 하나만 주세요."


웅기 아버님이 십자가를 진 이유

"아버님, 십자가를 대신 들어드리고 싶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그건 안 돼요. 이건 어디까지나 내 몫이니까. 그 마음은 알아요. 여기 오셨으니 각자 자기만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실 거잖아요. 그럼 된 거지."

"저 서울시청에 유족분들 손이라도 잡아주러 갔었는데 암 것도 못했습니다."
"전 식당하면서 먹고 살았어요. 음식 만들어 내면 그뿐이니 누구랑 말할 일도 없었지요. 안산 분향소에 있는데 무슨 생각이 드냐면, 내가 저놈들을 어떻게 죽일까, 칼로 죽일까 석궁으로 죽일까, 그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내가 결정하지 말고 내가 믿는 하나님께 물어보자.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떠났죠. 나든 그 놈들이든 죽일 거면 하나님이 죽이실 테니."


팽목항으로 함께 가던 모든 순례자들에게 큰 힘이 돼준 쉼터. 뜻이 같은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되고 모두 하나가 되었다.
▲ 함평군 무안 성당의 대문 팽목항으로 함께 가던 모든 순례자들에게 큰 힘이 돼준 쉼터. 뜻이 같은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되고 모두 하나가 되었다.
ⓒ 강봉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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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할 때 사람들이 같이 오겠다는 걸 모두 말렸어요. 중간 중간에도 오지 말라고 뿌리쳤지요. 그 사람들 와서 다치면 내가 그걸 어떻게 견디겠어. 경기도를 지나갈 때까지 그래서 철저히 혼자였는데 그게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힘든 순간이었어. 충청도 지나니깐 오겠다는 사람들을 꼭 막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 저(스스로)가 오고 싶어 오겠다는 건데 내가 말릴 권한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말 잘 안 했지. 사람들도 힘들고. 그런데 내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딸을 하나 얻었거든…"
"딸이요? "
"오는 사람들 중에 우리 아들만 한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보자마자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 그래서 내가 먼저 말을 걸었어요. '너 어떻게 그리 예쁘냐. 내 딸 할 래?' 그랬더니 덜컥 '그래요. 할게요' 하더라고요. 그리고는 같이 온 아이 아빠한테 물어보더니만 아빠가 '어이구, 좋겠다 아빠가 둘이라서' 허허. 아, 그렇게 딸 하나 얻었어요. 매일 카톡으로 얘기해요. 그리고 나선 내가 오는 사람들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어요. 인사도 드리고. 내가 원래 재밌는 사람이거든. 농담도 잘하고. 허허."


"아버님, 그 십자가 교황께 전해주지 말고 우리나라 안에서 계속 돌리는 건 어떻습니까?"
"글쎄요. 아직 그런 맘은 없어요. 그냥 교황께 전해주고 세계를 위해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있어서요. 걸을 때마다 많은 생각이 드는데 이야기하다 보면 정해지겠지요. 지금은 그래요."
"아버님 말씀에 우리가 살아나는 거 같아요."
"아버님, 이거 꼭 드시고 가세요. 그래야 제가 돌아가서 '할 일 했다'고 자랑하지요."
"네. 허허. 맛있네요."


저 순간에도 남아 있는 유족을 생각하며 숨죽여 우셨던 웅기 아버님
▲ 진도 체육관에 도착한 두 아버님 저 순간에도 남아 있는 유족을 생각하며 숨죽여 우셨던 웅기 아버님
ⓒ 강봉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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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에서 팽목항까지 걸어간 웅기·승현 아버님의 길을 함께 하며 우리 모두는 꽃이 피어나길 바랐다. 두 아버님은 지난 7월 28일 팽목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가는 길에서 나는 마른 잎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았다. 두 아버님은 지금 대전을 향해 걷고 있다.

덧붙이는 글 | 7월 23일밤에 내려가 24일부터 28일까지 함께 걷다 왔습니다. 고발뉴스와 한겨레21 페이스북에 두 아버님의 순례길 소식과 일정이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태그:#세월호 십자가 순례단, #안산 팽목, #웅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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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은 필연적으로 무섭거나 치욕적인 일들을 겪는다. 그 경험은 겹겹이 쌓여 그가 위대한 인간으로 자라는 것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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