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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길었던 시간들…. 휴가를 떠나기에는 마음에 여유로움이 찾아들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 시간동안 남아있는 많은 일들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7월 29일, 박근혜 대통령 페이스북)

박근혜 대통령에게 세월호 침몰사고와 잇따른 인사실패, 지지율 하락 등은 "힘들고 길었던 시간들"이었다. 박 대통령에게 여름휴가가 편안할 수 없는 이유다. 그처럼 역대 대통령들도 '힘든 여름휴가'를 보내야 했던 경우가 많았다. 수해 발생, 민심이탈, 여야 대치정국 등이 원인이었다.

그런 상황 때문에 역대 대통령들은 여름휴가 기간 위기를 타개할 방안을 마련해 정국을 돌파해왔다. 하지만 대통령의 여름휴가구상으로 정국이 뒤집힌 적도 있지만, 오히려 정국이 냉각되고 지지율마저 떨어진 경우도 많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호원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호원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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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반일시위' 격해지자 "정치학생, 교수 뿌리뽑아야"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공로로는 경제발전이 꼽힌다. 그는 경제발전을 위한 자금을 한일협정을 통해 얻어냈지만 '굴욕적 회담'이라는 야당과 시민들의 비판에 직면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부터 시작된 한일회담을 통해 이듬해(1965년) 2월 한일기본조약, 4월 어업협정에 이어 6월 22일 한일협정을 체결했다. 학생들은 '굴욕적 회담'이라며 거리로 나섰다. 게다가 8월 14일 여당인 공화당이 단독으로 이를 비준하자 반대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민중당은 당 해체와 의원직 사퇴 여부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사분오열됐고, 공화당 안에서도 일부 당 간부들이 사표를 내는 등의 동요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박 대통령은 8월 15일 광복절 20주년 경축식을 마치고 16일부터 23일까지 여름휴가에 들어간다. 휴가차 제주 서귀포에서 머물던 박 대통령은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공화당 개편은 없고, 야당 말대로 협정 비준으로 일본 상품이 들어온다 해도 국산물건이용 운동 등의 대책이 있다"라며 "학생시위가 격화됐던데 대학 내 정치색을 띤 단체는 앞으로 해산돼야 한다"고 발표했다.

박 대통령은 휴가중인 8월 23일 청와대로 복귀해 국무총리와 중정부장으로부터 현안을 보고받고, 이틀 뒤인 8월 25일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박 대통령은 "정치학생, 교직자 뿌리 뽑겠다"라며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는 망국적 풍조를 단호히 시정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바로 다음날(8월 26일) 서울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됐고 제6보병사단이 서울에 진입해 반대시위가 치열한 곳에 주둔했다. 검찰도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을 구속했고, 배후인물로 지목된 인사들의 감시에 들어갔다. 이렇게 강압적 대응으로 박정희 정권에 위기로 작용했던 한일협정 국면을 마무리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휴가중 손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전두환 대통령이 휴가중 손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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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학생들 반미시위에 '학원안정법'으로 반격

전두환 대통령의 집권 중반기인 1985년은 어느 해보다 반미시위가 전국을 뒤흔들었다. 1984년 말부터 대학교 총학생회가 다시 등장한 이후 1985년 4월 17일에는 전국 62개 대학 학생회가 참여하는 전국학생총연합(의장 김민석 서울대총학생회장)이 출범했다. 전국학생총연합 아래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일명 '삼민투', 위원장 허인회 고려대 총학생회장)라는 투쟁기구가 설치되면서 학생들의 민주화요구시위는 더욱 치열해졌다.

이들이 전국적으로 관심받게 된 계기는 1985년 5월 23일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이었다. 이들은 미국문화원 도서관에 들어가 "5.18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사과하라" 등의 구호를 내걸고 주한 미국대사 면담을 요구하며 72시간동안 농성을 벌였다.

또한 구로동맹파업 등 노동운동진영까지 합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7월 20일 전두환 대통령은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대행사를 앞두고 노사분규나 학생소요를 일으켜 국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분단국가엔 또다른 비극"이라고 말했다.

전 대통령이 청남대로 여름휴가를 떠난 7월 22일, 청와대 사정수석이 주대하는 사정협의회에서는 "다소의 부작용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국법질서 경시 풍조가 없어질 때까지 국가기강확립을 위한 특별 대책을 마련했다"라고 밝혔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특별대책이 학원안정법 제정이었다. 청와대에서 마련한 학원안정법은 1984년 자율화조치 이전처럼 경찰들이 학내에 주둔해 '학원소요'를 막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이 여름휴가를 보내는 동안 학원안정법은 큰 암초를 만났다. 신민당과 국민당 등의 야당은 물론 미국정부에서조차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여름휴가를 끝낸 8월 17일,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확대당·정회의를 열고 "상황이 심각해 지금의 현행법으로는 한계가 있어 새로운 실정법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이 법이 나왔다"며 "법 제정이 긴박하진 않으나 좀 더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각계의 의견을 받아들여 판단하겠다"라고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대학의 2학기 개강 후부터 전 대통령의 지시로 학내시위에 경찰이 투입됐다.
김영삼 대통령이 경호원들, 수석비서들과 함께 조깅을 하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이 골프광이었던것에 반해 김영삼 대통령은 주로 조깅을 즐겼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이 경호원들, 수석비서들과 함께 조깅을 하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이 골프광이었던것에 반해 김영삼 대통령은 주로 조깅을 즐겼다고 한다.
ⓒ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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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시대] 김대중 대통령도 청와대 관저에서 휴가 보내

노태우 대통령의 집권 위기는 1990년 민주자유당(민자당)의 '날치기 법안 통과'로부터 시작됐다. 연초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은 7월 14일 방송관계법, 국군조직법, 광주보상법 등을 포함한 쟁점법안 26개를 30초 만에 통과시켰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평화민주당(평민당)은 의원직 총사퇴로 맞섰다. 그러자 7월 23일 노 전 대통령은 휴가지인 청남대에서 "야당이 요구한 지방자치제법이나 국가보안법 등 쟁점법안을 야당과 재합의하겠다"라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김영삼 민자당 최고위원과 김대중 평민당 총재의 만남을 성사시켜 난국을 타개하겠다는 정국 타개책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치자금수사란 명목으로 사정정국이 시작됐고, 1991년 이른바 '분신정국'이 벌어지면서 민심은 정권에서 등을 돌렸다.

지지율 90%를 기록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청남대 구상'이란 용어를 처음 만들어낸 대통령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첫 여름휴가를 마친 직후인 1993년 8월 12일에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 즉 '금융실명제'를 발표했다. 이후 김 대통령이 청남대로 휴가를 떠난다는 소식이 들리면 정가와 언론의 눈은 청남대로 쏠렸다.

그러나 김 대통령의 휴가가 계속 평탄하지는 않았다. 임기의 반환점을 돌았던 1995년 여름휴가 기간(8월 1일~7일)에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노태우 전 대통령의 4000억 원 비자금사건이 터졌다. 당시 김 대통령은 국민안전 컨트롤타워로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비난과 3당 합당시기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대중연설로 유명한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5월 14일, 첫 여름휴가부터 청남대로 많은 양의 보고서를 챙겨와 연설원고를 작성했다고 한다. 또 해마다 김 대통령은 휴가지에서 광복절 축사를 준비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휴가 때에도 회담자료를 검토했다. 그랬던 김 대통령도 ▲ 세 아들의 비리 연루 ▲ 효순이·미선이 사건 수습 미비 ▲ 민주당의 지방선거 참패 등으로 인해 임기 말기에는 여름휴가를 가지 못하고, '일정만 없는' 휴가를 청와대관저에서 보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와 함께 청남대에 방문했다. 이 날은 노무현 대통령이 청남대에 방문한 첫날이자 마지막 날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와 함께 청남대에 방문했다. 이 날은 노무현 대통령이 청남대에 방문한 첫날이자 마지막 날이다.
ⓒ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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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명박] 노무현, 두 해만 여름휴가 다녀와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여름휴가 복이 가장 없었다. ▲ 2004년 탄핵 소추 ▲ 2006년 태풍 에위니아로 인한 수해 ▲ 2007년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사건 등으로 5년 임기 가운데 노 대통령이 여름휴가를 갈 수 있었던 해는 2003년과 2005년뿐이었다.

특히 임기 중간지점인 2005년의 7월 30일 여름휴가 때에는 여야 모두에게 비판받았다. 당시 노 대통령은 삼성X파일 사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문제에 둘러싸여 있었다. 업무에 복귀한 8월 8일, '한나라당과의 연정'을 위해 대통령 조기사임을 제안하고 삼성 X파일 수사에서 1997년 대선후보들을 조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해 비판받았다.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고 선언한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첫 해인 2008년 7월 26일~30일 진해 해군 휴양지로 휴가를 다녀왔다. 당시는 한미소고기협상으로 불거진 '촛불정국'과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 등으로 정국이 어수선했지만 휴가를 다녀온 이 대통령은 특유의 '불도저 리더십'으로 정국을 풀어나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사문제였다. 당시 이 대통령은 8월 6일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을 청문회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임명했다. 원혜영 당시 민주당 대표가 "인사청문회 없는 장관 임명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했지만 이 대통령은 이를 묵살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저도에서 휴가를 즐기는 모습
 박근혜 대통령이 저도에서 휴가를 즐기는 모습
ⓒ 박근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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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휴가지가 '저도'에서 '청와대 관저'로 바뀌다

지난해 7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다는 저도로 닷새 동안의 휴가를 다녀왔다. 당시 박 대통령은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과 대선공약 파기 논란,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등에 시달렸다. 하지만 휴가를 다녀온 뒤 청와대 비서실장을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으로 바꾸는 등 공세적인 정국 반전에 나섰다. 게다가 8월에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이 터지고, 정당해산심판 청구가 진행되면서 박 대통령에게 유리한 국면이 만들어졌다.

박 대통령의 올해 휴가지는 저도에서 청와대 관저로 바뀌었다. 7.30 재보선을 이틀 앞두고 휴가 일정에 들어간 박 대통령은 ▲ 세월호 침몰사고 국정조사와 특별법 제정 ▲ 쌀시장 개방과 의료영리화 논란 등에 둘러싸여 있었다. 특히 세월호 침몰사고 국면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을 고려해 휴가지를 청와대 관저로 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야당은 휴가일정을 강행한 박 대통령에게 "불통 대통령"이라고 비판했다.

7.30 재보선에서 새누리당이 '11 대 4'로 승리를 거뒀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휴가기간에 '재보선 압승'이라는 큰 선물을 받음으로써 정국을 주도할 발판을 마련했다. 3일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까지 발표함으로써 2기 내각 인선도 마무리했다. 4일부터 업무에 복귀할 박 대통령이 이어질 국무회의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 주목된다.

덧붙이는 글 | 김현우 기자는 <오마이뉴스> 제20기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태그:#대통령, #여름휴가,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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