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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께 큰절 하다 깜빡 잠이 들었던 걸까? 아버지의 두 아들과, 그 큰아들의 다른 두 아들. 칙칙한 집안이다.
▲ 절하고 일어날 타이밍을 놓친 큰아들 조상님께 큰절 하다 깜빡 잠이 들었던 걸까? 아버지의 두 아들과, 그 큰아들의 다른 두 아들. 칙칙한 집안이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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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다. 지루하게 비를 뿌리던 구름이 걷히고 나니, 맨살처럼 드러난 맑은 하늘과 함께 민족의 명절이 왔다. 가을바람에는 추석에 대한 기억들이 실려 있다. 해마다 두 번씩 어김없이 찾아오는 명절은 누군가에게는 설렘과 행복이지만,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었다.

명절이라는 긴 연휴 기간은 어떤 이들에게는 참으로 불편한 시간이다. 재산 문제 때문에 다툼을 벌이는 형제의 이야기도, 고부 간의 껄끄러움으로 시댁 문턱 넘기를 사선 넘듯 하는 며느리의 이야기도 그 범주에 든다. 하지만 나의 명절 이야기에서 불편함이란 조금은 그 성격을 달리한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아버지, 그가 있다.

명절 때가 되면, 우리 집은 거의 대부분 암울했다.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되고 나서까지 조용히 명절을 넘긴 적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문제는 늘상, 명절을 신세 한탄의 제물로 삼았던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다. 음복술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탄인 셈이다. 그렇게 술에 취한 아버지와 얽히고설켜 가며 명절은 창백한 흉터처럼 마음에 생채기를 남겼다.

잠시 과거로 시간을 돌려 그의 성장 배경을 한 번 짚어본다. 전쟁은 그에게서 아버지의 존재를 앗아갔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유복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돈 벌어오겠다며 피난길에 만난 여인의 집에 하숙을 맡긴 어머니는, 그가 중학생이 되던 해에 유명을 달리한다. 동네 사람 몇이서, 공원 산자락에 그녀를 묻어주었다. 홀로 남겨진 그는 매일 저녁 산에 올라 묘지 옆에서 울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스토리는 듣는 이에게는 진부하게, 말하는 이에게는 절절하게 흘러간다. 겨울이면 공장 굴뚝 밑에서 잠자는 소년. 구두닦이부터 신문배달, 우유배달 등 도둑질 빼고는 안 해본 게 없는 소년. 추위와 굶주림이 유일한 친구였던 고아 소년. 모두 다 힘들었던 그 시기에 고아라는 업을 하나 더 안고 살았던 사람들의 전형적인 이야기.

그가 가장 힘들었던 날은 다름 아닌 명절 때였다고 한다. 식당은 문을 닫고, 그나마 사귄 친구들도 가족들에게로 돌아가고 결국 혼자였으니. 그때부터 술은 유일한 벗이 된다.

그 후 청년이 된 그는 처가 식구들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결국 나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명절 때만 되면 술상으로 바뀐 차례상을 앞에 두고, 귀에 딱지가 질 때까지 듣고 또 들은 레퍼토리의 일부이다. 그렇게 시작된 한풀이는 예상대로 쉽게 마무리 되지 않았다. 집 안의 술이 동날 때까지 몇 시간이고 같은 얘기를 들어야 했고, 결국에는 술상이 엎어지거나 집안이 뒤집어졌다.

어떤 날은 우리를 빼돌려준(?) 어머니 덕분에 집 근처 오락실 등을 배회하며 벼락을 피해갈 수 있었지만, 그런 날은 흔치 않았다. 더구나 두 아들들이 머리가 커지고 육체도 성장함에 따라, 소란은 오히려 점점 커져갔다. 어릴 적에는 명절 때 시끄럽게 싸우는 집은 우리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요즘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바람 잘 날 없는 집이 생각보다 많음을 알 수 있다.

'고아 소년' 시절 이야기 끝에 결국 술상이 엎어지고...

식당일 하시는 어머니 때문에 이성에 눈뜰 나이 전부터 전 부치는 일에 눈을 떴다. 위 사진은 100% 핸드메이드 내 작품이다.
▲ 명절 음식의 꽃, 부침개 식당일 하시는 어머니 때문에 이성에 눈뜰 나이 전부터 전 부치는 일에 눈을 떴다. 위 사진은 100% 핸드메이드 내 작품이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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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명절이다 보니, 명절에 대한 기억이 좋을 리가 없다. 집 안이 북적거릴 정도로 친척들이 많은 것을 부러워하는 게 아니었다. 두둑하게 받은 세뱃돈으로 장남감을 고르는 친구들의 모습이 부러운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끄럽지 않게, 아무 탈 없이 지나가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게 명절이었다. 물론 종종 외가에 가는 때도 있었다. '가방끈 짧은 고아 녀석'에게 아끼는 딸을 뺏겨버린 외가 식구들은 당연히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명절 당일에 아버지가 일을 나가서 차례를 함께 지내지 못하는 날은 오히려 평온하고 감사했다. 명절 전날 음식 장만하다가 판이 깨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 날은 연휴 내내 시달렸다. 오래 전 사춘기 고아 소년에게 깊이 박힌 명절 트라우마는 가정을 꾸린 후에도 그렇게 자식들에게 대물림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시간이 약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내 아버지의 경우는 예외인가 보다. 그의 기억은 여전히 외롭고 추웠던 청소년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아들 둘을 낳고 보니, 새삼 내 아버지의 젊은 날들이 느껴진다. 스물 넷, 철없던 나이에 덜컥 아이를 낳고서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자식들 붙잡고 넋두리하는 일뿐이었으리라.

뻔하디 뻔한 고아 스토리를 듣다가 나중에는 정말 지치고 화가 나서 "그럼 세상에 고아로 큰 사람들은 전부 아버지처럼 주정뱅이로 살고 있나요? 자수성가해서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도 많다구요!"라고 대들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자식에게 듣는 한마디는 그 어떤 송곳보다 날카롭게 폐부를 찔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은 불을 보듯 뻔했다.

작년 추석 연휴 기간 동안 가정폭력 신고가 평소보다 30~50% 증가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명절에 발생하는 가족 간 말다툼의 원인은 소통과 대화의 부재라고 한다. 아버지의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치더라도, 나 또한 그와 마음을 열고 대화를 시도해본 적이 있었는지 자문해본다.

하루아침에 악몽 같은 기억들이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화해와 용서는 선을 긋듯이 단칼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열악한 환경에서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가족을 위해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온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다면 어딘가에 출구는 존재할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이 되고 나서야,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영구불변의 진리이니까.

명절은 모름지기 잔치 분위기가 나야 한다. 전을 부치고 밤을 치며,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과 웃음꽃을 피워야 하는 법이다. 설령 오해가 있더라도, 서운한 감정이 있더라도, 명절 때만큼은 모든 걸 내려두고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보듬어야 한다. 그걸 이제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이번 추석에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가슴을 열고 한번 들어봐야겠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내몰리는 껍데기뿐인 가장의 어깨에 기운을 불어 넣어주고 싶다.


태그:#명절 차례, #명절 음식, #명절 가정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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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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