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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파마머리 할머니가 오시고 나서 소낙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날 앞집 낭자머리 할머니가 가랑비 속에서 가을무를 파종하셨다. 멀리서 쳐다보니 할머니는 오랫동안 일을 하고 계셨다. 먼저 곡괭이로 밭을 파고, 다시 나온 흙을 잘게 부순 다음 그걸 쇠스랑으로 다시 고르셨다. 그런 다음 비료를 흩뿌린 후 이윽고 씨를 뿌리셨다. 너무 긴 시간 동안 일을 하시는 듯싶어 일부러 신발을 신고 내려가 말을 걸었다.

"어머니, 좀 쉬었다 하시지 그러세요."

앞집 할머니는 이미 팔십을 훌쩍 넘기셨다. 그래서 평소 친근하게 어머니라고 불렀다.

"아니어, 이거 언능 해불고 쉬어야 써."

땀을 흘리면서도 할머니는 일을 계속하셨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잠시 더 머물고 있는데 그 파마머리 할머니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나타나신 거였다.

파마머리 할머니가 밭을 가는 낭자머리 할머니께 "무를 파종하느냐"고 묻자, 낭자머리 할머니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새로 오신 할머니는 잠시 밭가는 모양을 쳐다보시더니 개울을 타고 몇 걸음 걸어 콩밭 앞에 서셨다. 그 모습이 반갑고 새로워 할머니께 다가섰다. 그랬더니 내게 할머니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콩이 먹을 게 없어. 이파리만 좋재, 콩은 쬐까 밖에 안 열었어. 하이구."
"그래도 콩잎은 넓적하게 잘 크고 있어."
"이 냥반이 암것도 모르구만이. 저거는 껍데기만 좋은 것이어."

파마머리 할머니가 웃음 지실 바로 그때였다. 소나기가 갑자기 퍼부었다. 할머니께 어서 우산 속으로 들어오시라고 했다. 가랑비에 우중충한 날씨로 마침 우산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잘 걷지도 못 하시면서도 "이까짓 비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한사코 거절하시고 걸어서 돌아가셨다.

감나무 사진. 파마머리 할머니 집에도 이런 감나무가 있었다.
 감나무 사진. 파마머리 할머니 집에도 이런 감나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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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뵌 그 할머니, 나를 위해 감을 따주시다

그런 며칠 후, 또 뵙게 되었다. 마을회관에서 동네 분들과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파마머리 할머니가 그 자리에 계셨던 것이다. 꾸벅 인사를 드렸더니 예의 그 얼굴 가득 주름이 패는 아름다운 미소로 살갑게 알은체를 해주셨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난 뒤에는 그 할머니가 콩밭을 보러 오신 듯 개울 초입을 지나 우리 집 앞에 서 계셨다. 집 앞에 멈춰선 채, 그 모습을 가만 쳐다보고 있는 내게 뭐라고 웅얼거리셨다.

그리고는 이내 팔을 아래서 위로 몇 번 움직이시더니 무언가를 던지셨다. 머리 위까지는 힘이 없어 올리지 못하고 어깨 아래에서만 왔다 갔다 하시며 일종의 도움닫기를 하신 것이다. 그것은 간신히 개울을 넘어 우리 집 마당에 떨어졌다. 감이었다. 파마머리 할머니가 내게 감을 주시려고 일부러 손에 쥐고 오셨고, 나를 보시고는 그걸 받으라고 말씀하신 다음, 자신으로서는 힘껏 우리 집 마당으로 던지신 것이다. 아, 오랜만에 느끼는 고맙고 따뜻한 마음이었다. 그동안 누가 내게 이처럼 따뜻한 마음을 보여준 적이 있던가.

그러더니 또 언젠가의 아침이었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 가운데에 누군가 차를 세워놓고 가버리고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서성대고 있는데 그 길가의 집에 파마머리 할머니가 마당에 서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물었더니 그곳이 할머니가 사는 집이라며 특유의 파안대소로 반겨주셨다. 마당에 가을무가 머리를 쑥 내밀며 한가득 자라고 있고, 귀퉁이에는 마치 코끼리 귀 같은 김장배추가 퍼런 잎을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돌담 옆으로 커다란 단감나무가 익어 빨갛거나 아직 푸른 감을 뽐내고 있고.

할머니는 그 집에 혼자 사신다고 했다. "배추가 다른 집보다 좀 적다"고 했더니 혼자 먹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다. 하늘은 온통 파랗고 햇볕은 온 세상을 고루 비추고 바람은 시원했다. 허리를 굽힌 할머니는 내게 "감을 따주마"고 하셨다. 아니라고 해도 막무가내셨다.

할머니가 긴 장대를 들고 하늘을 향해 한글을 쓰듯 저으셨다. 보다 못해 "내가 하겠노라"고 했다. 끝이 한 쪽은 길고 다른 쪽은 짧게 벌어진 '감 따기 전용 장대'로 가지를 물고 돌려 꺾었다. 하지만 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겨우 두 개의 단감을 땄다.

그 모습을 답답하게 보시던 할머니가 장대를 뺏었다. 하늘에 떠 있는 감들을 내리치셨다.

"하하하"

할머니가 크게 웃으셨다. 내 머리와 옷에 홍시가 된 감들이 쏟아져 내린 것이다. 그리고는 다소 겸연쩍은 듯 말씀하셨다.

"머리를 감물로 파마해 부렀네이. 옷도 배래 불고. 미안하요이."

웃음소리가 시원했다.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오히려 감사드렸다.

"아니요, 할머니. 오랜만에 정말 기분 좋아요."

아, 세상에는 이런 기쁨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마머리 할머니가 어제(12일) 아침에는 집으로 단감이 든 비닐봉지를 가져다 주셨다. 좋은 이웃이 되어 주신 할머니께 감사드린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빈다.


태그:#산촌, #감,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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