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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법원종합청사(자료사진).
 서울 법원종합청사(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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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구형, 정직 4개월에 처해졌던 임은정(41·창원지방검찰청) 검사가 징계취소소송 항소심에서도 승소했다. 게다가 징계 자체가 위법했고, 무죄구형은 정당하다는 법원의 판단까지 끌어냈다.

6일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부장판사 민중기)는 "1심 판결을 취소해달라"는 황교안 법무부 장관의 항소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지난 2월 임 검사가 황 장관을 상대로 낸 징계취소소송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준 1심 재판부(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부장판사 문준필)의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항소심 재판부의 결론은 1심과 다르지 않았지만 징계 자체를 보는 시각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무죄구형의 정당성 여부를 놓고 두 재판부의 판단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2012년 12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소속이던 임은정 검사는 고 윤길중씨의 '통일사회당 사건' 재심에서 재판부에 '무죄'를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공판 업무를 다른 검사에게 넘기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따르지 않았다. '무죄구형이 맞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검찰청에서 법정까지 그가 줄곧 싸워온 이유이기도 했다.

1심 재판부는 백지구형(검찰이 재심사건 공판에서 무죄 취지로 '법과 원칙에 의한 판단을 구한다'며 형량을 정하지 않는 것)이 사실상 무죄구형으로 받아들여지는데다 이에 관한 별다른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상부 지시를 어기면서까지 무죄구형을 하는 일이 '공익의 대변자'라는 검사의 의무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정직 4개월'은 잘못에 비해 무거운 처벌이라며 징계를 취소했다(관련 기사 : 법원 "임은정 징계, 윤석열과 비교해도 형평성 어긋나")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무죄구형은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백지구형은 법원의 판단에 전적으로 맡긴 채 검사는 의견을 진술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이 정한 적법한 의견 진술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 검사는 재판부에 의견 진술할 때 반드시 유죄 주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인이 무죄일 경우에는 무죄를, 유죄일 경우 유죄를 말해야 하는 법적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덧붙였다.

과거사 '백지구형'하고 법원 뒤에 숨는 검찰... "적법하지 않아"

직무이전명령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1심 재판부의 판단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항소심 재판부는 서울중앙지검장이 아닌 임 검사의 직속상관이 그를 업무에서 배제할 권한이 없기도 하지만, 검사의 이의제기를 무시한 채 상부의 결정을 관철하기 위한 직무이전명령은 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임 검사가 검찰 내부통신망에 "재심사건 무죄구형은 의무라고 확신하기에 무죄구형을 하러 간다, 중징계를 받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고 글을 올린 일 또한 징계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결도 유지됐다.

법무부는 이 글이 외부로 유출되는 바람에 조직 내부에 혼란이 생기는 등 검사의 체면과 위신이 손상됐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임 검사가 무죄구형 후 사무실로 복귀하지 않고 퇴근한 점 등은 징계대상이라고 판단했다.

임은정 검사는 이날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백지구형 지시에 복종의무가 없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1심보다 진일보한 판결을 받고 보니 기쁘기 그지없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는 "대법원까지 가겠지만, 더욱 씩씩하게 가겠다"며 "제 고민이 담긴 항소심 최후의견 진술 내용을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2014. 8. 28. 원고의 최종 진술

제 사건을 간단히 정리하면, 저는 무죄사건을 무죄라고 논고하여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권재진 장관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무죄구형 때문이 아니라 상사의 직무이전지시 위반으로 징계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그 지시는 무죄를 무죄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어서 결국 무죄를 무죄라고 하여 징계한 것과 다를 바 없겠지요.

대학에서, 연수원에서, 선배들로부터, 제가 배운 '검사'는 세상에서 가장 객관적인 국가기관으로, 정의에 대한 국가의지의 상징입니다. 검사는, 의원들처럼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고, 행정부 공무원처럼 국가이익을 위해 저울질하지 않고, 오로지 진실과 정의에 따라야 할 준사법기관으로, 검사동일체의 원칙은 검사의 권한 행사 적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저는 배웠습니다.

윤길중 재심사건은 관련 검사들 모두 검사의 논고 직후 무죄선고가 되리란 것을 잘 알고 있던 사건입니다. 그런 뻔한 사건에서조차 무죄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참담한 현실에서, '임 검사, 자네가 그 시절의 검사였다면 어떻게 했겠나? 달리 할 수 있나? 검찰은 판단기관이 아니야. 법원이 판단하는 거야. 법원 보고 판단하라고 해' 등의 말이 떠도는 악몽 같은 현실에서, 저는 배운 대로 '무엇이 저에게, 검찰에게 이익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했습니다.

혹자는 어차피 무죄 날 사건이고, 검사의 의견은 법원을 기속하지도 않는데, 그렇게 유난을 떨어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의 정의에 대한 의지의 표출로서, 재판부에 대하여 정의와 법에 가장 부합하는 선고를 촉구해야 하는 검사의 의무에 대한 무지에 기인한 것입니다.

무죄구형을 강행하기로 작심한 후 1주일. 정말 할까 봐 무섭고, 결국 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 숨쉬기도 버거웠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공판검사석에 앉아 몸이 하도 떨려서 표내지 않으려고 혼이 났었습니다.

백범일지에 제가 참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기이한 것이 아니나, 벼랑 끝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장부의 기상이로다! 내가 비록 여자지만 검사인데, 대장부의 기상이 없으랴. 지금 이 벼랑 끝에서 손을 놓겠다. 놓아야 한다. 놓아라. 그렇게 주문을 외우며 무죄 논고를 하였습니다. 그때 변호인이 무죄 논고에 당황하여 '변호사 생활 20여 년 동안 무죄 논고를 처음 본다. 검사가 공익의 대변자임을 이제 알겠다'고 말할 때, 떨림이 딱 멈추데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싶었습니다. 그래도 무서워서 사무실로 돌아가지도, 휴대폰을 켜지도 못했습니다.

'나는 이 순간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검사의 직에 나섭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검사 선서에서 요구하는 검사의 자세는, 헌신은, 용기는 검찰총장을 비롯한 모든 검사가 매 순간순간 요구받는 것입니다. 검사는 위법하거나 부당한 상사의 지시가 아니라, 법과 정의에 따라야 합니다. 법률적인 불법(gesetzliches Unrecht)에는 복종의무가 없습니다. 검사는 상사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검사는 검찰과 국가의 권력의지가 아니라, 국민과 국가의 정의에 대한 의지를 표시해야 합니다.

저는 배운대로 검사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징계를 받아 이 자리에 선 현실이 참으로 서글픕니다. 준사법기관으로, 단독관청으로서 검사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현명한 판단을 바랍니다.


태그:#임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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