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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 현이는 어제 수영장에서 개한테 물려 병원에 다녀왔다. 하루가 지나자 물린 상처 부위에선 약간의 피가 더 나와 거즈에 응고돼 엉겨붙었다. 물놀이는 자제하는 게 옳다 판단하여 오늘은 루즈 비치로 갔다.

사실 캠핑장에 있고 싶지 않았다. 우리 캠핑 사이트와 가까워 대략의 내용을 알고 있는 스위스와 프랑스 집은 현, 쭈 또래의 아이를 키워서 그런지 다른 사람보다 감정과 생각을 더욱 강하게 표현했다.

자기네 나라에선 개가 아이를 다치게 하면 그 개를 총으로 쏴버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비는 총에 맞아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다. 문을 닫은 루드의 캠핑카를 힐끗 바라보며 목소리를 작게하여 말하니 상황이 더 심각하게 느껴졌다. 그 말을 듣고 난 양가감정을 느꼈다. 하나는 우리가 피해자면서 동시에 협상의 열쇠가 우리에게 주어진 느낌이 들었다. 다른 자식만큼 소중한 보비가 벼랑 끝에 선 것을 보는 루드와 페트라의 괴로운 마음을 생각할 때 느껴지는 미안함. 에라 모르겠다.

"여보, 그늘막 2~3인용으로 바꿔와. 비치에 나가자~"

붓기가 남아 있는 현이는 어느 나라에서 구입한지도 기억나지 않는 수영복을 입고 이렇게 한나절을 보냈다.
 붓기가 남아 있는 현이는 어느 나라에서 구입한지도 기억나지 않는 수영복을 입고 이렇게 한나절을 보냈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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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즈해변

청명하면서도 약간 짙은 하늘빛은 암초가 가까이 있어 밝고 어두움을 모두 가진 바닷빛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뤘다. 한국, 태국, 터키 모두 이 정도의 규모와 풍광의 관광지라면 어김없이 대여용 선베드를 깔아 놨을 테지만 이곳은 하나도 없다.

물도 차고 얼굴의 상처도 그렇고 해서 모래놀이를 했다.
 물도 차고 얼굴의 상처도 그렇고 해서 모래놀이를 했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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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비수기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 불규칙적으로 펴져 있는 파라솔은 아기자기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아빠랑 침대 튜브를 타고 아직 서늘한 바닷물에 들어갔다가 파도에 뒤집혀 바닷물의 짠맛을 본 후론 줄곧 모래 놀이를 했다.

나는 무라카미 류의 <달콤한 악마가 내게로 왔다>를 두 번째 완독한 후 <요리, 남자, 여자>의 또 다른 세계와 만난 것에 가슴 뿌듯해하며 간간이 달려가 아이들의 등판과 팔에 선크림을 발라주었다. 그리고 몇 줄만 읽어도 다양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장그르니에의 <섬>을 다시 읽었다. 긴 여행에서의 한국 활자는 가족만큼 간절하다. 읽고 또 읽고. 아껴 읽고 또 아끼고.

이건 연출 사진이다. 배경이 포르투갈엔 이런 배경이 많다.
 이건 연출 사진이다. 배경이 포르투갈엔 이런 배경이 많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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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이의 병원비를 주겠다는 루드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하자, 그럼 저녁을 함께 하자고 했다. 그마저 거절할 수 없어 오늘 저녁 약속을 잡았다. 저녁 약속이라 취침시간이 늦을 것이기에 아이들의 좋은 컨디션과 회복 중인 현의 상처를 생각하여 캠핑장으로 돌아와 낮잠을 재웠다. 그런데 루드가 네덜란드와 덴마크의 유럽축구대회 경기가 끝나고 보자 했단다.

'그럼 정확히 몇 시라는 거야?' 심기가 불편하다.

2. 사고 후

사실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게 옳은지 모르겠지만, 루드와 페트라는 현이의 사고 직후부터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우릴 도와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전혀. 내가 이성을 상실하여 벌벌 떨던 그 순간에도. 전혀.

물론 '안전한 방법으로 개에게 다가가기'를 가르치지 않은 부모의 책임이 크다고 해야겠지. 겁 많고 소심한 보비가 할아버지 의자 밑으로 들어가 숨었음에도 관심을 나타내며 쓰다듬으려고 했던 현도 문제겠지. 또 유럽의 방식은 부모가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이런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일 수도 있겠지. 워낙 개 관련 사고가 많은 유럽인의 눈에 현이의 상처는 경미한 것이기에 그리 호들갑 떨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모든 상황을 그들 입장에서 다각도로 이해해보려고 했다. 한편 이해가 간다. 그리고 우리의 잘못이 큰 것도 알겠다. 그러나 이는 '이해를 위한 이해'로 다소 억지스러운 느낌일 뿐 국가, 인종을 초월한 보편적 인간의 정서를 기반으로 한 자연스러운 이해가 아니었기에 난 기분이 나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말이다.

딱 어제저녁 파두 공연을 보면서 옆자리에 앉았을 때, 동등한 입장 가운데 있었을 때 서로 웃을 수 있었고 자연스러운 대화를 할 수 있었지만, 이미 사건이 발생한 후 왠지 우리의 관계는 '피해자-가해자'가 된 기분이다. 물론 그들의 개를 가해자로 생각하는 것은 내 생각일 수 있다. 여하튼 '이 식사는 동등한 입장에서 앉을 수 없다'라고 단정 짓자, 왜 이리 밥을 함께 먹고 싶지 않은지…. 시간은 점점 가까워져 아이들을 깨워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짜증이 난다. 이런 마음이었기에 옷도 대충 입고 화장도 하지 않고 레스토랑으로 가려고 텐트를 나왔다.

시간 약속을 똑 부러지게 하지 않았음에도 루드는 흰색 셔츠에 검은 바지, 그리고 구두, 페트라는 밝은색 얇은 긴소매와 긴 바지를 입고 포인트로 빨간 머플러를 둘렀다. 난 순간 그들의 복장을 보자 미안함이 들었다. 성의 있는 복장을 하고 우리 집 쪽 계단을 내려오는 그 모습 속에서 사고 후 그들도 많이 힘들고 괴로웠게 밤을 보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캠핑장을 벗어나 리즈비치에서 반나절을 보낸 우리보다 사건의 현장 가까이에서 하루를 지내며 내 생각보다 어쩌면 훨씬 '오늘 식사를 위해 우리보다 많이 고대하며 준비하고 있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과대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난 페트라와 포옹을 하며 '어젯밤 두 분이 힘들어 하실 것을 생각하여 잠을 잘 못잤다'고 말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요란한 루드와 말이 거의 없고 많은 것을 미소 띤 표정으로 말하는 페트라. 그들과 함께 식당 쪽으로 갔다. 우리가 처음 만나 웃고 떠들고 헤어지며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해주었던 레스토랑. 그런데 오늘은 '프라이빗 파티'를 해서 우린 사용할 수 없단다. 사실 알고는 있었는데….

중국음식이 어떠냐고 그들은 우리를 배려한 듯 말했고 "좋다"라고 여러 번 말을 했음에도 뭔가 다른 메뉴가 좋겠다 생각했는지 "이탈리아 음식은 어떠냐?"고 한다. "그것도 좋다"라고 말했고, 그는 어떤 부분을 근거로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이탈리아 식당으로 장소를 결정했다. 루드에겐 큰 캠핑카와 작은 오토바이가 있다는 걸 알았기에 모두 함께 이동할 수 있는 우리 자동차로 가기로 했다.

남편은 자동차를 정리하여 가져온다고 다시 집으로 뛰어갔고, 우린 레스토랑 앞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그 사이 루드는 식당에 들어가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 2개를 뽑아왔다. 하나는 너비가 5cm 정도나 될까 싶은 요지경 속에 10여 종의 동물 사진이 있다. 처음 가져보는 장난감에 현은 붓기가 덜 빠진 그 얼굴을 가지고 방긋 웃었다. 그러나 현이의 표정이 너무 낯설어 속상했다. 쭈의 것은 자석이 달린 곤충 3종이었다.

3. 저녁 식사

남편이 늦는 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었지만 루드 부부는 궁금해하는 것 같기에 "청소하고 가지고 오느라 늦다"고 했더니 이해할 만하시다는 표정으로 웃으신다. 차가 왔고 당연히 앞자리를 루드에게 권하고 루드가 차 문을 열었다. 그때서야 다리 놓는 부분에 차량용 냉장고가 있음을 알았다. 한국인이야 일명 '양반다리' 자세가 편해 그것의 존재가 그리 불편치 않겠으나 루드는 많이 당황하면서 엉성한 폼으로 올라앉았다.

남편은 민망하고 미안해하며 그것을 치우자고 했으나 루드와 나는 "괜찮다. 그냥 가자"고 했다. 차를 탄 후 차량 곳곳에 노골적으로 배어 있는 김치 냄새에 적잖이 궁금해 하고 있을 듯하여 "이 이상한 냄새는 한국 피클 냄새입니다"라고 먼저 말했으나 그들은 기척이 없었다. 알아서 상상하세요.~~~

루드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어느 낯선 곳을 가더라도 페트라의 코가 인도하는 식당을 들어가면 틀림없다고 했다. 그녀의 코는 절대 후각을 가졌단다. 나는 절대 미각을 가진 장금이는 알지만 절대 후각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다. 여하튼 '버거'에 있는 이 작은 식당도 페트라의 코가 인도한 곳으로 맛이 좋단다. 이미 자리가 많이 찼고 다행히 우리가 앉을 수 있는 6개의 좌석이 있었다. 정확히 홀의 가운데 자리이다. 이미 자리 잡고 앉아 있는 다국적 여행자 및 현지인들은 우리의 조합에 대해 궁금해하는 듯 느껴진다.

오늘의 요리를 먹겠느냐? 수프는 이런 것이 있는데 수프부터 시작하겠느냐 등 점원의 말이 길었지만 우린 루드가 맛있다고 말한 '비프스테이크'를 한국에서 자장면 시키듯 일사불란하게 시켰다. 우리의 대화는 가족, 비전, 사업, 자녀 등의 주제였기에 동등한 입장에서 좌석에 앉은 듯 첫 만남 때의 그 느낌처럼 편안했다.

루드는 자동차 정비 사업을 크게 하고 있는데 몇 년 전 은퇴했단다. 한국의 분주하고 치열한 생활사를 아는 듯 '네덜란드도 한국처럼 일만 한다'고 말해 우린 네덜란드의 삶에 대해 처음 알았다. 여하튼 이젠 은퇴하고 사업장을 헐값에 사업 수완이 좋은 큰딸에게 넘기고 쉬려고 하는데, 국가에서 아프리카 르완다에 '자동차 정비소 건축 프로젝트'를 제안했단다. 루드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아내로 사업 파트너로 평생을 함께해 온 페트라가 "이건 당신이 해야 한다, 2년 동안 르완다에 다녀오자"고 하여 8월에 르완다로 나간단다. 아프리카 중에서도 중앙의 동부 쪽에 외부 자본이 몰리며 경제 재건의 붐이 일고 있단다. 치안에 대해 묻자 르완다는 정말 안전하다고 한다. 케냐 같은 곳은 밤에 돌아다니면 칼에 찔리고 돈을 뺏기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르완다는 좋단다. 다행이다.

산만하고 열정적인 루드와 조용하고 침착한 페트라.
 산만하고 열정적인 루드와 조용하고 침착한 페트라.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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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결혼 생활을 해 오고 있음에도 "아내는 나의 전부이다"라고 말하며 "나는 아직도 느낀다"고 말하는 루드의 얼굴에 장난기가 전혀 없다. 여전히 페트라는 어깨를 살짝 들썩하며 말없이 웃는다. 푸하. 늘 루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까지 다 치고 난 후 창고에 갖다 넣으면 페트라는 '뭐 흘리고 간 것 없나?' 살펴보며 조용히 그가 지나간 길을 따라갈 것 같다.

여하튼 루드의 말대로 부부는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맺어지는 게 맞는 것 같다. 처음엔 그 다름 때문에 매력을 느껴 결혼을 했다가 때론 그 다름 때문에 서로 갈증을 느낄 때도 있고 그럼에도 여전히 그 다름은 결혼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이에 남편은 루드는 자동차로 따지면 '엑셀러레이터'이고, 페트라는 '브레이크' 아니겠느냐고 말하며 나를 우리 집의 엑셀러레이터로 소개했다.

엑셀레이터 역할의 네덜란드 남자와 브레이크 역할의 한국 남자다.
 엑셀레이터 역할의 네덜란드 남자와 브레이크 역할의 한국 남자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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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굽기로 구워진 스테이크는 맛있었다. 밖으로 나와 관광지임을 전혀 느낄 수 없이 깜깜한 버거의 바다를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좋았다. 흡연가인 페트라가 담배를 피웠고 기침을 했다. 기침 소리에 예민한 나는 페트라가 담배를 끊고 폐를 돌보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한국에서 도라지 가루를 좀 보내주고 싶을 만큼 애정을 느꼈다.

4. 작별

다음 날 캠핑장을 떠나기 전 루드와 페트라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어제 저녁 식사 내내 현의 상처 부위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페트라는 인사와 동시에 현의 얼굴을 살핀다. 루드는 나와 프리허그를 하고 볼 뽀뽀로 작별 인사를 했고, 아프리카로 갈 것을 대비해 또 다른 메일 주소를 알려 주었다. 집 안쪽에 있는 보비는 그 날의 일을 기억하는 듯 현을 보고 안쪽에서 으르렁거렸다. 순한 아이인데 짐승에게도 그 일이 상처이긴 매한가지이다. 더 가까이, 억지스럽게 인사를 하는 것은 보비를 위한 게 아니기에 멀찍이서 사진을 찍었다.

8월 거의 같은 시기 우린 한국으로 돌아가 평범한 일상을 시작할 터이고 루드와 페트라, 그리고 보비는 아프리카 르완다로 떠날 것이다. "조심히 운전해야 한다"고 말한 후 훤한 대낮에 대문짝만하게 보이는 우리의 찌그러진 문짝을 보고는 "운전 정말 조심해라"고 다시 한 번 말해주었다. 나는 사업의 성공과 무엇보다 그들의 건강을 응원해 주었다.

나: 한국에 돌아가면 전 우리 가족의 여행 이야기를 책으로 쓸 거예요. 물론 네덜란드 개에게 물린 일 등 루드와의 에피소드도 쓸 거예요.
페트라: 아주 좋은데.
나: 다행히 그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에요.

아프리카 출신. 다비드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우리를 싣고 캠핑장을 한바퀴 돌았다.
 아프리카 출신. 다비드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우리를 싣고 캠핑장을 한바퀴 돌았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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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2년 맞벌이 엄마, 아빠, 5살, 7살 두 딸은 직장과 유치원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쉼(태국), 사랑(터키), 도전(유럽캠핑)을 주제로 5개월간 여행하였습니다. 본 여행 에세이는 그 중 도전을 주제로 한 유럽캠핑에 관한 글입니다.



태그:#리씨네 여행기, #유럽캠핑, #포르투갈, #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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