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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는다. 삽겹살이다. 중국에서 삼겹살이라! 한국에서 자주 먹는 것인데도 여기 타국에서 먹는다 하니 반갑기 그지없다. 중국 쪽에서 한국 사람의 입맛을 생각해 식당을 잡아준 듯 했다. 조금 느끼한 음식만 먹다가 삼겹살을 먹으니 살 것 같다. 조선족인 식당 주인은 구수한 된장국까지 끓여내는데 한국에서 먹는 것과 똑 같다. 고기보다 된장국이 더 맛있어 연거푸 숟가락을 입으로 놀리니 속이 편안해진다. 거기에 하얀 쌀밥도 뚝딱 먹어치웠다. 모처럼의 포만감에 그냥 눕고 싶다. 나만 그런가 싶었는데 옆에 있는 종완이 형님도 그렇단다.

아이들은 저녁을 먹고 각자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집으로 갔다. 아이들은 중국 학생 파트너 집에서 3일을 잔다. 교류학습의 하나가 현지인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문화나 생활방식, 생각들을 함께 체험하고 느끼는 것이다. 잠도 함께 자며 살을 맞대다 보면 아이들이라 그런지 금방 친해진다. 중국학생들이 한국에 왔을 땐 4일을 한국의 아이들 집에서 지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손짓 발짓, 서툰 영어로 대화를 하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하다. 그러다 헤어질 땐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 한다. 그만큼 정이 든 것이다.

삼겹살에 시봉주 그리고 된장국

아이들이 각자의 파트너와 집에 가자 82중학 교사 한분이 술을 가져왔다. 시봉주라는 술이다. 도수를 보니 45도다. 속으로 이걸 먹어? 하는데 무조건 한입에 털어라 한다. 중국인과 술을 먹으면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쭝꿔시. 한꿔시'다. 즉, 중국식과 한국식이다. 우리는 소주 한 잔도 주량이나 취향에 따라 한두 번 나눠 마신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게 없다. 잔이 작은 이유도 있겠지만 무조건 한입에 턴다. 어쩌다 조금이라도 남겨놓으면 끝까지 마시라고 눈총 아닌 눈총을 준다.

그들은 쭝꿔시 쭝꿔시 하며 술을 권하고, 우리는 한꿔시 한꿔시 하며 최대한 덜 마시려 한다. 예전에 그러다 목청을 높여 분위기가 냉랭해진 적도 있다고 한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에게 쭝꿔시 쭝꿔시 하며 술을 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의 술 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 그들도 무조건 술을 권하지 않는다.

또 하나 이들의 술 문화 중 하나는 식당에 가면서 자신들이 마시는 술을 직접 사들고 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술을 가지고 음식점에 가면 온갖 눈총을 받겠지만 이들은 자연스럽다. 이들은 술을 마시면서 한 번도 식당에서 술을 시키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모두 가져와서 마신다. 식당에선 음식만 시켜먹을 뿐이다.

술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만 더하자. 우리는 그들이 주는 술을 마시면서 이거 진짜일까 가짜일까 하며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워낙 가짜가 많기 때문이다. 시봉주도 가짜가 많다고 한다. 최고급 술이라 해서 샀는데 그것도 가짜였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말에 의하면 '장안주(長安酒)'는 가짜가 없다고 한다. 그 이유까진 듣지 못해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단다. 시안 사람들은 장안주를 마시며 인간의 정을 마신다고도 하니 그들이나 우리나 술 한 잔에 마음을 나누는 것은 매 한가진가 보다.

그렇게 모처럼 시봉주로 간단한 반주 삼아 삼겹살을 먹는데 식욕이 당긴다. 구들방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아홉 시가 넘었다. 의자 문화에 익숙한 乔武举(챠오우쥐) 선생은 큰 키에 방바닥에 앉아있으려니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다며 몸을 베베 꼰다.

아이들도 없는 지라 여유를 가지고 이야기하다 보니 곡강대당불야성 구경을 놓쳐버렸다. 8시 쯤 가기로 했는데… 시간이 늦어 안 된다 한다. 말로만 듣던 곡강대당불야성의 야경은 다음으로 미뤘는데 그 다음이 언제쯤 올지 모르겠다. 대신 밤은 아니지만 다음 날 낮에 그곳을 구경하기로 했다.

섬서박물관에서 발해을 보며, 잃어버린 역사를 떠올리고

다음 날, 우리는 50명의 아이들과 섬서역사박물관과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불법을 가지고 탑을 쌓았다던 대안탑, 바로 옆의 곡강대당불야성으로 유명한 당나라의 거리를 걸었다.

섬서박물관은 중국의 중앙박물관이 아닌 지역 박물관이면서도 그 규모가 엄청났다. 박물관 안의 유물들을 대략 훑어보더라도 서너 시간은 족히 필요하다. 이곳 섬서가 중국 문명의 발생지이고, 역대 중국 13개 왕조의 흥망성쇠의 무대이다 보니 정품 유물만 3000여 개가 진열되어 있다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진시황 병마용 유물들
 박물관에 전시된 진시황 병마용 유물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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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모양의 박물관 1층엔 선사시대부터 주·진나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엔 한나라부터 위진남북조와 수· 당의 유물과 중국 마지막 왕조인 청의 유물까지 그 양이 방대하다. 그 많은 것들을 보기 위해 박물관 안은 인산인해다. 유물을 보러 왔는지 사람을 보러 왔는지 모를 지경이다.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전시물들을 차분히 감상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姚卓君(야오쭈어쥔) 선생은 하나라도 설명해주기 위해 애를 쓰고 우리는 그 설명을 듣기 위해 애를 썼다. 땀을 흘리면서도 우리를 인도하며 진·당·명나라 등 유물들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해박하다. 전공이 역사가 아닌데도 말이다.

"어떻게 그리 잘 아세요?"
"많이 와 보구 공부해요."
"여기 몇 번이나 와 봤는데요?"
"여덟 번 정도 왔어요."

박물관의 유물들에 대한 姚卓君 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난 얼마나 우리 유물이나 유적에 대해 알고 있나 반문해봤다. 얼마나 공부하고 알고 있나 생각해보는데 아주 피상적인 정도만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들도 깊게 까진 알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많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가 만일 중앙박물관이나 각 지역의 박물관에 외국의 손님을 안내한다 할 때 얼마만큼 제대로 안내할 수 있을까? 잘못된 역사적 지식을 가지고 설명은 하는 건 아닌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반가운(?) 지도와 글자를 발견했다. 발해다.

위진남북조 시대와 함께 그려진 발해(渤海). 중국의 한 지역을 우뚝하게 차지하고 있는 발해. 우리의 역사에서 서자 취급을 받을 만큼 별 대우를 받지 못하는 발해라는 단어를 보며 반가웠던 것은 나 역시 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이리라.

박물관 안에서 전시된 유물을 그대로 모사하고 있는 모습.
 박물관 안에서 전시된 유물을 그대로 모사하고 있는 모습.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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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서박물관을 돌다 보면 조금은 특이한 게 하나 보인다. 조각하는 사람들이다. 박물관 곳곳에서 몇몇 젊은 사람들이 유리관 안에 있는 유물 그대로 전등빛 아래에서  전시된 작품들과 똑 같은 모형으로 세밀하게 조각하고 있다. 정교하고도 세밀하게 모사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진지했다.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그들은 오로지 작품을 만드는 데만 집중하는데 그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안탑이 왼쪽으로 기울어진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박물관을 나와 버스를 타고 곡강대당불야성으로 갔다. 밤이 아닌 한낮이라 그런지 대당불야성은 깔끔하고 한가했다. 버스에 내리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서유기의 삼장법사로 잘 알려진 현장법사의 동상과 그곳에서 바라본 대안탑이다.

대안탑은 대자은사 경내에 있는 탑이다. 처음 5층이었던 탑은 현재 7층 석탑이다. 대안탑은 본래 자은사탑(慈恩寺塔)이었는데 대안탑(大雁塔)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유래가 있다. 하늘을 날던 기러기 무리 중에서 한 마리가 떨어져 죽었다 한다. 그 기러기를 매장하고 그 위에 탑을 지은 것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그래서 기러기 안(雁)을 써서 대안탑이라 했다 한다.

대자은사 안의 대안탑
 대자은사 안의 대안탑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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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안탑 안엔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이 보관되어 있다고 중국 사람들은 믿고 있다. 아직까지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안탑 한 번 자세히 볼래요?"
대안탑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해주던 오 선생이 갑자기 탑을 바라보라고 한다.
"왜요?"
"자세히 한 번 쳐다보세요.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자세히 한 번 보세요."
"기운 것 같기도 한데. 왜 그래요?"

한때 대안탑이 왼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한다. 현재와 같은 공간으로 개발되기 전 이곳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때 땅속의 물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공간이 생겼다 한다. 원인을 찾던 시에선 그 원인이 지나치게 물을 사용함으로 생긴 것을 파악하고 지금도 매년 탑 주위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고 했다. 그 뒤로 탑이 점차 제자리를 찾아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아직도 약간 기울어져 있다고 했다.

현장법사와 그 뒤로 보이는 대안탑. 시안 사람들은 대안탑 어딘 가에 현장법사가 가져온 불경이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현장법사와 그 뒤로 보이는 대안탑. 시안 사람들은 대안탑 어딘 가에 현장법사가 가져온 불경이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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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탑의 이야길 들으며 다산초당의 약천이 생각이 난다. 4전 전에 초당에 올랐을 땐 다산이 차를 끓여 마시고 음용수로 사용했던 약천엔 물이 낙엽과 함께 찰랑거렸다. 그러다 2년 전에 다시 올랐을 땐 물이 거의 마른 상태였다. 그 이유를 주변 사람에게 물으니 농수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었다. 산 아래 농가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관정을 많이 파다 보니 물이 말라 약천의 약수까지 마른다는 이야기였다.

대안탑의 이야길 들으며 대당거리를 걷는다. 대안탑이 있는 대자은사는 시간상 들어가지 못했다. 경내를 구경하지 못하는 아쉬움 대신에 대당거리의 우람한 조각품들을 감상한다.

당태종의 상
 당태종의 상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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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불야성거리인 이곳은 당나라 시기의 주요 인물들의 모습을 재현시킨 상업거리이다. 상업거리인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낮과 밤에 이곳을 찾는데 약 1.5㎞ 정도의 거리의 중앙에 성세제왕(盛世帝王), 역사인물, 영웅이야기, 예술작품 등의 조각 작품을 통해 당나라의 종교와 문화 예술 등의 모습을 재현시켜 놓았다. 그곳엔 당태종 이세민을 비롯한 당현종, 측천무후, 현장법사 등 주요 인물들과 당시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죽 늘어서 있다. 작품 양 옆으론 수경(水景)시설이 설치되어 밤엔 더욱 멋진 풍광을 자아낸다 하나 보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당대의 역사인물이나 그들의 이야기 등을 예술작품으로 조성해 이들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중국의 역사를 은근히 과시하고 있는 듯했다
 당대의 역사인물이나 그들의 이야기 등을 예술작품으로 조성해 이들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중국의 역사를 은근히 과시하고 있는 듯했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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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품들을 감상하다 걸음이 멈춰진 곳이 이세민 조각상 앞이다.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이세민의 모습을 보노라니 자연스레 떠오른 인물이 연개소문이다. 연개소문은 어쩌면 이세민의 치적에 유일하게 굴욕을 준 인물이 아닐까 싶다. 실제 중국 경극에서 연개소문이 아주 나쁜 인물로 등장한 적이 있었다 하는데 중국인에게 아니 당태종 이세민이게 연개소문은 숙적 중의 숙적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중국을 여행하며 우리의 역사의 흔적을 바라보는 일이 조금은 오묘한 마음을 가져다주었다.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태그:#시안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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