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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에게 어울리는 맥 - 시안 03
▲ [당신에게, 실크로드 05] 모험가에게 어울리는 맥 - 시안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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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 시안

시안은 근사한 여행지다.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무림의 고수들이 경합을 겨룬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고, 다양한 문화가 중국식으로 녹아든 거대한 용광로기도 하다. 먹고 놀기도 좋다. 매일 회족거리에 가서 간식을 먹거나, 넓적한 면인 빤미엔, 양고기국에 빵을 넣은 파오모 등으로 한 끼를 해결하기도 했다. 쭉 뻗은 명대성벽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저녁이면 꼬치 굽는 냄새를 따라 골목을 헤맸다.

과거 이곳은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다. 이곳으로 모여든 문화는 다시 주변지역으로 갈라져 퍼져나갔다. 시안에서 실크로드의 흔적을 찾는 것은 보물지도를 들고 고대의 뱃길을 따라 항해하는 것처럼 흥미진진했다.

측천무후와 당고종의 합장묘가 있는 건릉에서도 다양한 문화교류를 볼 수 있었다. 당시 당나라에 문상 온 61개국 신하들의 실물 크기 석상군이다. 동군은 동쪽나라 29명, 서군은 서쪽나라 32명이다. 머리와 발이 잘려 있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당나라와 교류가 있던 신라 사신도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로 석상이 파손된 이유는 인근 농부들이 밤에 사신들이 자꾸만 와서 농작물을 망친다는 이유로 머리와 발을 잘랐다고 한다.

측천무후의 무자비를 지나면 머리와 발이 잘려나간 61개국 외국 사신들의 석상이 있다
▲ 건릉 61 사신상 측천무후의 무자비를 지나면 머리와 발이 잘려나간 61개국 외국 사신들의 석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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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반쯤 남아있는 사신상
▲ 건릉 61 사신상 얼굴이 반쯤 남아있는 사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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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태자묘에서는 조우관을 쓴 한반도 사신도 만날 수 있었다. 묘실로 내려가는 지하회랑에 다양한 나라의 사신과 함께 머리에 새 깃털을 단 사내가 있었다. 이 조우관은 고구려 시대 무용총에도 나온다. 머리에 깃털을 꽂는 풍습은 고구려뿐 아니라 삼국, 가야 모두에서 널리 행해졌다고 한다. 이 조우관을 쓴 남자는 후에 둔황석굴에도 사마르칸트 아프랍시압 유적에도 등장한다.

조우관을 쓴 사신
▲ 예빈도 조우관을 쓴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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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새로운 것이면 무엇이든 환영받던 도시, 당나라의 장안(시안)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간 만큼 다양한 믿음도 들어왔다. 중앙아시아의 마니교,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아랍의 이슬람교, 그리고 유럽의 기독교까지 이곳에 있었다 한다. 지금도 '비림(碑林)'에 가면 기독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엄밀하게는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몰려, 인도, 페르시아, 중국으로 이주한 네스토리우스파의 흔적이다.

당시 초기 그리스도교는 사상적 체계를 확립하는 도중, 예수의 본성에 대한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예수가 삼위일체 안에서 완벽한 인성과 완벽한 신성을 지닌 존재지만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느냐 마느냐의 논쟁이었다. 이 논란은 결국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호칭 문제로 불거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공존한다고 주장한 안디옥학파의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어머니를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라고 불렀다. 반면, 알렉산드리아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하나이기 때문에, 마리아를 '테오토코스(theotokos)' 즉 '신의 어머니'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신학논쟁에서 패해 추방됐다. 그리고 그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 뿐 아니라 몽골까지 진출했다. 후에 13세기 유럽 사람들은 동쪽에 '사제왕 요한'이 다스리는 기독교 왕국이 있다고 믿었다.

네스토리우스파가 장안에 도착한 사연은 비림에서 찾을 수 있었다. 비림은 한나라 때부터 모은 2300여 개의 비석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다. 비림 제 2실의 '대진경교류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国碑)'에 보면 당시 서방의 종교였던 경교가 어떤 토착화를 겪었는지 알 수 있다.

635년 당 태종 때, 대진이라는 나라에서 아라본이라는 고승이 온갖 역경을 뚫고 푸른 구름의 도움으로 이곳에 왔다고 한다. 대진은 중국이 로마를 칭하던 이름이다. 황제의 허락으로 포교가 인정되고, 최초의 사원은 서시에 세워졌다. 그후 250년 동안 만 명의 신도를 포섭할 정도로 번성했던 경교는 9세기 중반,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등 다른 종교와 함께 배척을 받고 중국 내부에서 사라진다.

문방사우와 기념품 등을 판매하는 좌판이 있는데, 소라아오이 카드도 팔고 있었다
▲ 비림 가는 길 문방사우와 기념품 등을 판매하는 좌판이 있는데, 소라아오이 카드도 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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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성벽앞에서 웨딩촬영을 하는 커플.
▲ 비림가는 길 명대성벽앞에서 웨딩촬영을 하는 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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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사람들, 새로운 문물와 믿음이 드나들며 발전했던 국제도시 시안. 실크로드를 따라 모여든 문화는 이곳으로 모였다가 다시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첼리스트 요요마는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실크로드를 '고대의 인터넷'이라고 했다.

실크로드가 인터넷이라면, 시안은 인터넷 허브사이트나 네트워크 플랫폼인 셈이다. 실크로드를 따라 각 민족, 지역별로 따로 존재하던 문명들이 만났다. 그리고 서로 만난 문명은 다시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 냈다. 마치 씨줄과 날줄이 만나 비단이 되듯이. 그렇게 생각해보면 시안은 그 도시자체가 화려한 무늬들로 짜여진 비단이었다.

기러기를 따라 길을 떠난 사람들

627년, 승려 현장은 천축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번역된 불경으로 공부하다 보니 '원본'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평소에도 어찌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사람들은 그를 '삼장법사'라고 불렀다, '삼장'은 불교 경전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 조정에서는 백성의 출국을 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장은 요리조리 잘도 도망쳤다. 양주에서 잡혔으나 과주로 도망하고 옥문관을 넘어 고창(지금의 투르판)을 지났다. 그리고 쇄엽성(지금의 키르기스스탄 북부)을 지나 인도 나란다 대학으로 갔다. 나란다는 지금 인도 비하르주의 라즈기르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당시에는 만 명이 모여 공부했다는 큰 대학이다. 현장은 이곳에서 5년 동안 공부하고, 645년 불경 600권을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현장이 돌아온 것을 듣고 당의 태종은 그를 마중나갔다. 처음엔 도망자의 신분이었지만, 지금은 서역의 정보를 지닌 1급 정보원인 것이다. 이후 그는 서역과 천축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책을 썼고 그 책이 <대당서역기>다. 지금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손오공의 스승 '삼장법사'로 알려져 있다.

대자은사 경내의 대안탑, 652년 건립
▲ 현장과 대안탑 대자은사 경내의 대안탑, 652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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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현장이 가져온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탑이 자은사의 대안탑(大雁塔)이다. 어느 날 현장이 천축으로 가는 도중 길을 잃었다.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염불을 외자 기러기가 두 마리 나타나서 그를 인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안탑의 '안'자는'기러기 안(雁)'이다.

자은사에 도착해서 대안탑을 향하자 다시 입장료를 내라고 한다. 겉으로 보이는 위용에 비해 내부가 생각보다 크진 않았다. 각층마다 그림이나 진귀한 불교용품, 서적 등이 전시되어 있다.

탑의 계단은 가파르나, 위에 올라서면 동서남북의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다. 주작대로를 따라 쭉쭉 뻗은 스카이라인이 멋지다. 그때는 진사시험에 합격하면 이곳에 붉은 묵으로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대안탑은 당시 랜드마크였을 테니 이곳에 이름이 새겨지는 것은 큰 영광이었을 거다. 당시 시안은 세계의 수도라고 불려도 손색없는 곳이었다. 진사시험에 합격한 후 이곳에 올라 시안을 내려다보는 기분을 떠올려봤다.

그날 밤, 다시 대안탑을 다시 찾았다. 8시 30분부터 대안탑을 배경으로 그 앞에서 화려한 레이저 분수쇼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서양의 클래식부터 중국전통가요까지 다양한 음악에 맞춰 광장의 바닥 전체에서 분수가 춤을 춘다. 시간을 거슬러 국제도시 장안의 밤처럼 흥겨운 기분이다.

매일 저녁 8시 30분부터 30분간
▲ 대안탑 분수쇼 매일 저녁 8시 30분부터 30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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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에는 현장의 대안탑뿐 아니라 혜초의 절도 있다. 바로 대흥선사다. 727년 신라 출신 혜초는 시안에서 길을 떠났다. 인도, 중앙아시아, 이란, 아랍 등 40여 개국을 여행한 후 이곳에서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했다. 대흥선사는 빌딩 숲 사이에 숨어 있다. 시안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다.

중국에서 절 방문은 처음이다. 중국 특유의 과장된 절 분위기며 장식들이 흥미롭다. 금목걸이에 짧은 머리를 한 남자들이 관음보살상에 절을 하고 있었다. 짧은 소매 안으로 팔뚝 문신이 보인다. 홍콩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평일 오후인데도 구석구석 참배하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랬지만 아직도 불교는 중국인 생활 속에 기복신앙으로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옥이나 보리수나무 열매를 새겨 만든 불교 장식물은 전 연령층에서 하고 있었다. 베이징 전철에서 재미있게 본 건 이 불교장식물과 하이패션과의 조화였다. 완벽하게 세련된 차림의 도시 아가씨도 손목에 빨간 끈으로 된 옥부처를 묶고 다니고, 해골무늬가 즐비한 힙합 차림의 젊은이도 보리수나무 열매로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소림사 아니고 대흥선사입니다
▲ 대흥선사 승려 소림사 아니고 대흥선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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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는 당시 있는 집 자제들만 간다는 당나라 유학파였다. 15살 중국으로 떠나, 밀법승 금강지를 만나고 스승의 권유로 길을 떠난다. 그가 19살 때의 일이다. 갈 때는 배를 타고 인도양을 거쳐 인도로 갔다고 한다. 당시 천축은 동·서·남·북·중 다섯 천축이 나뉘었는데, 혜초는 그 다섯 천축을 다 방문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아랍, 페르시아, 중앙아시아를 거쳐 장안으로 돌아왔다. 사막, 고원, 도적떼, 추위, 맹수가 함께 하는 장장 2만km가 넘는 길이었다. 그 긴 여정동안 혜초는 총 5편의 시를 남겼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 바라보니
뜬구름만 흩날리며 돌아가고 있네
편지라도 써서 구름편에 부치고 싶건만
바람이 급해 구름은 돌아보지도 않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는데
남의 나라 땅 서쪽 모퉁이에 와 그리워하네
더운 남쪽 천축은 기러기도 없으니
누가 고향의 숲을 향해 날아가려나
- 발췌, <왕오천축국전> 역주 지안

하지만 그는 결국 계림에 돌아가지 못하고 당나라에서 생을 마감했다. 훗날 1908년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가 둔황 막고굴 장경동에서 <왕오천축국전>의 필사본 중 일부를 발견했다. 그의 기행문이 학계의 관심을 받은 이유는 지리와 기후뿐 아니라 문화, 종교, 풍속, 제도 등 그 곳 사람들의 일상생활상을 서술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왕오천축국전>은 현장의 <대당서역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븐 바투타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와 함께 세계 4대 여행기로 꼽히고 있다.

전인미답(前人未踏).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있다. 당나라의 현장이 그랬고, 신라의 혜초가 그랬다. 지인 하나 없고, 정보도 없는 곳들을, 오직 진리를 찾겠다는 열망 하나로 걸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떠났다. 돌아온 사람만이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현장은 기러기를 따라 여행했고 혜초는 기러기라도 봤으면 좋겠다고 탄식했다. 실크로드를 여행하며 가장 많은 위안을 받았던 것이 이 여행 선배들이 남긴 기록들이었다. 그들도 외로웠고 무서웠구나 생각하면 어쩐지 덜 외롭고 덜 무서웠다.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유대감이다. 길 위에 서 본 사람만이 아는 감정일 거다.

모험가에게 어울리는 맥주

시안의 마지막 날, 개원문(開遠門)에 갔다. 아무래도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지라 호스텔 직원에게 설명은 들었어도 잘 모르겠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아무래도 이 버스가 아닌 것 같다. 뒷자석의 젊은 중국인 커플에게 물어보니 내려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란다. 그러더니 따라 내려 내가 타는 버스를 살펴봐주고, 자기들은 다시 버스를 타고 떠났다. 불친절한 중국인이라더니 대부분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베이징에서 10년째 살고 있는 미국인 조슬린은 베이징 올림픽 이후의 큰 변화라고 했다. 보이는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던 중국인들이 외부적으로 보이는 모습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크로드 기점 군상
▲ 개원문 실크로드 기점 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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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실크로드 출발문
▲ 명대성벽 서문 당나라의 실크로드 출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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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문은 서문에서 5km 정도 떨어진 도로 한복판에 있다. 딱히 큰 구경거리가 있는 건 아니다. 자그마한 공원에 실크로드로 떠나는 낙타 대상의 조각상인 '실크로드 기점군상'이 서있다. 여기가 실크로드 출발지라는 의미다. 장안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에겐 여기가 출발지였을 거다. 내겐 내가 출발한 경주가 실크로드 출발지다. 사람은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세상을 본다. 나는 동쪽 끝에서 출발해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다.

내일 시안을 떠나 더 서쪽, 란저우로 간다. 마지막으로 판과 허를 만나 저녁을 먹었다. 꼬치구이를 먹으면서도 허는 일장 연설이었다. "제발 가방 간수 좀 잘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중국에 소매치기가 많은데 나처럼 정신줄 놓고 다니면 금방 다 털릴 거라고 잔소리다. 옆에서 판은 "앞도 좀 보고 다니라"고 덧붙인다. 몇 번 넘어졌던 게 인상에 남았나 보다. 어느새 그 둘은 잔소리꾼이 되어 있었다. 결정타는 이거였다.

"모르는 사람한테 먼저 웃지 마. 네가 안 웃으면 한족 같은데 말야. 중국에서는 모르는 사람한테 먼저 웃거나 먼저 인사 안해. 너처럼 실실 웃고 다니면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한단 말야."

경영학과를 졸업한 허는 곧 지방 공무원이 된다. 그가 경영학을 전공한 것은 부모님의 뜻이었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판은 차이나텔레콤의 신입사원이 된다. 언젠가는 멀리 가고 싶지만 지금은 부모님이 반대하니까 일단은 일을 할 거란다.

재미삼아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봤다. 맨날 이상한 거만 묻는다며 타박하면서 늘 성실하게 대답하는 친구들이다. 허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하고, 판은 "설득 시킬 수 있다"고 대답한다. 나는 그냥 웃었다. 같은 질문을 독일 친구에게 했을 때, 그 친구는 질문 자체를 이해를 못했다. "부모님이 내 결혼을 반대해? 근데(so what)?" 그러나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동쪽, 아시아다. 이곳은 아직 부모의 테두리에 있다.

용틈천애. '세상의 끝을 향해 용감하게 탐험한다'는 뜻이란다.
▲ 설화맥주 용틈천애. '세상의 끝을 향해 용감하게 탐험한다'는 뜻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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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쪽은 비즈니스맨의 세계야, 부자든 가난하든 시간이 빨리 흘러가지. 하지만 네가 가려는 서쪽은 시간이 아주 느릴 거야. 동쪽과 서쪽은 아주 다르거든. "

허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술을 마셔야겠다. 어떤 맥주가 좋겠냐고 물어보자 판이 처음 보는 맥주를 가져온다.

"너 같은 모험가에게는 이 맥주가 어울릴 거야."

설화맥주라고 적혀 있고, 산을 오르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맥주는 탄산이 강하고 아련하게 꽃향기가 났다. 모르는 세계로 가는 설렘과 불안함, 그리고 길을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과 성취를 꿈꾸는 마음 등이 섞여 있는 시안의 마지막 밤이었다.

'一路順風(일로순풍,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뜻)'
▲ 친구들이 적어 준 메시지 '一路順風(일로순풍,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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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여행 중, 실크로드- 경주, 중국,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로마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실크로드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 진행형 이야기입니다. 더블어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노처녀의 한풀이이기도 합니다. 실크로드에서 건져낸 이야기를 점과 점으로 이어,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또 하나의 실크로드가 그려졌으면 합니다.



태그:#실크로드, #시안, #대안탑, #비림, #명대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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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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